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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D Oct 24. 2021

직업의 귀천이 만드는 하루살이 국가

잘 사는 것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사회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원래부터 받아야 할 대우란 없다


대대로 학문의 가치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는 가정에서 자라왔고, 내게 요구되는 학식의 깊이는 딱 부모님의 사회적 높이만큼 높았다. 뒷자리를 맴돌았던 나의 학업점수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이 내게 대하는 색다른 태도는 가정 통지서에 쓰는 부모님의 직업란이 내게 주는 영향을 의미했다. 드디어 마음에 들만한 대기업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역시 나는 학창 시절의 치트키를 소환할 수 있었다. 심화면접으로 가게 되자 어김없이 부모님에 대해 몇 질문을 받곤 했고, 나는 단박에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나의 보이지 않는 파워,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또는 첫인상을 형성하기도 전에 획득할 수 있는 귀한 레어 아이템이란 것을.

물론 알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직업 안에도 일 잘하는 사람부터 일 못하는 사람까지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단지 내게 입력되어 있는 디폴트 값은 기본 이상이었을 뿐이었다. '제 부모 닮았으면 서울대는 가겠지', '제 부모 닮았으면 머리는 비상하겠지'. 우리 남매들은 딱 평균인 나를 필두로 뱁새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는 채 황새를 쫓았다. 멋모르는 어린아이일 때는 뿌듯하고 존경스럽고 어깨가 하늘에 붙어있는 오만한 인생을 이따금 즐길 수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생각보다 오만한 두뇌를 타고나지 못했다. 또한 나라는 인간은 예상보다 그렇게 뻔뻔함을 일관성 있게 유지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못되었다. 어느 순간, 사회생활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굳이 부모님을 오픈하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나였고, 그들은 그들이었다. 그늘이 커지면 서늘함을 넘어 스산해지는 법이다. 

대통령, 재벌, 탑스타의 자식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눈빛 하나로 나를 해고시킬 수 있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많은 기성세대들은 출신 성분을 따지고 갈랐다. 그래서 다수의 대단한 자재분들이 자신이 휘둘러도 될 무기로 타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모습이 상당히 천해 보였다. 그래 봤자 원숭이가 아닌 인간일 뿐이면서 많은 인간들이 옷가지에 달아야 할 자랑스러운 사랑의 열매 배지처럼 달고 다닌다. 사람들은 황금 동아줄이길 바라면서 순수하지 않은 용도로 배지를 착용한 자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하고, 심지어 결혼의 대상자로도 염원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자신이 획득하지 않은 재화, 노력해서 얻지 않은 유명세, 남이 떠 먹여준 자랑거리와 겉도는 가십과 인맥들의 힘의 냄새라도 맡고 싶은 건 비단 선대의 이름을 이용하고 싶은 자들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기껏 남보다 괜찮아 보이는 배경을 자랑하는 고까운 모양새를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빳빳하게 펼쳐 보이고 다녔다.


"그건 부모님의 업적이고 직업이지, 제 것이 아닙니다"

배움의 깊이가 중요한 가정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건 부라는 것이 물질적인 소유물이나 특정 타이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대학교수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우리 집 사람들은 기함을 할 사건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교수만큼이나 이 세상에 필요하고 귀하게 대접받는 웨이트리스가 되었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을 통틀어 진정으로 가장 부유하다. 배우자와 사랑이 넘쳐 가정이 평안하며, 지병 없이 신체와 정신이 건강하고, 자유를 만끽할 줄 아는 자세로 희로애락을 온전히 느낀다. 인생의 품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으로 콧대 높은 부모님도 돈 많은 부모님도 만들어 줄 수 없다. 내게 공부를 하라고 한 적은 없지만, 만약 배움의 중요성을 내가 아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품위를 넘어 이타적인 배려를 가르치고자 했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민을 결심하게 됐어요?"

