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턱대고 높여야 하는 혼인율에, 이런 결혼도 포함인가요
드레스 하나 고르는 것도 뭐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하얀색 드레스를 거부했고, 고를 수 있다면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하는 중이었다. 까미는 제발 철없게 굴지 말라고 버럭 하다가 결국에는 '이번 한 번만 남들 하는 대로 조용히 넘어가자'고 내 손을 잡고 애원했다. 아니 내가 남편을 여러 명 갖겠다고 했어 순간이동을 하고 싶다 했어, 대체 그까짓 드레스 따위가 불가침 영역에 있을게 또 뭐람. 블로그들을 들여다봤다. 웨딩드레스 업체들은 죄다 외국에 상주하는지, 하나같이 얼굴이 조막만하고 하얗게 질린 외국인 모델뿐이었다. ‘체형별 웨딩드레스 추천’은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우악스럽게 탄생한 부조화 단어들의 나열 같았다. 책모양 포장방법, 캔디모양 포장방법, 직사각형모양 포장방법처럼 어울리는 형태에 따라 추천을 해주는 것이었고, 마치 상품을 예쁘게 포장할 팁을 가르쳐 주는 듯했으나 포장이 불가한 상품 또한 꽤나 적지 않아 보였다. 우리 몸의 체형은 단 한 명도 같지 않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녕 그들은 대략 백만 명의 체형별 드레스를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몸의 형태와 드레스가 어울리지 않으면, 그 포장지가 잘못된 것이지 내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체형이 어떻든 그게 무슨 색이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나의 결혼식장에서 입을 권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나의 작은 키와 납작한 엉덩이와 굵은 팔뚝으로 인해 둘러야 할 포장지가 바뀌는 듯했다. 심지어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을 입던 문화는 남성 본위주의 시대의 산물에서 태어나 빅토리아 여왕이 바통을 이어받아 흰색을 정착시키기에 이르렀으니, 드론이 커피를 배달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참으로 괴기한 문화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샵 언니 "뭐 찾아보신 디자인 있으세요?"
단미 "아니요. 없어요"
샵 언니 "어머, 그럼 머메이드 스타일 추천해드릴게요. 신부님 같은 스타일은 날씬하셔서 이런 스타일이 딱이에요~ 다른 분들은 입고 싶어도 못 입어요~"
나는 18세기 어느 왕족가문의 귀한 막내 딸내미로 자란 여자가 아니었으므로 평소 입지도 않는 10kg이 넘는 코르셋 드레스며, 구두며, 헤어 장식으로 얼룩진 공주놀이는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드레스라는 천 쪼가리에 그닥 관심있지 않았던 나는 피팅이란 걸 하는 것조차 싫어했지만, 결국 까미손에 이끌려 두 군데를 방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게 드레스업체 평가는 고사하고 3벌 피팅도 버거웠으며 사진 하나 찍었으면 됐지 사명감 투철하신 직원분은 계속 까미더러 동영상까지 찍으라고 난리였다. 나는 드레스는 아무거나 고르고 나가서(혹은 고르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아이스크림 먹을 생각에 가득 차 있었고, 까미는 내가 다른 곳을 들러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냉큼 원하는 가격에 협상을 나섰다. 남들처럼 결혼 전 웨딩케어를 받지 못해서 까미는 내게 내심 미안해하는 눈치였지만, 금세 그런 건 과분한 감정이었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웨딩케어란 결혼 전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버진로드를 걷기 위해 하는 관리인데, 얼굴선과 어깨선, 몸매 관리, 피부관리 등을 말한다. 신랑들은 그녀들의 어깨선을 보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참석자들은 신부의 몸매 평가나 피부 평가를 하러 온 배심원단이 아닌데 말이다. 결혼 뒤에 곧장 사라질 얼굴선과 몸매선을 굳이 왜 돈을 들여 관리를 하는지, 어디 최상의 판매가로 팔려가는 사람인지 사실 나로서는 굉장히 의문스러웠다. 화장이 잘 받도록 얼굴축소, 피부관리도 웨딩케어에 들어가는데 솔직히 까놓고 얘기하면 돈만 많으면 화장은 늘 잘 받고 작은 얼굴은 피부과가 아니라 부모님한테 가야 하며, 잠시 잠깐 중력을 거스른다고 붕어빵이 붕어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중요한 날 드레스를 입을 자신이 없어서라는 소릴 하곤 했는데, 그전에 결혼생활을 해낼 자신이나 있는지 관리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가. 결혼은 왜 하는가. 보편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외로우니까, 나이 들면 외로울 테니까, 후손을 만들어야 하니까, 부모님이 걱정하니까, 이 여자를 너무 사랑하니까, 누구나 하니까, 누구나 해왔으니까, 우리 부모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내 친구들도 그렇게 살아가니까. 제도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성행위, 노동력, 재산에 대한 법적 행사권 행사, 복지정책 지원, 결혼 압박 문화에서 정상궤도라는 안정감, 정서적 안정감, 더 넓은 인척관계, 새로운 가족 문화 창출이다.
