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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D Oct 24. 2021

잠재적 불륜 위험군

우리는 때때로 불륜, 바람, 배신에 대해 한번쯤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타락한 비극 연출자


결혼 전, 바람을 셀 수 없을 만큼 피웠다. 재밌고, 짜릿하고, 흥분되고, 스릴 넘치는 감정의 향연. 그저 그때 나의 감정에 충실했다. 낯설음이 주는 기대와 설렘, 그리고 열정은 짧은 순간에도 타인을 미친 듯이 탐닉하게 했지만, 타오르는 기쁨은 금세 김 빠진 콜라가 되었고 진부한 타인으로 끝맺음을 했다. 사람에 빠져드는 감정만큼은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랐건만 몇 번의 데이트만으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해졌고, 나는 새로운 놀잇감을 찾듯 비극인 결말을 계속해서 리플레이했다. 사랑이었냐고? 사랑의 정의 중에 미친 호르몬의 비정상적인 작용이 포함된다면 사랑이었을 수도 있겠다. 사실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뭐든 가져다 붙여 의미를 부여하면 그게 그거 아닌가. 그리고 그딴 텅 빈 정의가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오줌을 배출하면 더럽지만, 내 몸 안에 언제나 누런 빛깔 노폐물은 함께인 것처럼 바람은 그런 것이다.

사회의 질서를 파기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애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회에서 낯설게 느껴지는 관계라고 해서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교류에 누가 옳고 그름을 재단할 수 있을까. 만남을 약속한 사람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변명을 하고, 해명을 하고, 기이한 스토리들을 짜내면서 나는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 결코 절망이 아니란 것을 배웠다. 비극적인 것은 사랑을 잃는 일만큼이나 사랑에 참담하게 얽히고 빠지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철없고 사리분별이 불가능한 나의 낭만적 이상 속에는 매우 많은 파트너가 존재했다. 지적으로 존경할 만한 샌님, 유머 코드가 찰떡궁합인 정서적 동반자, 배려심이 넘치는 부모상, 격의 없는 평생 친구, 몸매 죽이는 애인, 감성적인 로맨티스트.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이 모든 것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을 목격할 행운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살아야만 했다.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새로움과 설렘을 찾아 매일 자라나는 상상력의 끄나풀을 붙잡고 사랑 타령을 했다. 날 위로하는 건 언젠가는 잡힐 희망에 대한 자유와 성적 격렬함, 활력을 찾는 것이었다.

누가 자신 있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일반적으로 금지인 것들이 웃기게도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아이러니를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린 그런 이중잣대의 꼴들을 보면서 자랐다. 노골적인 배신이나 이중 살림, 불륜, 성적 쾌락이 없었다고 해도 무관심, 무시, 은닉, 거짓말, 가스 라이팅 등이 이뤄지고 있다면 그것 또한 바람보다 더한 종말이 아닌가.


까미 "쟤네 진짜 바보 아니야? 사람들이 다 아는 줄 지들만 모르는 거야?"

단미 "원래 사내 불륜의 제목이 그거래잖아 '니네만 빼고 다 알아'"


이미 안으로 깨진 가정에 불륜이 꽃 피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싶다. 혼인 상태에서 사랑을 찾는 것이 결혼을 파괴한다고 하지만, 사랑을 일으키는 것은 본인의 나르시시즘적인 상상력이지 상대방이 아니다. 또한, 찢어진 고무장갑에 물이 들어가듯이 이미 찢어진 결혼에 불륜이 깃든 것뿐이다. 우리는 금이 가는 전조증상을 때때로 무시하기도, 애써 덮기도, 아니면 이미 부서진 줄조차 모르기도 한다. 균열은 모두의 작품이다.

부부동반 모임으로 자주 모여서 친분이 있었던 남자와 같은 직장의 여자가 바람이 났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내가 어렸을 때, 몰래 그 짓을 했던 그때의 눈빛이었다. 그들이 불륜에 들이는 정성, 대담함, 상상력, 성실함, 열정을 보면 그 십 분의 일이라도 부부관계의 균열에 쏟아봤는지 의문이긴 했다. 나와 아무리 여러 해 동안 얇은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부부관계야 사적인 일이니 그건 아무래도 관심 없었다. 다만 그들의 불륜은 직장 내의 모든 이들의 암적인 존재가 되긴 했다. 그들의 행동이 비난을 받는 것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채 연애질을 사내에서 했고, 수많은 거짓말들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쳤으며, 자신의 오피스아내(오피스남편)를 각자의 배우자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고, 본인의 주어진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만약 본인의 업무를 곧잘 수행해냈고, 각자의 아내와 남편에게 자신의 외도 사실을 인정받았다면, 나는 단혼을 수호하는 사람들과 관계없이 그들을 존중했을 것이다. 그 둘이 각자의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비밀스러운 관계를 만들고, 감정적 연결고리를 만들고, 성적 마력을 느끼는 것은 그들의 과제일 뿐이다. 누구든 결혼할 사람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 대신 그러한 언젠가는 처리가 필요할 부분은 부부관계에 투명해야 한다. 깨진 그릇은 붙여 쓰는 게 아니고,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하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런 파트너에게 수모를 당하고 견뎌내며 함께 살아나가는 것은 목격자인 우리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 둘은 헤어져도, 어차피 바람은 계속된다. 일부일처와 사랑은 관련이 없다. 일생 한 사람만을 사랑할지 한 번에 한 사람만 사랑할지는 개인적인 이슈이며, 다만 뇌를 소유한 포유류라면 사랑했던 혹은 애정 하는 나의 파트너를 정도껏 존중할 필요가 있다. 어른으로서, 시민으로서, 윤리를 아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충동적 욕망으로 인해 양심이 깨졌을 때, 나의 될성부른 활력에는 미덕뿐이 아니라 악덕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책임을 지면 된다.