"그러게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에요. 그럴 팔자인가 보죠 뭐 하하"


"한국에서 잘 살았는데, 왜 이민을 왔어요?"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무시하고, 또 사람들이 무시당하는 그 당연한 문화가 역겨워서요"


한국이 살기 좋은 이유. 한국이 살기 좋았던 이유 중 무수한 것들은 사람을 갈아 넣어서 나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듣기 편한 말로 풀어보자면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것을 유신론자가 지옥에 떨어져서조차 여실히 찬양하는 것이다. 소비자로서 4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5시간씩 죽치고 앉아 노트북에 전기를 충전 해대며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던 나의 카페 이용은 곧 나의 권리이자 이 사회의 문화라고 생각했다. 카페 주인의 임대료, 회전율, 전기세, 난방비, 인건비, 청소비가 나의 리필 가능한 아메리카노 한 잔에 담겨있는데, 그 정도 권리는 당연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소비자로서 마땅히 기본으로 누려야 하는 서비스, 당일배송 시스템. 개도 밥 먹을 시간은 건드리지 않는 게 예의라던데, 분초를 다퉈 밥 먹을 시간조차 없는 배송기사들의 위염과 시간을 갈취해서 나는 지금 당장 없어도 죽지 않을 것들을 제깍 받아낼 수 있었다. 나는 개에게도 지키는 예의를 사람에게서 뺏었다. 소비자인 나의 주말은 그들에게도 주말이고픈 사실을 망각한 채, 주말에 배송을 또는 수리를 해주는 것을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치킨 배달이, 짜장면 배달이 조금 늦는다 싶으면 대체 장사할 생각이 있는 건지, 전화해봤자 지금 출발했다고 하겠지, 채근하기 바빴다. 한시가 급한데 서비스센터에서 오래도록 전화를 안 받으면 화딱지가 올라와 고객센터는 왜 존재하나라는 혼잣말이 서슴지 않고 튀어 올라왔다. 고객 서비스가 세계 최고라는 말을 똑바로 말하면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해 세계에서 최고로 사람을 극한까지 긁어내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깨끗한 공중화장실이 무료인 우리나라. 그것을 무료로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헐값에 이모, 삼촌, 이웃사촌을 갈아 넣고 있다. 배달음식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싼 값에 심지어는 무료로 배달하는 우리나라. 그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 친구, 선후배, 아들 딸들을 도로의 관짝속으로 갈아 넣는다. 소시지마냥 갈려버린 사람들은 영혼마저 갈가리 찢겨져, 때로 자신이 떳떳하게 누려야 할 권리, 정의와 도가 지나친 갑질조차 구분하지 못한다. 한국의 갑질 사회에 직업의 귀천은 사라지면 안 될 서울의 남산타워 같은 랜드마크 같은 존재다. 개중에 나도 그런 개였다.



-경주마에서 염소 되기


섬나라 한국과 비행기로 8시간인 섬나라 호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사뭇 다른 곳. 언어나 기후뿐만이 아니라 사회 분위기 또한 상당히 다른 색채를 띠고 있다.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곳. 굳이 이분법으로 대접과 푸대접을 나누자면 일을 하느냐 일을 하지 않고 나라 지원금만 받아먹는 사람이냐는 것. 국가 최고 권력자인 총리는 결코 VIP로 여겨지지 않으며, 행차하신다고 한들 특별히 받는 대접은 없다. 총리가 인터뷰하던 도중 남의 집 잔디를 밟았다가 집주인에게 잔소리를 듣는 곳이 호주다. 총리 또한 일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총리라는 직업을 수행하는 동등한 인간일 뿐이다. 변호사도 용접공도 청소업체 직원도 군인도 한 군데에 어울려서 수다를 즐기는 곳이 호주라는 나라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시멘트를 온몸에 치덕치덕 바른 옷을 입고 밥을 먹으러 우리 식당에 오고, 커피를 마시러 옆 카페에 들린다. 아무도 누군가의 행색에 대해, 옷차림에 대해, 직업에 대해, 지위에 대해 평가도 참견도 관심도 위계질서도 생성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뭘 입고 무슨 머리를 하고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든 어느 동네에 살든, 착실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다.


