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는 쉬는 시간 틈틈이 탄의 짐이 놓인 곳을 맴돌았다. 그러다 바로 옆줄에 놓인 짐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탄을 본 뒤 몇 분 후에 옮겼던 짐이었는데, 무게가 상당했다.
검정색 캡을 푹 눌러 쓴 그 참가자는 이나에게 비닐 가방을 받은 뒤 천막 모퉁이 쪽 구석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그러곤 자기가 가져온 커다란 천 가방을 그대로 비닐 가방 안에 이식하듯 넣고 입구를 꽁꽁 묶어 이나에게 다시 건넸다. 누가 자기 짐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유난스럽기는…… 그나저나 대체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싸 들고 온 거야. 이나는 짐을 들쳐 멘 채 옆줄에 있는 탄의 가방을 바라봤다. 그의 짐은 이 짐에 비하면 새의 깃털 수준이었지. 이나는 아침에 탄이 그녀 앞에서 한 줌의 짐을 비닐 가방에 급히 쑤셔 넣던 모습을 떠올리며 코웃음 쳤다. 어디 죽은 쥐나 새 같은 거라도 잡아다 가방 안에 확, 몰래 넣어둘까 보다.
‘이나야, 사람 그렇게 골탕 먹이고 하는 거 아니다.’
어디선가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이나는 멈칫했다. 언니와 싸웠던 날 아빠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이나는 그날 언니가 아끼는 자전거 뒷바퀴에 송곳을 가져다 찔러버렸고, 급히 자전거를 타고 나가려던 언니는 크게 넘어질 뻔했다. 아빠는 언제나 그랬듯 이나를 다그치는 대신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나야, 언니가 다칠 뻔했잖아. 사람 그렇게 골탕 먹이고 하면 벌 받아요.”
아빠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거나 욕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빠가 죽고 나서 이나는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착하니까 만날 당하기만 하는 거라고,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은 마냥 착하기만 하면 안 된다고, 상대를 너무 이해해줘도 안 된다고…….
그건 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돌이켜 보니 이탄과는 악연 치고 꽤 자주 마주치는 듯했다. 그래도 지금이 5월이니까, 지난해 11월 병원에서 본 이후 거의 반년만이구나. 아빠가 없는 시간도 이렇게 살아진다는 것이 이나는 신기하고도 서글펐다.
“이제 여기 이렇게 몰래 와서 어슬렁대지 말라고요, 재수 없게.”
이나가 탄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는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자신이 서른이 넘은 성인 남자에게 그토록 용감하게 쏘아댈 수 있었던 것에 새삼 놀랐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탄에게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아빠의 호흡은 비록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그렇게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었으니까.
그때도 탄은 마치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처럼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꾹 참고 있는 듯, 얼굴의 모든 근육이 긴장돼 있었다. 솔직히 이나는 탄이 억울하다며 화라도 내줬으면 싶었다. 그러면 그를 덜 의심했을지도, 아니 그가 덜 밉거나 만만해 보였을지도 몰랐다.
이나는 그날 엄마의 손에 붙들려 끌려가는 와중에도 도끼눈을 뜨고 탄을 노려보았다. 엄마는 그런 이나를 다그치며 말했다. “네 아빠가 평소에도 자주 넘어지고 허둥거리긴 했잖아. 저 사람 잘못을 증명하긴 힘들다고 몇 번을 말해.” 코너를 돌며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이나는 엄마에게 대뜸 소리쳤다. “저렇게 자주 찾아오면서 미안해하는 거 보면 자기도 켕기는 게 있다는 뜻 아니겠어?”
이나는 지금도 같은 생각이었다. 문득 궁금했다. 탄이 완주 후 짐을 찾으러 올 땐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여전히 주눅 든 모습이려나. 그녀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크림빵을 먹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 도끼눈을 뜨며 물었다.
“야, 내가 이렇게 쳐다볼 때면 좀 무섭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막 뒤로 귀가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나는 치켜뜬 눈을 한 번 더 크게 떴다가 이내 초점을 잃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