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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D Oct 24. 2021

무플보단 악플이 낫지

제 발을 뜯어먹는 사람들이 재분배하는 불평등한 사회

-타인을 칼질할 자격


이름 -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와 연결되어, 개인으로 존재하다가 육체가 사라진 뒤에도 남음.

존함 – 영혼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생명 자체의 무게를 지녔음.


자신의 이름을 본디 그렇게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성명학이 생겨났을 리 없고 수많은 철학관이 그리 성행하고 있을 리가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바꿔 팔자를 바꿔보려 할리 없다. 사람의 이름은 무겁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천박한 사람이든 훌륭한 사람이든 모두 이름을 남긴다. 이름을 걸고 하는 모든 일은 나의 얼굴이자 역사, 브랜드가 된다. 그래서 이름을 감추고 익명을 쓴다. 내 이름의 가치를 그릇된 심성에서 나온 남을 비방하는 '악플'로 남길 수 있는가.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할 수 없는 말들은 내 얼굴을 걷어내고 익명이라는 가면 아래, 순간의 감정 배설의 욕망 아래 쏟아 내어 진다. 분노는 익명성을 등에 업고 타인을 칼질한다.

사람은 입이 무거워야 한다. 혀는 입안에 든 주먹이다. 종잇장마냥 가벼운 말에 필시 사건과 부정이 꼬이기 일쑤다. 입이 묵직해야 되는 줄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글이 묵직해야 되는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글에는 내 이름이 없다. 입보다 글이 한결 방정맞다. 글을 쓰는 손가락만은 깃털보다 가볍게 글자를 두드린다. 키보드를 통한 글자들이 소통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방통행.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보기 싫은 말은 보지 않는다. 모래에 처박은 타조 대가리처럼.


그냥 다양한 의견을 표현하는 거야. 뭐 이런 말도 못 하냐?

사람이 어떻게 똑같은 생각만 하냐? 이런 생각을 하면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

아이고 무서워서 무슨 말도 못 하겠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능지수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우리나라에서는 굳이, 다양한 의견의 정의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라 확신한다. 미처 시민의 역할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일러두자면, 인신공격이나 비방, 욕설 등은 개인의 의견에 포함되지 않고 이것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성인들을 일컫어 비시민이라고 부른다. 지력의 개발에만 충실했던 똑똑하고 전투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 배출을 댓글로 한다. 악플의 시작. 영리하고 약은 사람들의 손가락을 타고 정화되지 못한 무식하고, 예의 없고, 개념 없는 배설물들이 돌아다닌다. 

이 사회에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있다. 사회의 상식은 당시 시대와 그 사회의 여론 및 배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소통이란 것을 한다. 그래서 정상적인 성인은 사회의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의견을 허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앎은 한정되어 있지만, 무지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공유했다. 재미나 스트레스 해소, 습관성 감정표출로 남의 피해와 상처를 선택하는 사람들과 굳이 언쟁을 할 필요가 없다. 긍정의 기쁨보다 부정의 희열을 선호하는 소시오패스들에게 분노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분노를 분비물처럼 쏟아내는 댓글에 반응할 이유가 없다. 가드부터 올려 적대감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감정을 짓밟고 모독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오묘한 재주를 가졌다. 억눌린 감정과 상식을 소유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칼을 댈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누구의 행동에 누구는 아파해, 누구의 언행에 누구는 암담해

누구의 찰나에 누구 순간이 돼, 누구의 분노에 누구 목숨이 돼

-BTS 'UGH!'-



-나도 내가 역겨운데, 사실 내 문제가 아니라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작은 바람.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쓰인 투명한 배지를 달고 다닌다. '나를 소중하고 가치 있게 대해달라'. 나를 키우는 부모에게,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나와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나의 직장 동료들에게, 나의 팀장님과 사장님에게 그리고 나의 배우자에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배지를 읽어내지 못한 채 끝내 실망한다. 실망의 화살이 스쳐 지나가는 옆집 이웃, 백화점 점원, 식당 직원을 넘어서서 인터넷에 존재하는 수많은 꼴 보기 싫은 유저들에게 꽂힌다. 

남을 해한 적도 없고, 물건을 훔친 적도 없고, 이 세상에 폐 끼치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하며 살아낸 나를 알아주는 것은 누구인가. 성실하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견뎌내는 내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무력감마저 학습되는 사회. 금전적, 시간적 손실이 날 것 같으면 슬쩍 발을 빼고 비난을 곁들이고 갑이 되어 책임을 운운하는 그 모습에 익숙해지는 그 순간, 나조차도 역겨운 사회적 부품으로 자리 잡아간다.