그들의 불륜은 너무 늦게 만난 자신의 영혼의 짝꿍을 향한 애틋한 사랑은 아니었다. 선을 넘는 것은 순간적인 마약과도 같다. 그렇지만 마약에는 일시적이나 한정적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다. 내가 두려운 이 현실의 어떤 것에 대한 도피이자 눈가림. 선을 넘는 사람들은 대체로 본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낭만적인 이상을 갖고 있다. 느닷없이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던지, 갑자기 없던 욕망이 어느 날 아침 불쑥 생긴 것이 아니다. 조금은 박약한 부품을 머리에 장착하고, 그저 그들은 욕망을 추구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시대에 당당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주목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새롭고 나는 중요하고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데, 현실은 도무지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는 날들의 연속이다. 진짜 나의 자의식과 환상 속의 자아의 괴리감은 크다. 영혼의 밑바탕에는 항상 갈등이 존재한다. 내가 아닌 내가 꿈꾸는 다른 사람이고픈 갈망과 동경. 인간에게 그것보다 더한 시련은 없다. 그들은 그 시련을 직접 극복하기보다는 누군가 나라는 인간이 살아있음을 단초적으로 증빙해주기를 바란다.

내연녀 내연남들은 외친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개소리도 가지가지. 세 살짜리 아이의 그림에도 엄마가 제목을 붙이면 작품이 되듯이, 그들의 감정에도 애가 타는 맛을 가져다 붙이면 사랑이 된다. 스릴 넘치게 남몰래 간통자들끼리 주물럭거리더라도 어쨌든 그들의 결혼 생활처럼 불륜 삶에도 현타는 온다. 왜냐하면 사실은 더듬고 싶은 누구를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리가 나쁘면 그것 또한 냉큼 깨닫지 못하는 비극 속에 생을 보낼 수도 있다. 또 다른 나 자신을 찾는 와중에, 행선지를 잘못 든 것조차 알아내지 못한다. 루저들의 삶은 그렇게 욕망 속에 표류한다. 그들이 쫓는 것은 대개 섹스보다 큰 욕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간통의 증거를 콘돔 껍데기에서 찾을 게 아니라, 머리를 갈라 켜켜이 숨어있는 그릇된 욕망을 찾아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 합법적인 중독 : 비극의 아름다움


바람 또한 몹시 질렸다. 나는 사랑만큼 바람도 체질에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환영과 낭만에 이끌리는 순간들에 싫증이 났고, 사랑에 빠지는 내 모습에 빠지는 것조차 넌덜머리가 났다. 왜 어른들이 늦바람 든다고 말하는지 타당성을 살필 수 있었고, 왜 놀아본 애들이 자신의 배우자는 잘 고른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경우의 수를 최대한 넉넉하게 겪은 사람에게 인간이라는 종은 뭐도 흥미로울 것이 많지 않은 데다, 방대한 데이터는 말 몇 마디로도 내게 맞지 않는 사람을 골라내는 재주를 연마하게 했다. 어느 순간 나는 바람의 권태로움을 한 마디로 정의했다. 차라리 영혼을 벗겨내면 모를까, 옷을 벗는 순간 신비감 같은 건 쥐뿔도 없다. 그래서 그토록 지겹고 지겨워진다.

