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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D Oct 24. 2021

나와의 의사소통 부재중

눈칫밥 먹는 낙인찍힌 감정들에 솔직해지기

-신체가 정신을 지배할 때


나병환자를 치료하던, 동네에서 이름난 유명한 병원. 80년대 버스터미널 대합실 같은 병원 대기실은 온통 리모델링이 되지 않은 거친 대리석과 다듬어지지 않은 시멘트로, 의원이라는 표지판만이 이곳이 병원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등받이도 없는 좀먹은 듯한 파란색 수십 개의 의자에는 환자들이 빼곡히 몸을 구부리고 앉아있었다. 장황한 설명 따위는 지나친 사치라는 듯이 바로 팔에 링거를 꼽고, 손에는 수천 알이 넘는 약을 받아 들고 왔다. 면역이상 반응, 아토피 환자. 사람들의 힐끔거림과 수군거림은 기어코 내게 와닿는다. 아픈 건 몸인데 정신에 타격감이 온다. 태열을 달고 태어나 기어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온 몸에 스테로이드제를 바르고, 일주일에 한 번씩 주사를 맞으면 딸기 사탕을 주는 병원을 다니곤 했다. 철없는 같은 반 아이들은 병균이 옮는다며 나를 처음 보는 파충류 보듯 놀려댔고, 나는 한 여름에도 스키 장갑을 끼고 침대에 손을 묶고 잠을 청해보려 애썼다. 죽을 만큼 괴로운 가려움은, 딱하게도 날 죽이지는 못했다. 공부에 한창 욕심이 많았지만, 대학교 입학은 사치처럼 보였다. 인간관계는 어렵고, 학업 수행은 더 어렵고, 낭만적인 병은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손만 뻗으면 집히는 환경호르몬 덩어리들, 새집 증후군을 촉발시킨 아파트를 지은 대기업 건설사, 본인의 일이 아니라고 입에서 필터 없이 내뱉는 수많은 사람들, 먹지도 못하는 수많은 금지된 음식들, 21세기인데도 여전히 불치병이라고 말하는 의사들, 아토피라는 단어조차도 요목조목 설명해줘야 하는 무지한 인간들, 집 한 채는 갖다 바쳤을 치료비.

필사적으로 이기지 못할 가려움과 싸웠다. 과연 내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서른이 지났다. 뭔지도 모를, 종류도 다양한 약을 수십 년을 들이켰다. 얼마나 많은 약을 얼마나 많이 먹든 상관없었다. 그런 걸 따지고 든다는 건 충분히 고통스럽지 않을 때나 생각하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매일같이 피에 떡진 베개와 고름에 늘러붙은 옷가지들을 보며, 두피와 눈꺼풀이 벗겨지고 성기에서 고름이 나는 흉물스러운 몸뚱이에 희망적이고 산뜻한 생각이 깃들 리가 만무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은 나더러 종교를 가지라고 했다. 신이 날 미워해서 이런 고통을 주신거라면, 날 데려갔어야 옳았다. 종교에 내 죄를 비는 대신 더 열심히 내 몸에 해로운 약들을 들이켰다. 약들이 마치 사약 같았다.


사람들이 간질을 신이 내린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그 병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모두 신이 내렸다 여긴다면, 그 목록에 끝이 있겠는가?

-자유론-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 모른다,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지고 타들어갈수록, 정신은 한 꺼풀 예민하게 촉을 세웠다. 타인의 감정을 아주 빠르게 읽었지만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 모르는 척했다. 상대가 던진 상처가 잔뜩 담긴 공을 최대한 시크하고 태연하게 받아야 했으므로, 나는 주로 관찰자가 되었다. 집단에서 통용되는 교양의 선은 지켰지만 그 이상은 나서지 않았다. 나는 두려웠다. 그리고 나의 소심함이나 두려움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었다. 내가 주목받는 것은 혐오스러운 피부 같은 부정적인 시선이었지, 결코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회에서 응당 흔쾌히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눈치껏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어야 했다. 더욱더 민감하고 지겹고 능숙한 병자 생활에 접어들면서, 스스로 이런 어이없는 질문까지 하게 되는 시기가 왔다. 나는 사실 정말로 아픈 게 아닌데, 관심을 받고 싶어서 내 몸이 실제로 아파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현상이 과학적으로 정말 가능할까. 정말이라면 너무 잔인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게 눈치를 주는 것만큼이나 내게 관심이 없기도 했다. 내가 관찰해 온 이 사회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도드라지는 타인에게 눈치 주는 존재들이었지만, 반대에서는 같은 사람들이 포용성을 말했다. 그렇게 다들 명목 좋은 다양화를 추구하지만, 불편한 다양화는 추구하지 않았다. 사이비 종교의 전파처럼 불편한 다양화에 대한 불신의 믿음은 세뇌교육만큼이나 강렬했다. 사회의 일원으로 환영받을 만한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누어질 뿐이었다. 눈치껏 행동하고 적당히 적응하길 요구하고, 또한 자신의 감정표현을 억누르고 무난한 사회생활을 할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의 후예를 원했다. 그러고 보니 까칠하고 뾰족한 내가 아니어도, 어차피 이 사회에는 감정 누르기에 급급한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들은 멀쩡한 피부를 가진 채로, 잘 보이지 않던 감정이 너무나 가려워져 번 아웃되는 순간 나처럼 사회의 중심부에서 걷어차여 질지도 몰랐다.