나의 감정은 대개 독일재 자물쇠로 잘 가두어져 있다. 나는 까미앞에서만 과한 기쁨과 과한 슬픔을 마음껏 느끼고 표현한다. 나의 기쁨은 남의 질투가 되고, 나의 슬픔은 남의 약점이 된다. 비방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런 생각에 갇힌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나처럼 갇혀있는 것을 미덕으로 쳐준다. 투명한 닭장에서 나오는 방법을 모른다. 미래의 어느 날, 새장 문이 열리길 신에게 기도한다. 압박 없는 삶은 세포의 잉태적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짓눌려서 살아간다. 삶의 구성요소 중 스트레스가 무엇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엉겨붙어 있다. 정신과 건강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평생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률은 10% 미만이다. 그조차도 나약함의 대상이 될까 봐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게 24/7 찰싹 붙어있는 나의 위로군, 스마트폰. 나와 세상의 연결고리.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인터넷 커뮤니티, 미디어, sns들은 교묘하게 위로와 웃음, 응원을 가장해 유도한다. 인터넷으로 나의 감정들이 기어들어간다. 만만한 이를 증오하고 두려운 이는 경멸한다. 인과관계 따위는 별로 따져보고 싶지 않다. 인터넷 세상은 사고의 확증편향을 폭증시킨다. 사이비 교주를 따르듯이 점점 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첫인상만큼이나 인간들의 떼창은 나를 옭아매기에 효과가 좋다.


단미 "인터넷은 유용한데, 가끔 소름 끼쳐. 그 많은 정보가 맞는지 틀렸는지 알게 뭐냐고"

까미 "우리가 알 수는 없지, 틀려도 믿게 되지 않나"

단미 "거짓말도 백 번 말하면 진실이 되는 거야"


백 퍼센트 또라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생애를 지랄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혐오하고 복수하고 저주하고 누가 내게 욕을 했나 지켜보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다수는 평범하다. 베풀고 웃고 떠들면 즐겁고 행복하고,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핵심적인 문제는 인간의 설계다. 상당수의 인간은 주기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자격지심이 지배한다. 의도치 않은 꼴 보기 싫은 이의 깍아내려짐은 묘한 우월감을 선사하고, 내가 정당하게 얻지 않은 인정은 받고 싶어 한다. 또한 인간은 종종 타인 비하를 자존감 회복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내면이 건강한 후손을 길러낼 만한 부모는 턱없이 부족하게 잉태하고, 우린 늘 온갖 인간상들과 부대끼며 후천적인 극복 시스템을 만들어 나간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 그 속의 갑작스럽고 울분 어린 감정들이 주는 증오나 분노들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주기적인 가뭄, 태풍, 햇살을 선택적으로 취사할 수 없듯이, 주기적인 자격지심, 열등감, 분노 또한 취사선택이 아닌 필수 선택일 뿐이다. 

인간의 절대적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사람들은 교육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었을 테지만, 다른 문제는 현시대의 교육이다. 언어폭력을 막는 데에 전혀 필요해 보일 것 같지 않을 수학공식과 다시는 환생하지 못할 이미 죽은 사람들의 세기별 연도별 업적은 주구장창 외우게 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제대로 된 선도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적정한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댓글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분비물마냥 배설하고, 배설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 마치 제 어른들처럼, 그렇게 힘 있고 권위 있는 사람의 판단을 착실하게 따르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회피하는 어른으로 길러진다. 논쟁거리에 대해서도 본인이 이해한 부분만을 주장한다. 사람들이 논의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에 대해 거의 파악하지 못한다.

악플과 댓글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 가정과 학교, 국가에서 디지털 시대에 교육과 법제도를 선도하지 못하는 것의 부작용. 배설물에 대한 물만 내리면, 물세 이외에 그 어떤 처벌도 중하게 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벌레들의 콤보. 증오가 특정 방향으로 유도될 때면, 옳타쿠나하고 냄새를 맡은 뇌가 빳빳한 포유류들이 몰려든다. 결례와 무례가 걸레와 벌레인줄 아는 댓글러들. 숨기고 살아도 냄새날 자신의 염치와 수치를 그대로 표출하는 비 시민들. 그리고 그것을 솜방망이로 쓰다듬어 방치하는 썩은내가 진동하는 정부.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인 예절교육, 인격수양, 문명교육, 문화교육이 결여된 채 간접 살인자들이 판을 친다.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표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안타까운 영장류.



