—아 우리 오 킬로미터, 너무나 반갑습니다. 네, 마라톤은 오 킬로미터죠. 설렁설렁, 무리해서 뛰지 말고 안전하게 다녀오십시오!
스타트라인에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던 탄은 사회자의 멘트를 듣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몇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이젠 제법 굵은 빗줄기로 바뀌고 있었다.
—여러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한 시간 안에만 들어오시면 됩니다. 잘하면 먼저 출발한 하프 선수들보다 먼저 들어올 수 있어요. 자, 옆에 있는 우리 엄마 아빠, 자녀분들, 우리 사랑하는 애인, 친구, 모두 꼭 안아주세요. 사랑합니다, 해주세요.
갑자기 이 분위기는 뭐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탄은 어느새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부모님, 헤어진 애인,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탄은 덩그러니 서서 서로 포옹하고 하이파이브 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래, 언제까지나 그렇게 함께일 것 같지? 탄은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어차피 시작과 동시에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속도로 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탄이 생각하는 마라톤의 매력이었다. 수영을 좋아했던 이유도 비슷했다. 자유 수영은 테니스나 축구처럼 파트너가 필요하거나 팀으로 진행되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홀로 자신의 속도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탄의 삶에서 수영은 제외된 지 오래였다. 수영 말고도 하나씩 뺄셈이 된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는 인 씨 성을 가진 사람은 되도록 피했다. 더 이상 유리컵은 사용하지 않았다. 퀵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은 지도 벌써 일 년째였다. 5km를 무사히 완주하고 나면 마라톤도 그의 삶에서 제외될 것이었다. 이나를 마주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인생은 그야말로 제치는 것들의 연속이었다. 탄은 자신의 삶이 깔끔해지다 못해 결국엔 텅 비어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팡, 하는 출발 신호총 소리와 함께 스타트라인을 가로막던 기다란 줄이 끊어졌다. 파랑, 노랑, 초록의 얇은 연기 기둥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더니 우중충한 하늘을 뒤덮었다. 종말 직전에 열리는 마지막 축제 분위기 같았다.
탄은 연습할 때의 속도를 기억하며 천천히 달려나갔다. 스타트라인 구역이 있던 공원을 벗어나자 승용차와 버스 들이 다니던 아스팔트 도로가 나왔다. 저 멀리 아파트 단지 창문 밖으로 한 꼬마가 손을 흔드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십오 분쯤 달리자 크게 턴을 하는 구간이 나왔다. 그곳에선 응원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V자 튜브를 신나게 맞부딪치거나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부장님 파이팅, 와 대표님 멋져요, 야 이 새끼야 빨리 좀 뛰어…… 회사나 친목 동호회에서 단체로 나온 팀을 응원하는 동료들 그리고 몇몇 의리 있는 누군가의 친구들. 모두 탄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었다.
비인지 땀인지 모를 물줄기가 탄의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빗소리와 발소리가 뒤섞여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결승 지점은 생각보다 쉽게 가까워 오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멱살을 잡고 있기라도 한 듯 자꾸 숨이 막혀왔다. 기분 탓인가. 탄은 뛰면서 주변을 살폈다. 사회자 말대로 뒷동네 산책하듯 부담 없이 뛰어도 되는 코스여서 그런지 혼자 뛰기보다는 무리를 해서라도 파트너의 속도에 맞춰 함께 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기록이 아니었다. 함께 뛰는 것이었다. 탄은 오늘 자신이 마라톤 대회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아니, 한 명 있긴 하구나. 이나가 나를 봤으니…….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오는 연락마저 자주 놓치는 일은 어느덧 그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간밤엔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놓쳤다. 사실 전화를 못 받았다기보다, 부러 받지 않은 것이었다. 탄은 번역 일에 집중하느라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놨다고 핑계를 대며 자주 전화를 받지 않곤 했다.
그는 아빠와 딸, 애인과 애인, 친구와 친구 등 여러 조합으로 뭉친 참가자들을 계속해서 앞지르거나 뒤처졌다. 빨리 완주한 뒤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결승 지점은 출발 지점과 같았다. 스타트라인이 있던 지점은 파이널 지점 라인으로 변신해 뒷동산 달리기 참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이널 지점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 슬슬 한계에 이르는 듯했다. 연습 때와 달리 호흡이 다소 가빠져왔다. 그래도 탄은 멈춰 서지 않았다. 막판엔 일부러 속도를 더 내서 달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사히, 파이널 라인을 통과했다. 탄은 숨을 헐떡이며 얼른 타이머를 확인했다. 25분 04초를 지나고 있었다. 연습 때와 비슷한 기록이었다.
완주한 참가자들 사이에 줄을 서서 크림빵과 생수, 기념 메달을 받았다. 그런데 상이라니, 너무 오랜만인데. 굵은 자주색 리본 목걸이 끝에 번쩍이는 은색 메달이 걸려 있었다. 메달을 바라보던 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비록 5km라는 짧은 거리였지만 생각보다 뿌듯했다. 누가 잘했다며 엉덩이라도 두드려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활짝 웃을 여유 따윈 없었다. 짐을 찾으러 가야 했다. 아직도 이나가 그곳에 있을까. 탄은 아침의 그 우연한 만남엔 아무런 준비도 못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