단미 "이거 봐, 다시 슬슬 돋는데 왜 그러지? 뭘 잘못 먹은 거지?"

까미 "아아..... 이거 플라스틱 그릇 때문이다.."

단미 "에? 그거 때문에? 몇 번 먹지도 않았어"

까미 "아냐 맞아. 당장 끊어야겠어. 절대 안 돼 이제"


새 집, 새 가구, 새 건물, 새 아파트라면 환영하며 좋아하는 사람들. 냄새만 맡아도 마치 저승사자의 옷자락 냄새처럼 등골이 싸하다. 아토피 환자인 나는 대학교에서 의무였던 기숙사 생활도 배제당했다. 조상님이 도와 대학 입학에 성공했지만, 하필 기숙사는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기숙사는 하나의 또 다른 깃발 없는 국가 같았다. 그들이 나누는 시간 속에 크고 작은 모임이 있었고, 나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또다시 눈치껏 아웃사이더를 자청해야 했다. 우리나라는 집단 규율이 강한 곳이라 모든 권력과 세력은 집단에서 생성된다.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못할 바에야 일찍이 소속감보다는 개인화를 택해야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빠른 정보와 넓은 대인관계의 자동적인 포기였다. 개인적 필요성과 소수 집단원 간의 유대관계만이 나를 간신히 거미줄 잇듯이 이어주고 있었는데, 이 근원의 뿌리와는 상관없이 종종 미국에서 살다왔냐는 어이없는 소리를 웃어넘겨야 했다. 집단 속 안정감, 편안함, 소속감 대신 개인적인 유별남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아토피가 있어서요' 술을 거절했다. 한 잔 마시면 죽느냐는 비아냥을 사람 좋은 웃음으로 한잔 한잔 삼켰다. 술을 거절했더니 부가적인 많은 모임자리들이 반자동으로 거절되었다. 내가 나의 병명을 한 번씩 언급할 때마다 어째서인지 조금은 까탈스러운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배려해주는 친구들에게 조차 나는 참 거슬리는 존재일 것 같다는 자학적인 생각도 들었다. 내게 간접적인 불편함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감당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그들은 또 그들과 다른 것이 매우 당연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유사하지 않으면 안달 나하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더 이상 어리다는 핑계를 대지 못할 나이로 접어들었을 때, 관찰자로 살아가는 내 인생이 흔들렸다. 내가 필요하지 않은 관심을 줄 때 고마워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할 때 억지로 웃어 넘겨주지 않았다. 대다수의 친구들이 사회에서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울 때, 표출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권위자에게 아부를 할 때, 최대한 옳은 말을 적확하게 전달하려다가 종종 찍혔다. 감정을 잘 숨기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미덕이라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다. 감정을 잘 숨기지 않으면, 내 꿈과 승진까지 꺾여버린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할 때


