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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엉 Jul 21. 2016

셔츠를 맞추며

 장마가 지나가니 곧 가을이 올 듯한 느낌이 들어 셔츠를 맞추기로 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몹시 짜릿한 일이다. 어떤 옷을 입냐에 따라 홍콩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손을 덜덜 떨 것 같은 부랑자가 되기도 한다. 예약 시간에 맞추어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중국풍 드레스를 입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어디서 왔나?'하는 표정으로 힐끔거린다.


 여자가 셔츠를 입는데는 꽤 많은 제약이 따른다. 패션모델을 제외하고, 평범한 여자가 셔츠를 맞추러 가면 남자 와 함께 온 여자들은 가만히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다. 그들은 근엄한 재단사가(외모가 실력과 상관있다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재단사는 왜 잘생겼을까)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체측(치수를 측정하는 행위)하는 모습을 진귀한 구경이라도 하는 것인 양 바라본다.

나는 그런 시선이 좋다. 마치 발목은 내놓은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정된 원단을 고르면서, 조금 슬퍼졌다. 백 퍼센트 남자를 위한 것들이다. 남성적인 우월함을 뽐내기 위한, 혹은 남성적인 절제미를 강조한 그런 것들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맞춤 양복점이 너무 많아진 탓에 단골집을 만들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다. 언제 찾을지 모르는 손님을 위해 팔리지 않는 원단을 갖다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한 번쯤은, 누군가 틀을 깨었으면 좋겠다. '여자는 치마다'는 얼마나  폭력적인가(남자에게도 폭력적이다. 패왕별희를 보면 이해할 것이다). '남자는 셔츠다'라는 말보다 '너는 셔츠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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