그런데 요즘 결혼식이란 건 어른들에게는 뿌려놓은 부조들을 수금하는 날인 동시에 육아 종료 선언과 체면치레하는 날일 뿐이고, 당사자들에겐 손에 꼽을 정도로 볼 법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둔갑한 고지서를 뿌려대며 나의 허례허식의 수준을 시대에 발맞추어 만천하에 당당하게 드러내는 날인 것 같다. 나에게 결혼식은 개인적으로 평생 내뱉었던 불효의 최고 정점을 찍지 않기 위해서 올린 강제적 이벤트라고 할 수 있겠다. 재주는 곰이 넘고, 업체들만 배부른 이 이벤트의 수혜자는 내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나는 고집스럽고 완강한 우리 할머니의 사랑받는 손녀로서, 이 집안의 개혼자로서 그리고 이미 무엇이 잘못되고 무엇이 맞는 방향인지 분간할 줄 알아버린 고집불통 애늙은이로서 싸워나가야 할 장벽을 스스로 세우지 않으려면, 결혼은 왜 하는가 따위의 부쳐먹지도 못할 의문은 빨리 접어야만 했다.
단미 "단미 저번에 호주에서 결혼했다고 하면 되잖아"
할머니 "결혼식을 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애가 결혼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나. 무슨 사고 쳐서 조용히 처리했나 할거 아니야"
단미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사고를 치든지 말든지 남일에 관심들이 많아"
할머니 "그래도 그러면 안된다"
-무한 도돌이표 대화에 지쳐 나가떨어진 건 놀랍게도 내 쪽이었다-
모두가 건강한 몸을 원하지만 꾸준히 몸을 움직이는 건 달갑지 않은 것처럼, 많은 이들이 결혼을 바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단 결혼 준비가 시작되면 제발 이 결혼식이 빨리 끝나길 기도한다. 결혼 전에는 도저히 어려울 것 같지 않은 온갖 환상스런 대화들이 오고 가지만, 막상 닥치면 모두가 기피하던 그러한 똑같은 모양으로 결혼을 한다. 꽤 오래 비혼을 염원했던 나는 결혼이라는 억압된 제도 안에 결속되기를 드디어 결심했지만, 갈등 없는 결혼을 하기에 한국의 결혼 문화는 나에게 무척 버거웠다. 나에게 결혼은 결코 시기가 되어서 하려거나 칭찬받거나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도가 허용하지 않는 범위의 생각들조차 뻗어나갈 자유가 있었다. 제도란 궁극적으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지만,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는 결혼으로 인한 개인과 사회의 문화적인 갈등을 매년 키워 올뿐이었다. 제도는 계속해서 변화할 수 있겠지만, 문화는 좀체 바뀌기가 힘들다. 사회적 상식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느냐 또는 오랜 세월 동안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 의해 믿어져 왔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은 나에게만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에 살았다면 나는 비혼 인구의 평균을 높이는 데에 이바지했을 것이다. 외국에 사는 내게 결혼이라는 것은 다각적 관점에서, 필요하고 효율적인 절차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간소한 결혼식이었다. 외곽지역의 작은 공간을 빌려 직계가족만 참석하는 20명 내외의 결혼식. 알고 보니 결혼식이라는 이벤트에서 나의 의견이란 것은 신부 역할을 맡은 일일 연기자의 의견에 불과했으므로, 간단히 무시되었다. 결혼식의 본질보다 겉치레가 더 중요한 사회적 병폐가 뿌리 깊은 우리나라 결혼 문화, 결혼식의 콘텐츠와 내용보다 주차와 식사가 더 중요해왔던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전통을 나 같은 애송이가 바꿀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다들 그렇게 한다고, 원래 그런 거라고들 내게 말했다. '다들, 원래'라는 조건부는 내가 30년을 지겹게 들어왔던 비논리적이자 가장 단출한 설명이었는데, 이번만은 아주 생소한 외국어처럼 들렸다. 원래라는 조건에 묶이면 '왜'는 갈 곳이 없다. 내게는 현재 정착된 문화의 모든 것들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 여야 할 이유는 결코 없었다. 유난스럽다며 비난받고, 타협하는 데에 지쳐버린 나는 결국 천편일률적인 결혼 모양을 택했다.