저수지 다리 밑으로 몸을 던졌다. 그로부터 2년을 자살을 방지해준다던 약을 먹었다. 알약 따위가 참도 충동적인 널뛰기를 막아주었다. 인간은 살과 피와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깟 화학약품 몇 가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모든 것에 덤덤했다. 우울증 약들은 우울이라는 감정과 더불어 모든 생생한 감정을 희석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저 높은 곳은 뛰어내리라고 있는 곳이었고, 달려오는 차는 뛰어들고 싶게 하는 매개체일 뿐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나만큼 누구도 내게 그토록 관심은 없었다. 한 번에 10만 원씩 하는 상담치료를 그만두었다. 병원에 갈 돈 몇 푼으로 휴대폰비를 내야만 했다. 지갑이 비니 마음도 가난했다. 생명의 끈을 위태롭게 잡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사라졌다. 내 정신 불구의 본 고장이자 23년 동안의 악연. 비참해 마지않은 천륜이라 간절한 살인기도는 죄악이라고 생각해 온 엄마가 내 인생에서 깨끗하게 삭제되었다. 그 여자는 날 낳아준 사람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무려 23살이 될 때까지 가족들의 철저한 침묵 속에서 모르고 자랐다. 끊어졌던 고리의 연결, 빛. 나는 엄마가 낳은 자식이기에, 내가 엄마를 혐오하면 실은 나를 증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내가 풀어야 할 매듭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빛도 없는 깊은 우물 바닥에 혼자 축축하게 앉아있는 기분. 나 자신의 역사를 떠나보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여태 내가 그래 왔던 것처럼 또다시 지독하게 견디는 수밖에 없다. 내가 지닌 어둠, 내가 물려받은 절망은 사실 내 것이 아니었다. 갈 곳을 잃은 나의 우울증, 나의 자살충동이 '이제 되었다, 이제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여자를 해하지 못한 화의 화살이 내게 조준되어있었다.


떨어지면 즉사할까 아님 불행하게 살아나게 될까. 11층이었던 우리의 첫 번째 집. 새벽 3시쯤이면 어김없이 창문을 활짝 열고 앉아 몸을 기울였다. 깊이 잠들었던 까미는 어떻게 알고, 복층에서 후다닥 내려와 나를 달래서 데리고 올라갔다. 죽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무 이유가 없다. 살고 싶은 이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뿐. 한 사람을 희생시켜 내가 원하는 나의 세상의 종말은 얻을 수가 없었다. 까미와 다툰 날이면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정신은 더욱더 줄타기를 계속하고, 밤새도록 자살하는 방법을 찾고 몇 시에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했다. 삶의 본능이 강한 까미와의 동거는 식빵 위에 젤리를 바르는 것만큼 참 부자연스러웠다. 손톱만큼 남아있는 양심은 내가 죽은 뒤, 까미의 망가진 인생과 표정을 계속해서 리플레이해줄 뿐이었다. 내가 죽음에 대해 심도 있는 언급을 할 때마다 우리는 싸웠다. 그때 고마웠다. 지치지 않고 매번 정신 나간 인간을 상대하면서 최선을 다해 싸워주어서.


단미 "나는 별로 인생에 애착이 없어. 그냥 죽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은 것 같아"

까미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단미 "그렇잖아, 사람은 고통받으려고 태어나는 거야"

까미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모두가 그렇게 살지 않아"


인간이 육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 정신으로 인해 몸이 아프다는 말은 사실이다. 멘탈의 붕괴는 날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친절하게도 불면증과 극심한 두통을 데려왔다. 엄마라는 인간 하나가 사라졌다고 해도 한 번 붕괴한 정신은 다시 쌓아 올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약물중독처럼 약을 집어삼켰다. 주인이 아끼지 않는 나의 몸뚱아리는 종합병원이 되었다. 까미는 내과며 신경외과며 두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각종 검사를 시켰다. 사람들은 대개 불안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폭력, 폭음, 흡연, 폭식을 선택한다. 나의 경우,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흡연과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사고방식만을 선택했다. 스스로에 대한 폭력은 굉장히 습관적이어서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을 해소하는 잘못된 방식은 다시 굴레처럼 나의 몸을 누더기로 만든다. 하찮아지는 몸뚱이에 천박한 생각이 깃드는 무한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고? 나의 온몸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몸서리쳐지게 싫은 내가 나를 아낄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동공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채, 입으로는 정적을 메꿀 단어들을 비단히도 찾아낸다. 내가 정신과를 다녔음을 얘기했을 때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여태까지의 나에 대한 판단 유보에 대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좋은 정보였을수도 있지만, 별로 만나본 적없는 당돌한 소수에 대한 입장의 어려움 정도로 보여진다. 그리고 절반 정도는, 뭐 저런 걸 저렇게 당당하게 이야기 하나 싶은 불편한 감정도 감지된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사실은 내가 창조해낸 감정들이 아니라면, 나를 둘러싼 환경과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타자의 영향력에 반응한 결과인 것처럼 보였다. 

우리 사회는 멘탈이 무너진 사람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다. 그래서 무너진 정신으로 인한 신체의 타박상에도 자비를 기대해보긴 힘들었다. 우울해서 학교에 휴학계를 낼 수 있지도 않고, 우울해서 연차를 낼 수 있지도 않고, 심지어는 우울해도 내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는다. 내 정신은 잠시 혹독한 감기를 앓고 있는 중이지만 내게는 공공연하게 낙인이 찍힌다. 취업할 때, 결혼할 때, 보험을 가입할 때조차 나는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배척될 수 있는 이력을 갖게 된다. '정신 질병=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도장을 쾅 찍어준다.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확신하며 살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당신들의 인생에 멘탈이 무너지는 순간이 정녕 한 번이 없을 것 같은지.


