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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우킴 Jan 23. 2021

우리가 뉴질랜드 도서관에 간 이유

뉴질랜드 공립학교는 교과서가 없는 대신 독서를 매우 중요시한다. 담임 선생님은 매일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도서관에 가서 각자 좋아하는 책을 고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약 수업 시간에 다 못 읽었다면 집으로 가져가 마저 다 읽을 수 있도록 여유를 준다. 다른 건 몰라도 매일 책을 읽고 짧은 후기를 기록한 독서노트를 학교 가방에 꼭 넣어 다녀야 한다.



아이는 읽고 싶어 하는 책을 빌려 집에 가지고 왔다. 영어가 아직 서툴러 책을 보아도 어떤 내용인지 몰랐을 터. 책 표지와 그림만 보고 책을 빌려왔다. 아이는 책 속에 요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케치북과 펜을 가지고 매일 그림을 따라 그렸다. 요정을 따라 그리다가, 책 속에서 요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요정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나와서 이름부터 정확히 알아야 했나 보다. 쉬운 단어부터 골라 드문드문 읽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문장을 읽고 단락을 읽고 반복해서 읽다가 책 한 권을 완독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시리즈를 읽고 싶다며 학교 도서관에서 또 빌려 왔다.


책 한 권에 대한 호기심이 책 시리즈 전체로 이어져 나갔고 아이는 밥을 먹을 때나 잠자기 전에도 읽고 또 읽었다. 책이 주는 즐거움에 푹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아이의 영어실력은 선생님과 현지 친구들과 겨우 소통할 정도로 매우 서툴렀다. 하지만 아이는 좋아하는 책 한 권을 만나 영어를 읽고 쓰는데 점차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책을 읽고 느낀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자신만의 종이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나는 아이들이 크면서 무엇보다 책을 가까이하기를 바랐다. 갓난아기 때는 초점 , 백일 전후로 헝겊 , 첫돌 이후부터는 그림책을 손에 잡고 장난감처럼 놀았으면 했다. 성장발달에 맞춘 전집을 들이는   나이 때에만 가능한 좋은 자극을 주기 위하여 부단히 애썼던  같다. 그러나 아이 좋아하는 책을 스스로 선택했을  가장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영어를  빨리 배우게 하려고 좋아하지도 않은 책을 억지로 들이밀 때와 몰입도가 달랐다. 그때 깨달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찾을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레인보우매직 시리즈를 읽으며 아이가 그린 그림들


어느 날 아이가 좋아하는 책 시리즈가 더 이상 학교 도서관에 없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독서에 탄력을 받은 아이를 위해 매번 서점에서 새책을 사주는 건 무리였다. 뉴질랜드 도서관 시스템을 한번 이용해 보기로 했다. 우리가 살았던 오클랜드 시 안에는 55개의 도서관이 있는데, 동네에 도서관이 거의 한 개씩 있다고 보면 된다. 언제든지 책을 편하게 빌릴 수 있고, 대출 기한 내에 다른 도서관에서도 반납이 가능한 시스템이 매우 편리했다. 한 번에 30권 이상을 빌릴 수 있으며 28일 이내에 반납을 하면 된다.


도서관에 가면 아이들을 위한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대부분의 책은 표지와 그림이 잘 보일 수 있도록 전면으로 진열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책을 쉽게 고를 수 있다. 어린이 코너에는 편안하게 앉거나 누워서 책을 볼 수 있게끔 소파나 쿠션이 많았다. 바닥에 엎드리거나 누워서 뒹굴뒹굴하며 책을 보아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연령대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책과 연결되어 몰입하는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도서관에 오는 모든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엄마를 따라서 온 아이들이 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하여 도서관 직원들은 레고나 인형 같은 장난감을 테이블에 따로 마련해 놓는다.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노는 동시에 책과 가까워지라고 노력하는 그들의 센스를 엿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책을 볼 때 나는 베이킹과 인테리어 책을 살펴보았다. 뉴질랜드인의 음식문화와 생활 방식은 잡지와 책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고, 감각적인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가끔 요일별로 도서관 사서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종종 이용하기도 했다. 사서뿐만 아니라 그림책 작가가 직접 도서관에 와서 구연동화를 해주는 날도 있었다. 여름방학이 한창일 때 우리는 도서관 건물 앞 잔디밭에 앉아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작가는 자신이 쓴 책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맞게 목소리를 바꾸고 리얼한 액션을 더하니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햇살 때문이었는지 구연동화가 끝난 후 작가의 옷은 비를 맞은 것처럼 흠뻑 젖어있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매일 뉴질랜드 도서관을 드나들며, 아이들이 책을 좋아할 수 있도록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요즘은 책 보다 더 재밌고 다양한 볼거리가 많이 생겨서 아이가 언제 돌아설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가 맨 처음 좋아하는 책을 만나 하얀 스케치북에 상상의 세계를 펼친 것처럼,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든 스스럼없이 책을 펼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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