"결혼식장도 안 보고 식장 고르는 커플도 아마 몇 없을 거야"라는 까미의 말대로 우리는 외국에 산다는 핑계이자 방패로 한국에 사는 가족들이 보내준 장소를 보고, 맘에 들면 그냥 계약하라는 말을 전했다. 별로 궁금한 것은 없었다. 단 한 시간 드라마 연출할 장소를 빌리는 데, 궁금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스드메도 필요 없었다. 스튜디오 촬영이란 어차피 ctrl+c ctrl +v처럼, 뒷배경 옷 분위기 소품 다 엇비슷한데 얼굴만 갈아 끼운 것처럼 보였다. 표정과 모션 또한 신랄하고 생동감 넘치는 우리의 진짜 표정이 아닌 어색하게 연출된 억지 표정일 테고, 그저 한번 남겨보고 싶어서 하기에는 나의 귀찮음을 이길 수 없었다. 덕분에 스튜디오 원본비며, 수정비, 액자, 편집비, 페이지 추가비용등을 아낄 수 있었고, 그 돈으로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샀으니 경제적 시간적 이득이었다.
자라 옷을 입고 화방에 파는 노끈을 허리에 묶고 호주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2불짜리 액자에 끼워 식장에 들어오는 입구에 전시했는데, 아무도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안 하면 후회한다던 dvd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부모님의 dvd도 본 적이 없는데 50만원주고 한들 50년 동안 한 번이나 볼까 싶었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청첩장은 나도 궁금하지 않아서, 바른손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를 선택해 내키는 디자인에 인쇄했다. 살면서 10개가 넘는 청첩장을 받아봤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버렸는지 어디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나 자신으로 미루어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얼마를 내야 할지, 날짜는 언제인지가 궁금할 뿐, 청첩장이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아름다운 문구가 쓰여있는지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은 식전, 식중영상도 마찬가지인데, 만들지 말자는 내 말을 기꺼이 무시하고 까미는 밤새워 여백이 맞지도 않는 식전영상을 만들었더랬다. 자기만족을 위한 목적을 달성하려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관여할 이유가 없었다. 까미는 약혼식 때 만들어둔 맞춤양복을 그대로 예복으로 입었기에, 신랑예복에 대한 고민을 다른 데에 쓸 수 있었다. 9년 동안 정장입을 일이 다섯 손가락에 꼽는데, 굳이 또 다른 환경 폐기물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단미 "까미가 가지고 오기로 했어"
할머니 "예끼! 까미가 뭐니 까미가"
단미 "그럼 뭐라 그래, 이름이 있는 애를"
할머니 "그래도 이제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
단미 "내가 홍길동이야? 까미를 까미라고 못 부르게. 난 계속 그렇게 부를 거야"
결혼을 약속함과 동시에 하루아침에 내게는 100년 전 봉건사회의 탈이 씌워졌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남자와 결혼하는 내가 결심해야 하는 것들은, 그에게 그리고 우리 집 가족들에게는 쓰이지 않을 극존칭을 그들 가족에게도 쓰지 않을 것만으로도 유난한 사람 취급을 당해야 함을 암시했다. 내게는 한국에서 살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의 당위성이 이렇게 하나 더 추가되었다. 버려지는 청첩장들과 웨딩드레스들의 환경폐기물을 걱정하는 세대인 나와 30년대생인 할머니와 당최 무슨 이야길 할까 싶었다. 카톡으로 소통하는 우리지만, 뼛속 깊이 할머니가 살아온 시대상이 그녀를 관통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는 그냥 따르면 되는 것일 뿐, 이해해야 할 것이란 없었다.
