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0분이었다.
오늘의 할 일은 얼추 마무리되었고, 부디 팀장님이 추가로 업무지시를 내리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내 왼쪽 편에 앉은 팀장님을 힐끔 한번 쳐다 보고 몸을 살짝 돌려 핸드폰으로 남편한테 문자를 보냈다.
“여보, 오늘 몇 시쯤 퇴근해?"
"지금 이대로만 간다면 6시 반 정도 가능."
"그래? 나도 별일 없으면 그때 퇴근할 것 같은데 우리 신림역에서 만나자. 순대볶음 먹고 싶어."
"오케이. 그럼 7시 반에 신림역 3번 출구에서 만나."
우리 부부가 신혼일 때 남편은 양재에서 나는 여의도에서 출퇴근했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금요일 저녁은 남편과 만나 밖에서 한 끼를 해결하고 집으로 갔다. 다음 날은 기다리던 주말이니까 아무 걱정 없이 저녁을 편히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순대를 좋아했다. 떡볶이를 먹을 때는 떡볶이 국물에 순대를 찍어 먹고, 순대가 들어간 얼큰한 순댓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도 좋아한다. 대학시절에 순대타운이라는 곳에 처음 들어갔을 때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다. 백순대 볶음을 한번 맛본 순간부터 뇌리에 착 달라부터 쉽게 잊히지가 않았다.
그날은 며칠 전부터 순대볶음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떤 메뉴가 떠오르면 그 음식을 먹을 때까지 주야장천 매달리는 타입이라 그날은 꼭 신림동에 가야만 했다.
신림역 3번 출구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금요일 저녁이라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인파 속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어디쯤이냐고 문자를 보내려는 순간 나를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가 너무 고파서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는 자칫 날카로워질 뻔했는데 남편은 고맙게도 타이밍을 잘 맞추어 도착해주었다.
우리는 빠른 발걸음으로 순대타운으로 향했다. 그리고 신림동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는 민속 순대타운과 양지 타운 중 민속 순대타운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늘 가던 곳만 가는 사람들이었다.
건물 3층으로 올라가자 삼촌과 이모들이 서로 자기네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마다 똑같은 순대볶음 집이 이렇게나 많은데 맛이 다르면 얼마나 다른 걸까 의문이 생겼지만, 집집마다 추구하는 양념의 배합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념이 다르니 맛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남편과 나는 여러 군데를 한 번씩 맛보다 ooo 호에 정착했고, 한 달에 꼭 한 번은 그곳에서 순대볶음을 먹으며 지친 심신을 달래곤 했다.
우리는 빨간 양념이 들어간 순대볶음과 양념에 찍어 먹는 백순대 사이에서 고민도 하지 않고 백순대를 주문했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두 가지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채소와 함께 볶아진 순대의 담백하면서 고소한 맛을 즐기다 맛에 변화를 주고 싶다면, 함께 나온 마법의 양념을 곁들여 깻잎에 싸서 먹으면 그만이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오 오르는 사각 철판 위에 채소와 당면과 함께 어우러진 순대를 보고 있노라면, 스트레스로 찌뿌둥해져 있던 몸과 마음이 노곤해졌다. 왼손에 깻잎 한 장을 올리고 순대와 채소를 살포시 올린 후 양념소스를 얹어 입속에 넣었다.
요즘은 순대가 팩으로 나와 집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냉장고에 있는 채소와 양념으로 신림동 비주얼을 기대하며 야심 차게 만들어 보기로 한다. 오늘 저녁,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순대볶음 한 접시 어떨까?
순대 한팩 400g, 양파 1/2개, 당근 1/2개, 양배추 2줌, 통마늘 5개, 깻잎 10장, 대파 1줌, 불린 당면과 쫄면 40g(선택), 식용유, 소금, 물 조금
초고추장 4스푼, 들깻가루 1큰술, 다진 마늘 1큰술, 된장 1/2큰술, 물 조금
① 양념장 소스를 먼저 만들기로 한다. 초고추장, 된장, 다진 마늘, 들깻가루를 섞고 물을 넣어 농도를 맞춘다.
② 순대는 너무 얇지 않게 자르고, 채소는 먹기 좋게 썬다.
③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마늘 - 파 - 순대 - 깻잎을 뺀 나머지 채소를 순서대로 넣고 볶는다. 소금과 후추를 조금 뿌려 더 볶는다.
④ 찬물에 30분 이상 불린 당면과 깻잎을 넣고 당면이 익을 때까지 볶아 준다. 기름을 조금 더 여유롭게 넣어가며 재료들이 프라이팬에 눌어붙지 않게 한다. 마지막 깨소금을 뿌려 장식한다.
⑤ 양념장에 콕 찍어 깻잎에 싸서 맛있게 먹는다.
식탁 위에 순대볶음을 올려놓고 신림동에 갔던 날을 떠올리며 느긋하게 즐겨본다. 그런데 집 안이 너무 조용하다. 북적북적한 순대타운 안에서 맡았던 기름 냄새와 사람 냄새가 그린운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