정이라는 이름으로, 잘 보이려는 마음으로, 착한 마음으로 조금 더 일해주려는 그 마음만은 프로답지 못하다. 한국에서는 직업적으로는 프로를 원하고 개인적으로는 융통성을 가장해 복종과 정을 겸비한 아마추어를 원한다. 호주의 시간 외 근무 할증은 칼 같다. 이것은 직업을 상호 존중하는 제대로 된 태도이다.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서로를 상호 존중하려는 올바른 문화를 애써 무시하고 싶어 한다. 사장의 돈이 중한 것처럼 직원의 돈도 중하고, 사장의 시간이 귀하면 직원의 시간도 귀하다. 주말이나 휴무일에 응급 상황이 아닌 이상, 업무연락을 하는 것은 비매너다. 회식을 당일 통보하는 것 또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당연히 9to5가 아닌 시간에 어딘가에 문의전화나 예약전화를 하는 것은 매너가 아닐 확률이 높지만, 어차피 받지도 않는다. 12월 말에서 1월은 대개 택배도 정상 시스템을 기대하기 어렵고, 회사 업무도 미루어지며, 정부의 공적인 일처리는 거의 멈춰 서고, 사람들은 통상 그러려니 한다. 공휴일에 일하는 직원들은 1.5배를 줘야 하기 때문에, 국가공휴일은 모든 레스토랑에서 최소 10% 이상 추가금을 받는다. 이러한 시스템은 공휴일에 혹은 야간에 일을 하면 남들의 부러움을 받게 만든다. 돈을 벌면서 이토록 긴장감 없이 살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


나는 회식자리에서조차 마음 편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자유, 내가 원하는 메뉴 하나 시킬 자유조차 없는 자발적 노예 대접을 받으며 그렇게 직장 생활을 했었다. 끊어진 테이프를 다시 이어 붙이고, 또다시 이어 붙이는 것으로 생명을 연장했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내게 돈을 주는 사장, 일명 지배층에게 길들여진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너무나 비정상처럼 느껴져 그 몇 푼도 벌기가 무척 힘에 부쳤다. 그게 비정상이라는 인식을 하는 것은 머리와 몸통이 따로 움직이는 기괴한 레고 인형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에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값이 왕관을 쓰고 사람들을 군림한다. 질 좋은 수면을 줄이고, 새로운 트렌드와 여러 개의 자격증과 스킬을 쉴 새 없이 연마하고, 나의 인간관계까지 최적화 모드로 맞춰놓고, 가정 또한 승진과 더 높은 연봉, 걱정 없는 노후, 질 좋을 미래의 생계를 위해 세팅된다. 

노동에 대한 인식은 우핸들 좌측통행만큼 생소하다. 호주 사람들도 노동을 위해서 희생한다. 단지 일은 나라는 객체가 행하는 수만 가지 행위들 중 하나일 뿐이라서, 일에 투자하는 시간만큼 많은 시간과 정성과 에너지를 사적인 생활에 투자하는 것을 독려한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관습적인 생활방식이라서 이미 생성된 사고 회로를 바꾸는 게, 마치 나를 부정하는 기분이자 나를 버려야만 하는 기분이었다. 항상성을 내려놓는 것은 어렵다. 내일이 출전인 경주마처럼 살던 사람에게 마치 하루 종일 풀밭의 풀이나 뜯는 염소가 되라는 기분이었다. 하루라도 발굽을 갈지 않으면 죽는다는 믿음을 고수하던 경주마에게 그리도 한심해 보이던 배뒤집어까고 자는 염소는 절대 추종하고 싶지 않은 동물상이기도 했다. 5년 만에 겨우 딱 한 계단을 올라갔을 때, 나는 그리고 우리는 한국에서는 32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평화로움과 여유로움, 그뜩한 나의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배뒤집어까고 침 흘리며 자는 동안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에 저 염소가 대처를 못할 것이라던가 누가 저 염소를 공격할 것이라는 몇 년 전의 사고 회로는 완벽하게 방향을 바꾼 뒤였다.