만나던 사람에게 비열한 거짓말을 하고, 이별을 고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날 사랑해주던 순간조차 한눈을 팔던 나의 모습. 사랑도 인연도 불륜도 바람도 순간의 선택이다. 나는 거절할 수 있는 순간에도 대부분 거절하지 않았고, 금지된 것을 하는 것에 중독되어 있었다. 어른이 된 후에 내게 허락된 금지된 것들은 별로 없었으니, 처절하고 비극적일수록 매료되었고 심지어 아름다웠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할 때, 진정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혼동했다. 불완전하고 애매모호할수록 더 원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제법 들었을 때 무언가를 해보지 않아서 후회하지 않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뭐든 내키는 것은 하는 편이 좋았다. 인생이 매 순간의 모음이라면 어리석은 순간도 멀리 보면 추억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이 세상에서 순수한 사랑을 믿기에는, 이미 내게는 소유욕이나 인정 욕구, 일탈, 반항심이 한결 크게 작용했다.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모두 절대 권력의 소산인 것처럼, 아름다운 로맨스들도 모두 절대 비극의 소산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이루어질 듯한 인연이 가장 애처로우며, 만나지 않은 남자가 내 이상형이고, 이미 유부남인 남자가 내가 전생에 놓친 내 배필이다. 친밀한 타인이 될 것인가, 사랑하는 낯선 사람이 될 것인가. 배신과 카타르시스 뒤에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Life is a collection of moment


과연 그 순간만큼은 사랑일 가능성도 있다. '그 순간'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뇌는 정상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 지금껏 내가 쌓아온 혹은 살아온 것들을 무너뜨릴 충분한 의지가 있다. 사랑에 빠지면 자신이 가장 확고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것부터 의심하게 된다. 사람의 힘으로는 사랑의 힘을 어쩌지 못한다. 그래서 진짜 현실은 아침드라마보다 더 추악하다. 사랑과 욕망의 딜레마는 결국 파국이지만, 그것을 지불할만한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면 지불할만한 가치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수많은 배신과 일탈, 눈물의 경험 뒤에 내게 남은 질문은 어떤 류의 인간종으로 살고 싶은 지였다. 누군가의 칭찬과 사탕에 쪼르르 따라가고 싶은 유치원생 아이로 살고 싶은지, 남이 하는 말에 의해 존재가치를 확인받는 사춘기 고등학생으로 살고 싶은지, 나의 불완전함을 남에게서 채우지 않는 사유하는 이성적인 어른으로 살아갈지는 오로지 나의 선택이었다. 사람들의 감언이설과 칭송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의 칭찬과 추파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누군가가 없이도 그 어떤 확인사살이 없이도 나는 여전히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임을 알게 되어서, 내게는 나 자신 이외에 그 어떤 욕망의 충족 대상도 필요치 않았다. 

심지어 내게는 운이 좋게도 자주 나와 싸워주고, 매일 나와 대화도 나눠줄 단짝이 있다. 내 모든 정서적 교감의 상대는 본질적으로는 나 자신이고 그다음은 까미다. 우리 사이에 부재한 욕망이 다른 이들이 숨기고 있는 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우리 사이에 켜켜이 쌓여있는 20만 시간이 넘는 대화 창고는 하루아침에 태울 수 있는 양이 아니며, 우리가 여전히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그토록 갈망하던 파랑새는 사실 집에 있었고, 까미 또한 밖에 나가면 누군가에게는 New face다. 나 자신과의 관계가 좋고, 부부 사이가 끈끈하다면 자신의 불완전함으로 인해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원하게 되는 비극을 연출하고 싶은 마음이 줄어든다. 나는 가장 밑바닥까지도 진정한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 그 어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불륜 사회와의 공존


아는 애 "결혼한 뒤에 바람피운 적 있어?"

단미 "없지. 우리 사이가 끝나면 난 그냥 끝낼 거야, 배우자에게 배신은 없어"


결혼과 같은 이슈는 내가 인생에서 했던 그 어떤 선택보다도 더 신중한 선택이었다. 결혼의 결정이 제대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불륜과 같은 천재지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나는 인지하고 결혼을 했다. 인간사에 그 무슨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결코 내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도 외도였다.

배신에는 섹스 말고도 폭력, 무시, 거짓말, 정서적 교류 결렬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방식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해도 결국은 균형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같다. 그렇게 보면 불륜이나 외도야말로 정말로 명확하고 잔인하지만, 상식 밖의 커플 관계 재정의가 아닌가. 혼인관계에서는 둘의 역할이나 아이 등이 둘 사이를 정의하기도 하지만, 불륜만큼 명확히 정의해주는 것도 없다. 서로의 무게, 갑과 을, 피의자와 피해자, 단 한 번의 배신으로도 둘의 관계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명확해진다.

