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라우킴 Jan 13. 2021

소개팅남이 만들어 준 불고기

내게 소울푸드가 생겼다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있었다. 선배와 나는 밴드 동아리에서 만났다. 공부하기도 바쁜 시절이었지만, 학업 스트레스를 풀 데가 필요했었다. 선배는 보컬리스트로, 나는 키보디스트로 곧 있을 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매진하고 있던 어느 날, 이번에 새로 알게 된 형이 있다면서 한번 만나보라고 제안했다.


선배는 내가 연애를 잘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나는 족족 뜨뜻미지근한 관계에서 발전이 없는 나를 위로해준다며 소개팅을 주선하려고 했었다. '그래. 뭐, 이번에도 잘 안 되겠지만 선배 정성을 봐서라도 한번 만나보자.'라는 마음으로 소개팅 자리에 나간다고 했다.


함박눈이 내린 후 땅이 얼어붙은 추운 겨울날이었다. 내 이름을 힘차게 부르는 선배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선배는 소개해준다는 그 형과 함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선배 옆에는 검은색 긴 코트를 걸치고 구두를 신고, 머리카락에 힘을 준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선배는 자리를 비켜준다며 황급히 장소를 떠났고, 그 남자와 나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이어나갔다.


“혹시.... 어떤 음식 좋아해요?”

“음식이요? 저는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는 편이에요.”

“한식, 양식, 중식 중 제일 좋아하는 한 가지만 고르라면요?”

“음... 글쎄요. 날씨가 추워서인지 국물 있는 음식이 당기네요.”


진지한 말투와 조심스러운 매너로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 당시 하숙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끼니를 대충 때우는 식이었다. 날씨가 추워서였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국물에 갓 지은 쌀밥이 생각나긴 했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같이 밥을 먹는 건 어색할 터였고, 얼마나 주고받을 이야기가 없으면 음식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짧고 굵은 소개팅이 끝나고 며칠 후 그에게 전화가 왔다.


“잠은 잘 잤어요? 지금 잠깐 내려와 볼래요?”

“네?? 지금 어디신데요?”

“저 지금 일 층에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포근한 이불 안에서 별생각 없이 뒹굴뒹굴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하숙집 앞에 도착해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전화를 끊고 세수하는 둥 마는 둥, 머리는 질끈 묶고 패딩점퍼를 챙겨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이번에 긴 코트 대신 운동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무엇을 하다가 급히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양손에 냄비를 한 개씩 들고 있었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아.. 제가 요리를 좋아해서 조금 만들어봤어요.”

“네?? 요리를 직접 하셨다고요?”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입맛에 맞을지 잘 모르겠네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네, 잘 지내요. 또 연락할게요."



얼떨결에 냄비 두 개를 받고 방으로 올라와 뚜껑을 열어보았다. 한 냄비에는 어묵이 한 데 어우러져 다진 파와 함께 국물에 둥둥 떠 있었으며, 다른 냄비에는 진한 간장 향을 풍기는 불고기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그동안 엄마 말고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음식을 가져다주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상을 차리고 숟가락 젓가락을 들어 몇 초간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누군가 만들어준 정성스러운 음식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내 눈앞에 있는 불고기와 어묵탕이 나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학점 관리하느라 방전되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보니 속이 든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밥그릇과 국그릇의 바닥이 보이는 순간, 그 남자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어 졌다. ‘혹시 요리사가 되고 싶은 분인가?' 왠지 이 남자와 나중에 결혼하게 된다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냄비를 돌려주었다. 불고기와 어묵탕에 마음이 동한 나는 그 남자와 좋은 만남을 이어 나갔고, 3년 반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다.




"여보, 그때 나 처음 만나고 만들어준 불고기 말이야. 양념은 어떻게 만들었어?"

"아 그 불고기? 간장, 맛술, 설탕, 소금, 후추, 다진 마늘 또 뭐가 있었더라.. 냉장고에 있는 채소들 조금 넣었지."

"그래? 몇 큰 술씩 넣어야 해?”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냥 감으로 넣었던 것 같은데?.."


흠. 레시피는 딱히 없는 듯했다. 레시피 없이 감으로 어떻게 요리한다는 건지. 요리할 때 무엇보다 정량을 중요시하는 나는 남편의 손맛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좋은 재료를 고르고, 씻고, 다듬고, 각종 양념을 넣어 버무리는 손길에는 음식을 먹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기대하는 만큼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을 대비해 불 앞에 서서 간을 보고, 원하는 맛이 나올 때까지 시선을 고정한다. 모든 감각을 동원한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일까. 패스트푸드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사람의 진심이 녹아있다.


추운 겨울날 그 남자가 냄비에 담아 온 음식에는 진심이 녹아 있었다. 내 영혼까지 따뜻하게 데워준 그 남자의 마음이 참 좋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어머니의 부추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