아줌마들 "아니 사람이 몇 명인데, 꼴랑 이거 두 개 나오는 거예요? 서비스 좀 더 주지"

단미 "만두 추가를 하셔야 더 나옵니다"

(아니 저희 집에 만두 맡겨두신 줄 알았습니다만, 서비스는 서비스센터로 가세요)


비자 때문에 시작한 일일지라도, 스스로는 평생 들어가 보지 않았을 원치 않는 상황과의 대립은 비겁함과 소심함을 바닥에 깔고 앉아있는 나로서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나 마찬가지였다. 손님들은 내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 나는 손님들에게 영어와 호주 문화를 배운다. 우리에게 선행된 전제는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환경을 향유한 사람들이었지만, 그건 서로를 나누고 편 가르기를 할 용도라기보다 배려를 익히는 색다른 경험에 불과했다. 우리들의 공통점이라면 이 세상에 배울 것은 많고 인생은 언제 종료될지 모르며 즐기지 않기에는 나이가 아깝다는 것이었다. 나는 손님들이 다녀온 전시회와 와이너리에 대해 묻고, 쉬는 날 까미와 거길 방문한다. 고기를 굽는 내내 땀을 뻘뻘 흘리는 손님들을 보며, 익지 않은 고기를 자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당연한 지식을 뽐내준다. 내가 잘못 가져다준 술을 그냥 다 마시고 너 때문에 취했다는 장난을 치고, 내가 테이블에 실수로 떨어트린 고기에 배고픈 자신을 구제해줘서 고맙다며 농을 친다.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서로의 나이에 대한 궁금증과 끝을 모르는 채근, 답정너인 대화, 출신, 학교, 사는 곳, 지난 커리어 정도이다. 위아래 없이 자유롭게 각자의 왁자지껄하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데에 그런 요소가 필요할 이유가 없다. 웃음과 배려를 나누며, 숨 가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지구 어디나 비슷한 삶일 텐데, 왜 한국에서는 필수적인 정보이고 여기서는 아닌지 모르겠다. 살아 숨 쉬는 강연장이 있다면, 나는 그것 또한 식당이라고 생각한다. 의사와 환자가, 사장과 직원이, 선생님과 학생이, 요리사와 손님이, 부모님과 자식이 나누는 모든 순간들 또한 종속관계가 없는 하나의 인류로서 나누는 순간의 모임이다. 그 안에서 누가 위계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지, 갑인지, 권력자인지, 지배계층인지 그리고 누가 실권자인지를 구분해서 숟가락을 올리려고 대우하기 시작한다면 그곳이 바로 후진국, 사람들의 마음이 여유롭고 평안하게 살기에는 영 팍팍한 곳으로 오랫동안 남아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이었으면 나는 홀서빙을 단 한 달도 못하고 때려치웠을 거라는 쪽에 한 달 생활비를 건다. 삐딱하고 거만하게 앉아서 손가락 하나로 나를 부르는 중년 남성에게 나는 나가 달라고 요청했다. 배가 고프지 않아 셋이서 음식 하나를 시키겠다는 손님을 받지 않는다. 외부음식을 가져와 먹는 사람들에게 나가거나 먹지 말거나를 선택하도록 한다. 억지를 쓰며 매니저를 불러오라는 손님에게는 불행하게도 내가 매니저임을 알린다. 술을 거나하게 먹고 꽐라가 된 여자들에게 술 판매를 거부한다. 호주는 법적으로 레스토랑에서 판단했을 때, 손님이 취했다고 판단하면 알코올 판매를 중단할 수 있다. 간혹 손님에게 모욕을 당할 때면, 주변에서 보던 다른 손님들은 미친놈이라면서 나를 위로해주고 심지어 팁도 주고 간다. 내가 어떠한 직업을 함부로 열등한 것으로 혹은 함부로 내게 기꺼이 어울리는 것으로 판단하기에는 하나의 직종 안에 내가 어떤 기량을 가진 지 아직은 모른다. 그러함에도 그 어떤 직업에서도 타인의 귀감이 되는 사람은 있다. 호주 사회는 기꺼이 내가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