나와 남편은 배신을 경험하기 원치 않는 공통의 목적으로 결혼에 이르렀다. 우리 둘 사이에 합의된 제2의 이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혼인 중 외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만약 미래에 우리 사이가 함께함으로 인해 점차 불행해진다면 혹은 권태로움을 못 견디게 된다면, 우리는 외도를 택하는 대신 서로를 놓아주기로 한다. 또한 지난 10년간 행해본 적 없는 폭력이나 무시, 거짓말, 대화 결렬을 앞으로의 미래에 행하게 되어도 우리의 결혼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과거에는 불행해서 이혼을 했다면, 현대사회에는 각자의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이 이혼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혼하지 않는 것이 수치일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우리는 일시적 무제한인 우리의 결혼생활에 최선을 다하기로 합의한다. 그것이 결혼의 서약이 의미하는 바의 전부다. 식구는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배우자가 밥 처먹는 꼴도 보기가 싫어진다면, 그 관계는 이미 끝난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멸종하지 않는 한, 불륜도 결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영화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주제가 있다면 바로 살인과 불륜이다. 인간은 똑똑한 생명체가 아니라, 동물적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유전자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대중은 외도를 저지른 이들에게 응당한 벌을 내리라며 찢어 죽일 듯 아우성을 친다. 동물만도 못한 것들을, 자제력이 부족한 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소리친다. 경멸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과연 벌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다소 논쟁의 소지가 있다. 대중 여론이란 천 명이 말하면 옳은 사유고, 열 명이 말하면 틀린 사유가 되어져 온 역사가 있다. 수십 년 전에는 처음 관계를 맺은 이와 결혼을 하지 않으면 거의 지금의 불륜과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당했지만, 지금 누군가가 처음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결혼을 하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100년 전에 불륜이라 매도했던 행태들은 다수가 선호하는 생활방식으로 여겨져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다수에 의해 억압이 당연시되는 분위기기에 대중의 여론은 불륜을 탄압한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특정 문화에서 살거나, 그럴만한 요상한 사유가 있을 경우 불륜을 저지른 자들에 대해 관용과 측은지심까지 보이는 딜레마를 종종 보인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외도와 불륜을 놓고 어떻게 머리채를 잡아 뜯을 것인지 고민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함께 공존할 것인가를 공모해야 한다. 인간은 본래 극단적인 모순도 껴안고 살아간다.


단미 "난 여전히 자기를 사랑은 하는데, 쾌락의 대상으로서는 좀 흥미가 떨어졌어"

까미 "그게 무슨 말이야...."

단미 "내 삶의 다양한 쾌락을 함께 나눌 대상으로서 자기가 존재하는 걸로 바뀌었어"


사랑과 쾌락을 일치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쾌락은 일종의 예술 행위와 자유의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의 쾌락은 후각, 촉각, 보는 황홀감, 먹는 즐거움, 듣는 흡족함 등 사랑과 카타르시스와 따로 떼어놓고 느낄 수 있는 분야에 자리하고 있다. 불륜을 잘못된 쾌락을 추구한 어리석은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굳이 쾌락은 사랑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정통적인 결론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탄압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수십 년이 지나면, 아니 고작 몇 년으로도 우리 사회의 일반적 결론은 또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바람 불 때마다 생각이 바뀌고, 의견을 바꾸고, 또는 이단으로 찍히게 될 것을 염려해서 자신의 본심을 위축시킨다. 다수의 선호에 의해 우리는 자아감의 위협을 받고,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만, 나의 윤리를 존중받고 싶은 만큼 다른 이들의 윤리도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문제의 소지가 있는 저급한 이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결혼이 점차 고루한 법적 절차가 되고, 선택적 동거관계가 흔한 법적 관계가 되어간다고 해도 그것을 지탄할 수는 없다. 비겁한 거짓말, 사기, 속임수가 아닌, 부부간의 서로 합의된 새로운 관계에 의해서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서 누구든 잣대를 들이밀 자격이 없다. 단혼이든 중혼이든 복혼이든간에,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것들에 의해서 사람들을 재단할 권리가 없는 것은 국가 권력의 오지랖도 마찬가지다. 수십만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십만 개의 다른 결론을 이끌어 냈다. 올바르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역사의 모든 시도들은, 결코 하나로 몰아세워 자연스러운 시대적 정신 발전을 저해하지 않았다. 한 개인의 성적 취향, 상호 간 감정적인 문제를 과연 관습이나 관행이라는 이유로 국가권력이 나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한 사회가 결코 구성원들의 자유 의지와 마땅한 권리를 지켜주고 있지 않다는 것만 확실히 알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불량하고 못마땅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가지는 권한의 한계는 명확히 존재한다. 불륜에 있어서는 정도의 차이는 크겠지만, 일반적으로 절반쯤 개인의 손해에 속하고 나머지 절반쯤은 사회의 해악과 연관이 있다. 그 말인즉슨, 사회가 규범에 의해 절대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한 주체는 아니라는 뜻이다. 설령 그 어떤 정당한 한계가 주어진다 한들, 늘 누군가에게는 탐탁지 않은 결론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은밀한 내부이기에 명확한 정답도 오답도 없다. 우리 사회는 노이즈를 생산하는 연애 프로와 예능프로를 기막히게 만들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만연한 사회악으로 규정된 행위 규범에 대해 교육의 소임을 해야 할 때이다. 개인적인 덕목은 그저 길러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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