나는 신부대기실에 있기 싫다고 했고, 구두를 신기 싫어했으며, 헬퍼이모를 쓰지 않겠다고 했고, 폐백 예단 예물 함 주례 이바지 등을 모두 생략하고자 했고, 청첩장에 계모의 이름을 빼고자 했고, 흰 드레스를 거부했으며, 아빠와 함께 입장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게 까미가 힘겨워하는, 그리고 주변인들이 아니꼽게 보는 프로불편러가 되었다. 결단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생각과 선호도에 관한 의견과 선택사항에 대한 반응을 했을 뿐인데, 내가 정말 별나게 느껴져야만 했다. 이 문화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이 사회를 만들어냈고, 내게는 이 문화가 당연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라고 가르쳤으면서, 정작 목소리를 내니 싫어했다. 입장할 때 디즈니 음악이 나오길 바랐던 환상은 깨버리고서라도, 내가 원했던 것들은 쿠데타가 요구되지도 않는 간단한 것들이었다. 단지 혼자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드레스와 신랑과 함께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율성 정도였을 뿐이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에 대해서 가르쳤으면서, 정작 아무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결혼은 부부의 연을 맺는 신성한 것인데, 그 안에 속한 나는 수치스러웠기에, 고착화되어 썩어버린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한국 결혼문화에 기꺼이 좀스러운 반기를 들었다. 혼자서는 화장실에 갈 수도, 휘청거리는 머리 장식을 매만질 수도, 사지가 멀쩡한 몸으로 옷을 입고 벗을 수도, 헬퍼이모의 도움이 없이는 자세를 잡을 수도 없었다. 폐백 때도, 시댁 식구들을 내게 소개하는 것만큼 나라고 왜 우리 식구들을 신랑에게 소개할 자리는 없으며, 남자들이 각선미를 돋보이려 기어이 척추를 희생해가며 지미추 웨딩슈즈를 신지 않는데 나라고 왜 그걸 신어야 하며, 남자들은 행동이 자유로운 옷을 입고 자유롭게 다니는데 나라고 왜 신부대기실에서 도축을 기다리는 돼지마냥 묶여 사진을 찍히다가, 바닥이 질질 끌리는 양털 이불보다 무거운 드레스를 밟고 다녀야 하는가.
'너는 메추리알로 바위 같은 케케묵은 역사를 치는 거야'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나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낼 때, 맞는 소리지만 너처럼 시시콜콜 깐깐하게 따지는 인간과는 별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특히 자신의 일이 아닐 때 내게 비웃음과 어이없음의 시선들이 꽂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메추리 알로라도 치지 않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의 역사는 시작이나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나와 세상의 대답이 다른 것은 시대의 시간상에 따른 시차가 가져오는 사고방식의 차이이기 때문이지 정답이 틀려서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렇기에 그들과 같아지길 강제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일말의 영향도 상처도 받지 않기로 했다. 뒤에서 욕을 하든 까다롭다고 하든 프로 불편러라는 이름을 가져다가 붙이든 그런 면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내가 아닌 모양새였다.