한국 손님 "아 저 자식 좀 잘라, 저런 걸 직원이라고 두고 있어"

여기서 '저런 걸'은 대체로 나였다.

사장 "내가 자르면 손님을 잘랐지, 직원을 자르겠냐. 어디 대고 정신 나간 소릴 하고 있어"


일수 사견 一水四見

같은 물이라도 그것을 보는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보는 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느냐에 따라 물은 전혀 다른 게 될 수 있다.



-각각의 수준


아이엘츠 시험을 치러갔다. 신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학벌과 높은 배움이 요구되는 직업보다 많은 급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writing 시험의 파트 2의 문제로 출제된 주제였다. 오래전, 이민 사회에 문제가 되었던 스타강사의 용접공 발언이 생각났다. 공부 안 하면 호주 가서 용접공으로 일해야 한다던 비하 발언. 안타깝지만, 그 강사의 연봉 3배를 받는 용접공들은 그 일에서 잘려서 한국 가서 강사를 해야 할까 봐 걱정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인간에게는 각각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 그 수준 속에서 급여와 칭찬이라는 우회적인 형태로 자기 인정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선. 진. 국들은 최소한의 울타리가 설정되어 있다. 캐주얼 노동자(비정규직) 혹은 힘들고 고된 일, 남들이 꺼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평균 급여보다 더 상향된 급여를 지급하도록 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어야 한다는 이론에 다수가 타성적인 동의를 하겠지만,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가치 평준화를 맞추기 위한 개념 있는 집단의 노력이라고 여기는 걸로 퉁친다. 직업뿐이 아닌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의 가치는 동등하다. 스타강사와 용접공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인간 김철수 인간 박영희로 부를 때 우리는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본다. 선진국들은 법과 제도로 사람에 대한 그리고 각각의 수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공론화한다. 그래서 뉴스에 나오는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는 소리는 다 개소리다. 그들이 받는 대우와 사회적 시선이 직업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사회 전체가 학벌주의에 눌어붙은 똥찌꺼기마냥 찌들어있는 우리나라. 직업 귀천의식은 자연스럽다. 사회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그 색깔과 향이 결정지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지위와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한다. 그래서 오히려 평등한 것도 일부러 불평등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사람의 직업과 지위를 그 사람의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직업을 오픈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빠른 시간 내에 위계질서의 구도를 확실시하고 싶어 한다. 계급, 직책, 서열, 나이, 성별, 인종, 국적, 출신지역, 학력, 외모, 정당, 가치관, 신념, 사상, 종교에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을 범주화하고 귀천을 나눈다. 똥 찌꺼기 청소부의 부재에서 탄생한 인간성과 휴머니즘의 결핍. 갑질, 꼰대, 흙수저, 비정규직 같은 사회적 갈등은 경제적인 빈곤과 결핍에서 오지 않는다는 걸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천한 일이란 없다. 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행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인간성에 풍요와 결핍이 있다. 궁핍한 인간성으로 자신의 상스러움을 만천하에 손쉽게 커밍아웃하는 것으로는 단연 '갑질'을 넘어설 것도 없다. 갑질 외에 신경 쓸 것이 없는 사람의 문제는 경박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 있어야 그곳에 신경을 기울일 텐데, 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대신 갑질은 재산이나 권력의 유무 또는 뇌의 유무에 관계없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란 점에 있어서만은 공평하다. 그들은 너무 쉽게 남의 직업뿐만이 아니라 남의 가정, 남의 외모, 남의 성격, 남의 생활, 남의 금전문제에 대해 훈수를 둔다. 상대에게 사랑과 자애로움을 베푸는 것도 본인의 힘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상대를 괴롭히고 멸시하는 것도 자신의 힘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가. 갑질이라는 비인간적 행위를 벌하지 않는 시스템이 우리의 잘못된 표현마저 방임한다. 그러한 행위를 목격하고도 입을 다무는 수많은 방관자들이 사회가 살기 더 힘든 곳이 되도록 만든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승자독식을 허용해놓고, 뒤늦게야 죽겠다며 아우성을 친다.


