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과 현상에 인과관계가 적용되는 건 아니다. 우주와 물리 법칙을 관통하는 어떤 장대한 맥락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마라톤 주최 측이 제공해준 대학병원 일인 병동에 가만히 누워 있던 이나의 머릿속에 불현듯 이 구절이 떠올랐다. 스티븐 호킹, 칼 세이건, 대니얼 데닛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저명한 미국의 물리학자가 쓴 책 속에서 본 문장이었는데, 저자 이름은 생각이 잘 안 났다. 확실히 기억하는 건 그 책의 역자가 ‘이탄’이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이탄도 마주치고, 본의 아니게 테러 현장까지 목격하고…….
“혹시 범인으로 의심이 갔던 사람이 있습니까.”
병동에 몰려온 취재진들이 인터뷰에서 이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었다. 이나는 딱 한 사람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탄을 마주친 뒤 십 분 정도 후에 도착한, 검정 캡을 푹 눌러 쓰고 무거운 짐을 맡겼던 남자. 하지만 그녀는 모르겠다고, 의심 가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고 답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인터뷰에서는 최대한 말을 아껴달라는 경찰의 조언에 따랐을 뿐이었다. 이나를 찾아왔던 경찰은 그녀에게 남자의 인상착의를 최대한 자세히 물어보고 받아 적으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에선 조심해주세요. 그 남자가 유력 용의자이기는 하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이나의 언니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세상이 미친 것 같아. 서울 한복판 마라톤 대회장에서 웬 폭탄 테러야.”
엄마도 피곤한 얼굴로 침대 맡에 앉아 거들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야 대비를 하든가 말든가 하지.”
“엄마 나 오늘 이탄 봤어, 재수 없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이나가 말했다. 이탄이란 이름을 입 밖에 꺼내자 언니와 엄마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엄마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 또 이번 테러 용의자가 탄이 씨일 수 있다니 뭐니 이런 소리 하려거든 관둬라. 너 그러는 거 네 아빠도 원치 않으실 거다.”
“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봤다고. 재수 없게.”
이나는 탄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모든 일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는 일은 물리학의 세계에선 적용될 수 없다’는 문장을 뻔뻔스럽게 해석하는 번역가였다. 이나에겐 그 말이 꼭 아빠가 넘어진 이유가 자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변명처럼 들렸다.
아빠의 수영장 사고는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다. 그즈음 아빠는 오토바이 사고 이후 한창 수영장에서 재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왼쪽 대퇴골에 박은 철심을 제거하려면 아직 1년은 더 기다려야 했던 시기였다.
이나는 오토바이 사고 당일 아빠가 퀵으로 배송하던 물건이 A4용지 한 뭉텅이의 번역 교정지였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안국역 근처의 번역가 집에서 교정지를 받아 합정동에 있는 출판사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이탄이 번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나는 그가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탄과 같은 사람만 없었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그것이 터무니없는 연상에 따른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솔직히 그 순간엔 원망부터 앞섰다.
아니, 마냥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이탄은 수영장에서 아빠와 부딪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서로 아무리 스치지 않았던들 아빠는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탄을 피하려다 당황하며 넘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이나는 탄이 발바닥에 박힌 유리 파편을 의자에 앉아 차분히 살펴봤더라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탄의 잘못을 증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그에게 소송을 걸고자 했으나 법률 상담사들은 모두 지는 게임이라며 말렸다. “보상은커녕 재판 비용만 더 드는 일입니다. 아버님께서 게걸음 치는 그 남자를 피하려다 미끄러졌다는 걸 증명하기란 쉽지 않거든요. CCTV 판독으로도 역부족입니다. 아버님이 깨어나 직접 말해줄 수 있다면 모를까요. 게다가 이탄 씨도 아버님과 어깨조차 스치지 않았다고, 휘청거리며 헛발을 짚다가 의도치 않게 아버님을 놀래켜드린 거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이니까요.”
수영장 사고 이후, 가족들의 시간은 아빠에게 맞춰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3이었던 이나의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그해 학교를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병원비는 계속 불어갔고 엄마의 얼굴은 점점 핼쑥해 갔다. 이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족들 곁을 지키며 제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잘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사이 아빠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렇게 반년을 침묵한 끝에 아빠는 이나의 가족을 영영 떠났다.
이나에게 이 사고는 어떻게든 설명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납득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증명이 어렵더라도 모든 상황에는 맥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 사고의 원인은 명백히 이탄이고, 결과는 아빠의 죽음이었다. 적어도 이나에겐 그랬다.
아빠의 장례가 끝나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애쓰던 무렵, 이나가 가장 궁금했던 건 이탄의 안부였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다면 왠지 억울할 것 같았다.
이탄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염탐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물론 그 전에도 이나는 탄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행까지는 아니었다. 그가 번역한 책들을 다 뒤져 읽거나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수시로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가끔 친구의 핸드폰으로 탄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확인하고 끊기도 했는데,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는지 탄은 어느 날 번호를 바꿔버렸다. 그래도 이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운영하는 영화 리뷰 블로그를 찾아가 악플을 달기도 했다. 가족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은 포스팅에는 이런 댓글도 달았다. ‘당신이 무너뜨린 한 가정이 떠오르진 않던가요? 사람은 의도치 않게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답니다.’
상을 치른 뒤 한동안 이나는 매일 탄의 집을 찾아갔다. 주소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병원에 찾아왔던 어느 날 그의 뒤를 밟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나의 염탐은 오래가지 못했다. 탄의 일과는 단조롭다 못해 대체 살아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나는 그가 사는 다세대주택 2층의 불빛이 켜졌다 꺼지는 것만으로 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탄은 집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에도 거의 약속을 잡지 않는 듯했다. 가끔 편의점이나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다. 어떤 날엔 택시를 타고 급히 어딜 나갔다 오기도 했지만, 목적지는 죄다 출판사 아니면 관공서였다.
결국 이나는 한 달 만에 미행을 멈췄다. 시간이 지나며 억울함이 옅어진 자리엔 어느새 물음표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사람이 이토록 누군가와 교류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