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

by 연지


탄의 짐 속에 든 물건이라고 해봤자 대회장에 갈 때 걸쳤던 바람막이 잠바, 텀블러, 번역을 하고 있던 원서 페이퍼 북 하나가 전부였다. 생각보다 짐은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의자의 범위가 점점 좁혀지더니 하루 만에 검거된 덕분이었다.

다만 탄은 그날 저녁 범인에 대한 뉴스를 보다 그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어이가 없어 털썩 주저앉았다.

―관심을 끌고 싶었어요.

그보다 한 살밖에 어리지 않았던 범인은 어린이들을 위한 과학책에서 다이너마이트 제조법을 읽고 감명한 나머지 간단한 폭탄 제조법이 친절하게 소개된 유튜브를 열심히 찾아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럴듯한 물건 하나를 만들었다. 조잡하게나마 타이머까지 설치된 폭탄이었다. 부피가 꽤 컸지만 그는 폭발물을 옷가지에 숨겨 짐 가방에 잘 쑤셔 넣었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자원봉사자 학생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의 짐을 맡겨주었던 것이다.

자료화면에선 범인이 봤다는 과학책이 흐릿하게 처리되어 나왔다. 탄은 그것이 자신이 번역한 책 가운데 하나라는 걸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만화로 보는 물리학 이야기』. 그림이 많고 어린이 눈높이 수준으로 쉽게 쓰여 있어 어렵지 않게 작업했던 책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이없었던 건 그 책 때문이었다기보다 범행 동기 때문이었다. 관심을 받고 싶었다니, 대체 왜?

탄의 목표는 조용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얌전히 밥벌이 정도만 하면서 사는 것이었다. 원래도 그렇게 사교적인 편이 아니었지만, 수영장 사고 이후 그런 성향은 더욱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한 달에 한두 번은 만났던 오랜 친구와도, 부모님과도 거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더욱이 탄의 유일한 친구였던 애인과도 결별하면서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인 씨 아저씨의 상태가 궁금했던 탄은 보름에 한 번씩 병원에 찾아갔다. 몰래 먼발치에서 병실에 누워 있는 아저씨를 보고만 올 때도 있었고, 용기 내어 아저씨의 부인과 큰딸에게 인사를 할 때도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엔 이탄을 꼴도 보기 싫어했지만, 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그를 보면서 어느 날부터 인사 정도는 받아주고 지나치곤 했다. 하지만 이나만은 늘 예외였다.

“그래도 이나와는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인 씨 아주머니의 그 한 마디만 듣고도 탄은 이나가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건 탄이 병원에 몰래 드나든 지 여덟 번째 되는 토요일이었다. 병실은 텅 비어있었고, 이미 삼일장도 다 지나서 찾아갈 빈소도 없었다.

그 뒤로 탄은 한동안 집에서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맡고 있던 책도 작업을 늦추고 싶었지만 여러 번 미뤘던 책이었기에, 어찌됐든 초판이 발행돼야 인세도 받을 수 있었기에 그 일만은 붙들고 있어야 했다.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건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탄은 아저씨와 이나가 수시로 떠올라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었다.

탄은 수영장에서 일어난 일을 수백 번씩, 분과 초 단위로 복기해보곤 했다. 탄은 아저씨와 자신이 눈이 마주쳤는지 아닌지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아저씨가 넘어진 원인이 자신인지 아닌지 밝혀내야 했다. 하지만 그때 탄의 머릿속엔 발바닥에 박힌 유리 조각 생각으로 가득했고, 고개를 들자 아저씨는 쓰러져 있었다.

밤마다 악몽은 계속되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사건은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럴 때면 탄은 번역에 더욱 집중했다. 이런 문장이 나올 때면 반갑기까지 했다. ‘모든 사물과 현상에 인과관계가 적용되는 건 아니다. 우주와 물리 법칙을 관통하는 어떤 장대한 맥락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그 일은 그저 그렇게 일어난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있었고, 나는 그 일에 재수 없게 얽힌 것뿐이야. 아저씨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지만, 탄은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잡고 있던 책을 마친 뒤 두 권의 책을 더 맡았다. 그간 세 권의 책을 번역하고, 40여 편의 영화를 보고, 블로그에 70여 편의 영화와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리고, 가끔씩 올라오는 섬뜩한 댓글에 화들짝 놀라고, 화장실에서 혼자 거울을 보며 머리를 세 번 자르는 동안 반년이 흘렀다. 죽은 줄 알았던 아글라오네마 화분에서 새싹이 자라나는 걸 확인한 어느 날, 탄은 이제 조금씩 몸을 움직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시작부터 무리하고 싶진 않은데.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으로 뭐가 있지…… 참가비 3만 원을 입금하고, 그로부터 얼마 후 마라톤 티셔츠와 양말, 번호표와 안내서가 든 봉투를 우편함에서 발견했을 때, 탄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런 설렘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머릿속 뇌관이 터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침에 이나를 마주친 순간,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탄은 그간 애써 다잡아왔던 멘탈이 도로 너덜너덜해지는 걸 느꼈다.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외면했던 기억들이 무섭게 그를 덮쳐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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