내가 명망 있는 누군가의 자재여도 웹 디자이너여도 레몬을 따는 사람이어도 음식을 나르는 홀 서버여도 나라는 인간의 가치는 친구의 눈물 한 바가지 값인데, 내가 내미는 명함에 따라 나는 친구를 구제할 인간이기도 친구에게 빌붙을 인간이기도 한 가치판단이 널을 뛰는 수산시장 참돔만도 못하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 고등학교 때, 반마다 꼭 하나씩은 붙어있던 급훈. 지금은 이렇게 바뀌었다고 한다. 치킨 시켜먹을래, 치킨 튀길래? 천박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수록, 저런 헛소리들이 급훈이라고 나붙어있게 되고 아무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게 된다. 허튼소리를 빛 삼아 무언가를 이룩해본 무지몽매한 부모들은 공부에도 귀천이 있음을 가르친다. 가장 어리석고 위험한 방법 중 하나인 책상 앞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열심히 가르친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직업들은 겨우 안정적인 곳, 급여가 높은 곳, 사회의 평가가 만족스러운 곳에 불과하다. 세상이 배스킨라빈스인데 그들은 몇 가지 맛밖에 없는 세상에서 산다. 우리는 해야 하는 공부와 쓰잘데기없는 공부를 나눈 뒤, 공부도 마치 부동산과 주식처럼 내게 눈에 보이는 이익을 주는 곳에 투자를 하는 것이라고 제 부모처럼 믿는다.

타인과의 비교, 재산, 직업, 외모, 사회적 위치로 사람을 판단하는 속물일수록 사람을 사람 자체로 보지 않는다. 10년을 공부해서 얻은 직업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직업 중 어느 것이 더 귀한 직업은 없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처럼, 직업에서의 행위도 균등하다. 일에 대한 의미는 모두에게 다르지만,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알고, 소명의식을 갖고 참된 보람을 느낄수록 나라는 사람 자체를 그대로 보게 된다. 잘 사는 것은 자신이 잘하는 일로 사회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능력을 갖고 있는 분야도 아닌데 엉겁결에 고용된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그 앞에 '바지'를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이 이끄는 나라라면 바지 국가라고 해야 하나. 국가 역할은 전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든 굴러가는 모양새. 어차피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어도 검찰이어도 일을 얼마나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는 보이는 부분 외에는 모르는 일이다. 박근혜가 일을 얼마나 잘하면 파면이 되었겠는가. 보톡스를 애정 하는 대통령의 피부를, 조선시대 공주도 울고 갈 업스타일을 욕하지만, 국민들은 외모나 말투로 그 사람을 파면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다. 

같은 미용사라는 직업 아래에도 스카우트하고 싶은 미용사부터 무늬만 미용사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사람들은 결국 어느 순간 그 직업의 뛰어난 인간을 찾아간다. 그런 소비자들이 모이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을 고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산업과 사회의 유의미한 발전을 이루는 것이 교과서적이지만, 우리나라의 대가리들은 꼭 이런 가치로 얻은 자리들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직업의 위아래보다도 우리가 진정 따져야 할 가치인데도 말이다. 어떤 약속을 했는지, 어떤 업무를 하는 사람인지, 얼마짜리 사람인지보다 더 따져봐야 할 것이 바로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 지다. 하루살이 국가에서는 박근혜도 훌륭하다.