청첩장에 단 세 글자 지우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비교적 갈등이 없었던 평화로운 까미네와 달리 우리 집은 결혼에 이르기까지 갈등의 연속이었다. 시대착오적 전통을 하기 싫어하는 별스러운 내게,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해주셨고 뭘 빼든 뭘 생략하든, 너희만 행복하면 그렇게 하라는 분위기였다. 식장에 의자는 그냥 두더라도 청첩장에 계모의 이름을 빼고, 아빠 이름만 넣겠다고 했다. 그 여자를 보지 않은지 근 10년, 난리가 났다. 그 여자를 엄마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데다 아동학대로 신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마 내게 감사해야 할 텐데도, 할머니는 그리고 아빠는 나를 말렸다. 새로 시작하는 날, 매듭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하며, 심지어 그 여자를 설득해 식장에 나타나도록 해보겠다는 발언을 했다. 이 문제로 1년을 넘게 싸웠다. 범죄 피의자가 나의 결혼식에 오게 하겠다니, 이것은 누굴 위한 결혼인가. 그렇게 원하시면 원하시는 분들끼리 다시 식을 올리시고, 나를 그 자리에 초대만 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고, 단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종결시켰다. '그 여자가 내 결혼식장에 나타나면 칼부림 나는 줄 아세요'. 애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수천 번 죽여 마땅한 인간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행사권을 휘두르는 것. 결국 다신 글자로도 보고 싶지 않은 그 세 글자를 내 청첩장에 넣었다. 나는 내가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도, 결혼에 관해서 대화나 소통을 하는 것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주변은 온통 결혼생활이 불행한 사람들뿐이라 내게 결혼에 대해 건넬 조언 따위는 없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래서 드디어 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시작 날, 수십 년만의 매듭을 짓게 되었다.
We are so bound by time, by its order
-컨택트(arrival)
인생에 단 하루뿐인 '웨딩데이'라며 특별감을 심어주고, 여자들의 로망이라며 헛소리를 지껄인다. 그 많은 블로그며 기사며 sns들을 보고 있자면, 없던 로망마저 만들어서 오려 붙여 스크랩이라도 해야 할 심정이다. '인생이 단 한 번'인데 '인생에 단 하루'라는 진부한 멘트로 실적을 올려야 하는 많은 업체들은 주인공은 신부라며, 단 한번 하는 결혼이라며, 헛소리를 최대한 여러 번 지껄여 그것이 사실이라고 심어주려는 광고전략을 사용한다. 결혼식이 가져야 하는 마땅한 의의보다 더 원대한 의미를 두도록 유도한다. 단 한 번의 결혼식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만한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결혼을 한번 할지 두 번할지, 당최 누가 알까.
또한 결혼식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나의 인생의 질을 결정할 것은 웨딩데이 이후의 모든 날들이다. 결혼식뿐만 아니라 이 모든 날들이 우리에겐 단 하루뿐이다. 그래서 일생에 단 한 번 공주 코스프레하는 것도 의미는 있다. 하지만 결혼 그 이후에 공주와 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 만인이 원하는 삶 아닌가. 정녕 출생 신분에 마땅히 해봄직하지 않은 공주놀이를 이때다 싶어서 하는 기회로 삼는 것인가 아님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가상세계에서라도 내가 아닌 인물을 생성해내고 싶은 것인가. 중세시대 대를 잇기 위한 도구로 치장된 인형에 불과했던 공주, 그렇다면 현대판 공주의 정의는 무엇인가. 결혼식의 목적은 후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공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효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때가 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 즉 평생 친구를 만드는 데에 있다.