소리 없는 휴대폰 불빛 한 번에, 50m쯤 떨어져 있는 복도의 엘리베이터 소리에 나는 잠을 깬다. 멜라토닌 10mg은 졸린 느낌을 들게는 해주지만, 수면제만큼 잠들게 해 주지는 못한다. 숙면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는 날들. 나의 뇌는 꿈에서도 걱정거리들을, 그리고 날 키운 아니 학대한 엄마를 시시때때로 재생해서 나를 재우지 않는다.

나의 몸은 아직도 쓰라린 고통을 받는 정신에게 지배받고 있다. 살은 좀체 찌지 않고, 눈은 충혈되고, 자주 아프고, 만성두통에 약을 털어 넣는다. 나는 아직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나는 예전보다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한 사람이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감정표현보다 씩씩하고 정확한 표현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감정은 표현하는 대신 안으로 삼켰다. 내가 내뱉는 말들은 나의 정신의 영향을 받고, 나의 멘탈은 나의 건강상태의 영향을 끊임없이 반영한다. 경험을 통한 균형 이루기는  인생 전반을 통해 풀어나가야 할 과업으로 내게 남았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니가 내린 잣대들은 너에게 더 엄격하단 걸.

-BTS 'Answer : love myself'-



-경로에서 이탈되고 싶지 않으면


너는 왜 이렇게 애교가 없니. 언제부터 애교에 가산점을 주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다. 불편한 자리에서도 애교를 잘 구사하는 사람들더러 우리는 멘탈이 강하다고 말한다. 애교를 제대로 된 감정표현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애교라는 단어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단어로 번역조차 어렵다. 아기는 말을 하는 순간부터 이쁜 짓을 강요당한다. 박수를 치는 어른들을 위해 귀여운 짓을 한다. 대학생쯤 되면 더욱 혼란스럽다. 뱀의 혀로 애교 짓을 떨어서 교수님과 선배들의 호의를 산다. 무엇이 진짜 감정인지, 혼자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질 필요가 없는 우리 사회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준다. 이쯤 되면 애교는 감정표현의 수단이라기보다 구매수단으로써가 더 적합하다. 애교를 기대하는 상대방의 반응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나의 감정을 희생하고, 사회적 평판을 의식해 학습된 애교를 행사하며, 제대로 마음을 여는 방법을 몰라 애교를 부리고, 나의 감정을 모르기 때문에 애교를 떤다. '~척'은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범죄도 의도를 갖고 행했는지 우발이었는지에 따라 형량의 갭이 차이 나듯이, 나의 감정을 알고 하는 행동과 모르고 하는 행동의 갭은 너무 크다. 적응성을 위해 눈치만 보다가 제대로 붙여지지 못한 감정의 이름은 내면의 혼란과 타인과의 오해를 선사한다. 분위기에 따른 감정노동에 당황함으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거슬리고 격분하고 골치가 아프고 약이 오르고 초조하기도 하다. 나의 감정을 온전하고 곧게 표현하지 못하면 결국 분열되는 것은 나의 자아이다.


'좋은 것 같아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은 건데, 같은 것은 뭘까. It seems like good? 좋아 보인다. 직접적인 의견을 묻는 순간에도, 물건의 디자인을 평가하듯이 답을 한다. 우리는 추측하는 표현에 길들여지다 못해 나의 감정인데도 누군가의 날인과 확정을 기다리고 있다. 나 대신 AI가 대답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다. 나의 감정을 말하는 순간에도 상대를 본다. 집단주의 사회 속, 서열이 낮은 나는 의견 표출에 적극적인 것은 절대악이요, 에둘러서 말하기를 학습당한다.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제거한다. 마치 대중적 의도인 것처럼. 나처럼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된 경우에 한해서 감정을 확실히 표현할 수 있다. 다만, 나쁘게 말해 재수없고, 좋게 말해 다소 이기적이거나 양보나 배려가 부족하다는 평판에 귀가 두꺼워야 한다. 대부분은 사회 속에서 다소 억압을 받을지언정 피해 주지 않는 사람, 어긋나지 않는 사람으로 남는 것을 택한다. 최악의 모순 덩어리. 당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가르치지만, 내가 배제당할 것이 명백한 경우에는 그렇게 가르친 이들부터 일단 숨는다. 목소리가 다르면 손가락질받는다. 심지어 공영방송 언론에서조차 우리나라는 타국을 본다. 우리들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들의 의견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권위 있는 타국의 반응부터 본다. 눈치는 국보일까. 역사 속에 차곡차곡 축적된 시민들의 눈칫밥과 열등감은 증발되지 못한다.