삼사 충고 - 사람은 세 등급으로 나눈다

가장 높은 등급 : 훌륭한 업적을 세우고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

중간 등급 : 자신의 업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도 과시하지 않는 사람

가장 낮은 등급 : 업적을 알리는 데에만 급급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떨치려 애쓰는 사람


수요가 높은 직업은 필수적인 직업이라는 의미와 상통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필.요.한. 직업이란 없다. 다만 우리는 그런 것들의 개발로 인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황에서보다 인간에게만 더 편히, 오래 살 기회를 가질 뿐이다. 우리는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자본주의 역사의 사회 시스템에 세뇌되어 수요와 공급의 논리를 사람의 귀천에다가 갖다 붙인다. 편견이라는 껍데기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뇌의 부동자세는 좀체 물렁해질 줄을 모른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톡톡히 본 나로서는 아주 불편한 소리지만, 의사의 의료행위가 자연스럽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은 본디 풀처럼 태어나서 풀처럼 시들어 죽는 존재다. 허약한 신체의 유전자는 후대에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자연은 기술과 과학의 발명을 환영한 적이 없으며, 그것은 인간만의 욕심이자 인간 욕망이 만들어 낸 파괴적 성향의 새로운 섭리다. 교사 또한 수많은 고만고만한 도토리 집합체 같은 인간들 중, 자본이 있는 인간들이 조직과 당파를 초월하고 규칙을 생성해낼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 창조된 직업 중 하나일 뿐, 인간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은 아니었다. 변호사 또한 마찬가지다. 개인으로 번질뻔한 한계가 없는 개싸움을 합법적인 개싸움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지, 합리적이고 필수적인 직업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회적 필요에 따라 귀한 직업이 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국가의 단위가 커지면서 다수를 쉽게 통제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졌을 뿐이다. 군집의 단위가 소규모일 때는 반역과 반항이었던 일반적인 것들도, 국가의 단위가 커지면 의견이 되며 여러 가지 직업이 생겨나는 법이다. 그래서 없어도 되는 직업은 없고, 꼭 필요한 직업도 없다. 어떤 직업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타인을 해하지 않는 모든 노동, 모든 활동은 완전히 동등하고 평등해서 인간은 가치평가를 내릴 권리조차 없다.


더불어 사는 세상. 초등학교 때 만들었던 포스터의 표어는 상당히 함축적인 말이었다. 시대에 따라 직업은 생겨나고 사라진다. 직업들은 시기와 시대의 요구에 의해 존재하기도 존재 가치를 잃기도 한다. 사회에 여러 구성원들은 각자 맡은 임무를 직업으로 행한다. 이것은 마치 몸과 같아서 발에서 냄새가 나고 사마귀가 생기며 무좀이 생겼다고 해서 잘라낼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에는 누구나 필요하고 누구나 소중하다. 하물며 인간 하나도 그러한데, 동물 한 마리 식물 한 포기도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편하게 소명을 이뤄내는 사람은 없고, 비바람을 이겨내고 꽃을 피운다. 설령 누군가가 편하게 돈을 번다고 해도, 여러 생물체들 중 돌연변이의 출현에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우리 사회에는 한 부분이고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을 차별로 만들어서 쉬운 일, 모두가 부러워하는 일, 힘들고 위험한 일,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로 인간의 가치를 나누는 것은 대물림할 가치가 없다. 직업의 귀천이라는 말은 어쩌면 지배계층, 부르주아, 자본가, 회장, 영주, 귀족들이 만들어 낸 말일지도 모른다. 피지배층들의 반발을 막고, 그들의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직업이라는 언어에서 벗어나서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뒤에서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당신이 신경 쓸 곳은 당신의 말과 행위뿐이다. 내가 매기는 나에 대한 평가는 누군가가 제출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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