결혼식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면, 대체 누구에게 그런 기억을 남기고 떠날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지금 장례식을 준비하고 지구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곧 임신해서 퉁퉁 살찐 모습으로 다시 리마인드 될 터이니 애먼 데에 크게 애쓸 필요는 없다. 남들이 봐줄 만 한가 모든 것이 갖춰지고 준비되었는가 완벽한 결혼식인가 내가 원한 결혼식인가 아닌가 질문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남기는 가이다. 막상 현실은 결혼식 날 200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자유롭지 못한 나 자신이 신부대기실 안에 묶여있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화려한 화장, 머리가 뜯길 것 같은 장식, 숨도 쉬어지지 않는 그리고 스스로 걷지도 못 할 드레스를 입은 어색한 내가 상품성을 위해 억지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나의 의견이나 이상, 의무, 심지어 나의 결혼까지 한데 묶어 더욱더 군중들과 같아지려는 노력에 집중하도록 강요되어진다. 대중들은 충분히 상당수가 결혼뿐만 아니라 출산이나 취직까지도 유사해지는 결과에 다다랐지만, 근거 없는 확신으로 인한 두려움이 또 다른 허세를 낳는다. 공포가 낳은 허세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이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을 집어삼킨다. 이 결혼식이 중요한 의의에는 집중하지 않고, 상징성을 띈 절차만 강조한 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혼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인생 또한 성공적으로 마칠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당연히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의 허영심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실수록 갈증을 일으키기에, 현실에서 가망이 없다고 믿는 인간들은 거짓 형상의 늪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낮추는 사람들. 무엇이 '자신의 가상세계'인지도 구분하지 못한다. 결혼식장의 퀄리티, 드레스의 급, 스튜디오 브랜드, 예물의 수준은 관계 결핍 환자들이 계속해서 집착하는 결정적인 것들로서 당사자들의 자존감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게 해 준다. 자기 과시욕, 탐욕, 명예욕, 출세욕으로 가득 차도록 명령받은 억압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이 결핍을 계속해서 대물림한다. 필시 원래 좋은 의미를 지녔던 부조는 그러한 체면 중시 사회환경 속에서 완전하게 퇴색되어, 빚 거래 문화로 변질되었다.
나로 가득 찼던 인생을 어떻게 우리라는 일상으로 조화롭게 가꿀지 준비해야 하는 결혼식이, 허영심의 늪에 본질을 잃고 허우적댄다. 인테리어 가구 하나 배치할 때만큼의 분석력과 정성을, 내 평생 친구가 될 사람과 그 사람의 세계가 가져올 변화에 쏟지 못한다. '한 번뿐인' 결혼식에 시간을 지나치게 허비한다. 허영심에 상처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결혼은 무덤이라며, 너도 이제 끝이라며 너도 나처럼 생채기를 내라고 강요할 때, 이것은 체면이나 수금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결혼은 연애의 종착지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삶에서 연애를 오랫동안 지속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대개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더 자극적인 기쁨은 없지만, 보여주고 비교할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린 보다 더 당사자들의 관계에 집중할 것이다. 우리는 수영을 배우려면 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사랑 베풀기를 그리고 인생을 배우기 위해 결혼을 한다. 직접 몸을 던져 체험한 것만이 나의 것이 되듯이, 누구의 결혼식, 누구의 드레스, 누구의 신혼집, 누구의 남편, 누구의 예물, 누구의 신혼여행이 얘기할 가치 거리나 있는 대상인지 모르겠다. 사랑과 결혼은 결국 영화 속 낭만적 스토리라인을 현실 속 불확실 전개로 이어나가는 것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결혼식에 필요한 것은 발 빠르게 얻는 웨딩홀 정보가 아니라, 함께라는 생활에 자양분이 될 의논하고 토론하는 능력이고, 가부장적이고 일방적인 주례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배경에 따른 이해력과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며, 신중을 기해 고른 예물이 아니라 신중을 기해 한 발씩 맞춰나가는 우리의 가치관이다. 서로를 높여주며 내 마음을 낮게 하는 자세를 일관성 있게 준비하는 것, 그게 바로 결혼 준비다. 결혼 전 인생에 우여곡절이 많듯, 결혼 후의 인생도 파란만장하고 그 전이나 후, 모두 자유이며 행복이어야 한다. 쓰라린 감정의 쓰나미, 얼굴 근육만으로 전달하는 비언어적 소통,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소름 돋는 텔레파시, 무언가를 봄으로써 일어나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함께 나누는 법을 익히는 것이 바로 결혼 생활의 본질이다. 결혼 후의 날들을, 결혼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결혼식 때 골라야 하는 수많은 목록보다도 높게 쳐주는 날이 오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우리가 함께 행하는 일들의 가치를 소비나 체면보다 더 곱씹었을 때, 결혼은 진정 미친 짓이나 무덤이 아닌 날들로 보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