군중 속에 묻혀 있기를 선택한다. 남들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인기 있는 헤어스타일은 무엇인지, 요즘 보는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무슨 데이트를 했는지, 무엇이 유행인지, 무얼 입는지, 무얼 먹는지, 주식부터 여행지까지 그대로 따라 하는 것 외에 자신만의 고유한 성향이라는 것 자체를 잃어버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 나의 미래를 사는 것조차, 관습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들 중 하나를 택하면 그뿐이다. 내가 나를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점점 적정 몸무게와 연애조차 남들에게 물어본다. 나와 비슷한 경제적 수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를 찾는다. 더 나아가 나의 위치에 걸맞은 사람들을 찾는다. 한심하게도.


타인 "단미씨는 왜 SNS 안 해?"

단미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재밌어서요"


현대 사회의 치명적인 점을 꼽으라면 항상 누군가의 검열과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 나를 방어하기 위해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 떠는 인간이고,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비는 진지충이라는 평가를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는 쉽고, 자의로 내려오기는 어렵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수동 공격적인 행태로 소극적인 표현을 선택하고, 적극적인 움직임을 지양하며, 눈치 보는 사회생활을 지속한다. 자주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북 치고 장구 칠 때 꽹과리를 가져다줄 것인지, 깽판을 칠 것인지 말이다.

전 세계에서 손에 꼽는 디지털 선도 사회, 한국. FIRE족을 꿈꾸면서도 일상생활에서조차 RETIRE를 하지 못한다. SNS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인간 사이의 올가미에서 멀어질까 봐 철저히 붙들어둔다. 온갖 머리 아픈 것들이 뒤섞인 일상생활의 섬을 저 멀리서 쳐다본다. 책망이나 비난, 수치심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되는 것은 돈이나 허세, 인맥이기보다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휴식과 자유, 시간적 심리적 여유를 갖는 진지한 시간이다. 여기에는 인스타에 사진 올리는 것만큼의 밀도 높은 정성이 필요하다. 표면감정, 심층감정을 장바구니 가격비교만큼 꼼꼼히, 주식시장 그래프만큼 자주 살펴보아야 한다. 어제와 비교해 오늘은 어떤지, 이유는 뭐였는지. 부러운 척했지만 사실은 배알이 꼴렸다면, 그런 나와 마주해야 한다. 나의 복잡스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옳고 그른 것이 없다. 감정은 그런 것이다. 나에 대한 평가와 남의 감정은 그토록 눈치 보고 신경 쓰면서, 내 감정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면 결국 내게는 불안장애, 강박장애, 홧병, 대인관계 불능, 공황장애, 분노조절장애, 감정표현 불능이 남게되는 것이다. 바디 프로필을 찍는 게 유행일 정도로 근육은 키워대지만, 단백질 파우더쯤으로 정신의 힘은 키워지지 않는다. 근육의 힘과 마찬가지인 것은 정신적인 힘도 오직 사용할 때에만 커진다는 것이다. 가끔은 질병의 힘을 빌려 정신의 파워를 키우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짐육이 아니기에 도마 위에 올라가서 다져질 이유가 없었다.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명절에 나의 학점이, 나의 직장이, 나의 외모가, 나의 몸무게가, 나의 선택에 대한 실패가, 나의 남자 친구의 조건이,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습관처럼 도마 위에 올려진다.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함께 지난한 성장통을 겪으며 내가 얻은 아이템은, 나 자신의 감정과 마주 앉아서 들여다볼 용기였다. 다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지식이지만,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지혜라고 했던가. 나에 대한 지혜가 부족하면 관심과 애정을 가장해 선을 넘는 사람들에게 외상을 입는다. 높은 성취와 인기, 많은 돈이 지상 최고의 과제인 우리나라에서는 2세를 낳기에 부족함이 없는 몸뚱아리들이 넘쳐나지만, 정서적으로 아동기인 성인들로 넘쳐난다. 지식과 트렌드, 부의 가이드는 넘쳐나지만, 본인 스스로와 정서적인 의사소통조차 곤란하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동물이 다른 동물과 잘 소통할 수 있을까? 감성 샷만 찍을 줄 아는, 감성이 고갈된 인간은 척박한 욕망 덩어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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