-We deserve a life


모든 혐오는 자기혐오에서 시작된다. 온갖 유명인의 연설과 에세이, 미디어에 엄청난 좋아요와 리그램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은 당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당신 자체로 가치가 있는 삶이라며 잔잔한 개소리를 늘어놓는다. 혐오 사회라는 우스꽝스러운 매도에 나를 보너스로 껴넣는다. 기자들이 쓴 기사에, 드라마 속의 대사에, 작가들이 쓴 글귀에 선택적 빨대를 꼽는다. 악플러는 오늘도 자기 안의 혐오를 거머리마냥 빨아들인다.

쾌락과 자극, 증오를 이루는 성분들로 이루어진 인터넷 속의 구조.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출제자가 어떤 의도로 이 문제를 냈는지를 파악해야 하듯이, 가상사회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맥락상 도대체 어디서 왜 이런 대중몰이 여론몰이 사상몰이를 유도하는지 파악해야 왜곡된 인식이 내게서 퍼져나가지 않는다. 디지털 사회 속 뒤틀린 인식은 발생 경로를 모르는 악성종양과도 같다. 증오는 대게 오해를 기반으로 생성되거나, 특정 목적을 기반으로 생성된다. 개인보다는 집단을 공격하는 편이 좋지만, 악플러들은 증오와 분노의 차이도 구분하지 못한다. 증오와 멸시를 합리화해 줄 듣보잡인 이데올로기로 사회에 피해나 위협이 된다는 헛소리에 시간을 쏟는다. 전쟁이 사라져 사람들의 공격성이 모르는 이들을 향하는 건, 유일하게 제3차 대전이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일 것 같다.


삶의 가치는 무엇을 이뤘는지로 무게를 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치는 내가 어떻게 생겼고, 내가 무엇을 이뤘고, 얼마를 버는지로 무게가 달라진다. 부드럽고, 긍정적이고, 호의적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쿨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운다. 거칠고 추악하고 역겨운 것에는 놀라울 정도로 금방 길들여진다. 눈물을 훔쳤던 개개인은 편법이 판을 치는 곳의 판을 짠다. 내가 이뤄야 할 것의 목록에는 희한하게도 개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보다 더욱 우리 가족의 이익과 경제성장, 기업 성장, 결국 집단 문화가 자리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부분에 내가 얼마나 적확한 스펙을 제공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의 최우선 과제. 정자와 난자의 만남과 성장에서부터 우와 열로 길러진다. 아무도 의사가 변호사가 공무원이 건물주가 대기업 임원이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없다.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를 갉아먹는 생존게임에서 하루라도 더 살아남기 위한 발악일 뿐이다. 사람이라는 집단은 모두 최고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조합이 아닌데도, 주류로 편입되기 위한 을들의 레이스는 끝이 날줄 모른다. 달려 나가던 플레이어가 멈춰 서서 유명한 화가는 아니어도 좋으니, 그림을 꾸준히 그리면서 살고 싶다고 꿈을 수정하는 순간 꼼꼼히 구축해놓은 대학 밸류와 커리어의 세상은 가루처럼 무너져 내린다. 자기혐오마저 혐오하는 하는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경쟁과 비교로 단단히 이루어진 사회에서 파생된 자기혐오를 손에 들고, 하는 수 없이 다른 약자를 착취한다. 나의 우위를 증명하기 위해.


단미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이상하고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야"

까미 "그럼 뭔데, 왜 그런 짓을 해?"

단미 "그냥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평범한 사람들"


이론적으로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포용적 공존. 자신의 존엄을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 한국이란 현실에서 적용되는 인권은 대개 운과 돈으로 바꿔먹어야 하는 카지노 칩과도 같다. 카지노 칩은 부처님 같은 자비를 베풀어 유명세도 받아준다. 보통사람인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 적잖이 길들여진 착잡한 현실 앞에서 나의 기둥이 단단하지 않으면, 봄날 흩날리는 바람에도 뿌리가 흔들린다. 뿌리가 뽑힌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흐느적거리다가 인터넷을 뒤지며, 미신을 신봉하며, 남을 찾아가서 답을 구한다. 민들레 홀씨처럼 주체가 없는 사람들은 뒤이어 동일 행동을 하지 않는 타인에게 지적질할 권리를 획득한다. 다르다는 것을 오류로 받아들이는 사회에서는, 나를 제대로 구축하기가 매우 힘겹다. 사회가 정의한 이른바 정상의 범주에서 멀어진다고, 도저히 인권과 바꿔먹을 돈과 운이 없다고, 인간 이하의 즉 모자란 인간으로 퇴보하지 않는다. 온실 속의 화초는 면역력이 없다. 야생화는 비와 바람에 강하다. 당신의 면역력은 죽음을 내놓은 시험대에 오르겠지만, 본래 성장에는 탈이 많고 풍파를 겪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보다 많은 이들이 건강한 야생화가 될 것을 안다.


모든 정의는 말과 함께 시작되지만, 모든 말이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자크 데리다-


유치원에 들어갈 때 즈음이면 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선행,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악행. 우리는 유치원생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성인이 될 즈음이면 선택해야 한다. 타인을 빨아먹어 내 HP를 올릴 것인가, 개개인의 독립적인 성장을 응원할 것인가.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기 싫은 사람들은 오로지 고독하고 철저한 자기 고찰과 수행, 끝없는 질문과 의문, 노력 끝에만 겨우 다른 장으로 넘어갈 기회 정도를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라면 자라면서 꼭 몇 번은 맞닥뜨려야 할 수많은 심리적 폭력, 선입견, 과잉 정보, 과잉 커뮤니케이션, 욕심과 허세, 감시와 착취. 그것들은 과잉 스트레스로 장전이 되어 무방비 상태인 사람들을 향해 쏠 것인지를 묻는다. 내게 쏟아지는 박수와 주목을 위해서라면 양심 따위는 묻어두어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소위 그 따위 행동을 일삼는 것은 그들의 욕심이나 고집이 강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양심과 인내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내심 자루가 비눗방울 같아서 과잉 스트레스를 담기에는 너무 금방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자루가 자주 터지는 사람들에게는 인간 대접도, 사회의 테두리도, 심지어 욕도 과도한 배려다. 양심을 영국산 홍차에 우아하게 타 먹기로 결심한 비인간들은 됨됨이, 배려, 겸손, 품격 대신에 무식, 폭력, 교만, 이기심을 탑재한 채 자신의 무식한 행위를 끝도 없이 축적한다.


법적 처벌을 피해 갔지만, 아직 죽지 못한 자신의 양심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뻔뻔한 '현대판 아이히만'들이 외친다. 난 잘못이 없지, 내 손으로 죽인 게 아니잖아? 누가 죽으래? 난 죽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고.

세상은 도박이 아니라 절대 본전이 없다. 인과응보. 상대성과 인과의 법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한낱 인간이 우주계를 벗어나서 생존할 수가 없듯이, 상대계의 법칙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신이 행한 선업과 악업은 어떻게든 돌아온다. 법적 처벌을 피했다면 너무도 축하한다, 당신의 업은 행위의 결과를 축적했다. 인간은 지금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학습된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우리에 갇힌 비육농장의 돼지의 발상과도 같다. 종교에 귀의해서 당신의 죄를 고한다고, 죄책감에 자살을 한다고, 스스로 레드썬을 외친다고,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과과정에 넣어야 할 것 같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업은 본인이 고스란히 받는다. 인생이 꼬이고 불행해지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 다행스럽다. 당신의 가정, 당신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 당신의 부모에게 그 죗값이 돌아간다면 그것도 너무나 행운스럽다. 부디 타인 가슴에 생채기를 낸 동물들은 생의 끝까지 건강하고 평안하게 오래오래 살다가 죽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저승사자가 왜 저런 인간은 데려가지 않느냐고 욕하겠지만, 나는 부디 꼭 그래 주길 염원한다. 인간은 육체를 통해 경험을 할 뿐이다. 당신에게 실패란 없고 배움만이 있으니, 음식물 쓰레기 짜내는 힘만큼의 응원을 보탠다. 충분히 배우지 못한 모질이에게, 그 경험은 반복된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교훈을 얻을 때까지, 제대로 배울 때까지 같은 경험을 계속해서 하면 된다. 그것이 수백 년이든 수천 년이든. 삽질도 십만 번하면 제대로 팔 줄 알게 되겠지. '이곳'보다 더 나은 '그곳'은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천국에 살고 싶다면 백날 간절히 기도하며 그곳이 어딘지 찾기보다, 스스로 입주자격이 되는지나 따져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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