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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D Oct 24. 2021

외국 살아서 행복 좀 하십니까

니가 어디 사는지 보다 중요한 것은 니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

-기름방울과 물방울


남아야 할 이유보다 떠나야 할 이유가 더 클 때. 이민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타이밍과 노력, 에너지, 경제적 투자, 운이 모두 맞물려야 할 수 있다는 게 바로 타향살이, 그리고 영주권.

현실주의자에 비관적인 내게 삶은 언제나 꽤 무겁고 버거웠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캐묻곤 했고, 사회 시스템에 의문을 가지곤 했다. 국가는 어떻게 애국심을 심어주며, 보통 시민에게 요구되어지는 보이지 않는 역할들은 무엇인지, 시대를 잘 타고난다는 말을 과연 일리가 있는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어렸을 적부터 다녔던 해외여행은 어떤 허황된 꿈을 심어준 것도 같다. 언젠간 이 좁은 땅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살 수도 있겠구나.


단미 "나 1등 했어"

아빠 "니네 학교에서 1등 한 건 소용없어, 전 세계에서 니 또래애들과 경쟁해야지"

경쟁과 비교에 아주 익숙한 나란 인간은 인정과 끄덕거림에 늘 꼬여있었지만, 딱히 바꿀 용기는 없었다. 목이 아무리 말라도 우물을 파기에는 난 충분히 소심하니까. 한국이라는 나라는 높은 교육의 기회와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주었고, 또한 기름과 물방울처럼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나 자신도 알게 해 줬다. 나는 그 안의 구성원이라기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나를 구경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나를 탐구하는 데에 20대의 8할을 소모했다. 가끔 내게는 작은 한국이 더 작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나의 가족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는 그곳을 떠나서 살아본다는 것은 본디 내가 가진 천성, 만들어진 성격, 가치관과도 부합해야 하는 일이었다. 눈치 빠른 행동, 뛰어난 적응성, 빠른 역할 스캔은 사회에서 습득한 후천적인 훈련의 결과였다. 그렇지만 아닌 것을 맞다고 하지 못하고, 내가 몸 담아져야만 하는 소속감을 싫어하고, 반면에 물음표는 참 많았다.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고, 다른 이들을 의식해서 행동해야만 하는 때에도 타인의 시선에 따라 행동하는 법이 드물었다. 위계질서나 성별에 따른 호칭으로 불리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의미가 없는 무늬만 있는 관계는 만들지 않았다. 26년간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나의 최적화 과정은 어느 정도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패한 적응성이 외국살이에 미치는 영향을 하나로만 요약하자면, 향수병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살던 때, 남편 까미는 종종 내게 '사회 부적응자'라며 농담 같은 진담을 중얼거리곤 했다. 당연히 유쾌하지 않으나,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어서 주제넘게 탓할 거리들을 발굴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유치원을 오래전에 졸업해버린 나는 내가 쉽사리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민한 촉각들의 문제는 타인에게는 해가 되지 못했지만, 내게는 치명적인 해가 되었다.

[사회 부적응자 - 사회 구성원으로서 적절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고립된 사람]


웃기게도,

사회에 잘 동화되지 못하는 동시에 나는 무리 속에 잘 스며들었고, 때때로 리더 역할도 했으며, 일머리가 있다며 예쁨을 받았고, 심지어 붙임성이 좋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적응하는 나와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모두 다 나였다. 그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며 가지가 쳐지지 않는 나무를 자꾸 크게만 키워나갔다.

장르를 불문하고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우리 사회는 내가 평생을 적응하기에도 너무 어려워 보였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게 될 때, 점점 나는 자의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나이가 들수록 너도 남들처럼 생각하라고 혹은 남의 눈치 좀 보라고 눈치 빠른 내게 눈치를 주는 것만 같았다. 다수의 의견에 지지보다 먼저 의문감을 자주 품는 나였기에, 소수의 의견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부적응자라는 타이틀이 내게 어울리는 수식어라고 생각했다. '왜'라는 질문을 당연하고 편안하게 받아주지 않는 사회의 모습은 내가 뒤틀린 인간이라고 여기기가 쉬웠다. 관습에 의한 선택을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나는 방황했다.


영어, 운동, 여행, 악기, 주식, 맛집 탐방, 사진, 캠핑. 매년 사람들은 부지런히 목표지향적인 새해 계획을 작년처럼 세운다. 한국사람만큼 몸 관리와 자기 계발에 힘쓰는 민족은 흔하지 않다. 그에 반해 한국인만큼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민족도 드물다. 서른이 넘어서 갑자기 직종을 바꾸면 무덤을 파는 거고, 제대로 갖춰진 가정에서 크지 않은 애들은 만나는 게 아니고, 그건 알바지 직업이 아니니 평생 해 먹고살 수는 없는 거고, 나이 든 사람이 당연히 지갑을 열어야 한다. 자기 계발에 힘쓰는 불행한 한국인으로서는, 너무 흔한 사회의 마땅한 이야기들이 나를 배제한 채 돌아다닌다. 그렇게 우리는 별 관심도 없는 상대에게 친절을 가장한 훈수를 둔다. 이제 그냥 그만두고 주저앉고 싶은 내게 일단 시작을 했으면 무라도 베라고 한다. 포기를 용납하지 않는 말들은 대개 한국 사회에서 박수받아 마땅한 습성들이다. 무를 베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무를 베면 열등감이 올라온다. 그렇다고 무라도 베지 않으면 내게 따라붙는 분노, 우울, 낮아진 자존감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중간한 시도도, 어중간한 성공도, 그렇다고 포기도 오지선다에는 없다. 우리에겐 항상 준비된 핑계가 인정보다도 먼저 필요하다.


가면을 쓰고, 입과 생각을 제한하고, 애써 분위기 파악을 해가며, 남들과 발맞추어 성공을 꿈꾸며, 좋은 대학을 나오고 갖가지 스펙을 쌓고 인턴을 하고 가족의 부응에 사회의 부응에 한껏 임했다. 친구들은 날 부러워했고 가족들은 날 대견해했다. 하지만 대기업을 다니며 대학원을 다니던 나는 모든 걸 그만두었다. 무심코 한 결정처럼 보였지만 그 반대였다. 태어나서 가정과 학교, 여러 회사를 거쳐 사회에 결국은 길들여지지 않은 나는 내가 쥐었던 것을 내려놓았다. 나의 직업이 어떤 일인지 내 명함 속 직업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했다. 나에게는 한 번인 일생에서 완성해 나가는 것은 연봉이나 명예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해 보이던 삶의 살던 카드를 반납하고, 나라는 사람답게 사는 삶이라는 카드와 맞바꾸기로 했다. 지인들은 외국에서 살면 행복하냐고, 부럽다고들 한다. 선택의 문제. 외국에 살아도 불행을 선택할 수 있고, 한국에 살아도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좋다는 감정은 주관적이다. 내게 감동적인 영화는 누구에게는 최악의 영화일 수 있다. 특히 26살의 나와 31살의 나는 생각과 사고의 회로 자체가 다르다. 26살의 나에게 중요했던 요소들이 서른 살의 내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나이에 따라 변한 가치관들도 마치 내가 대륙을 이동해 느낀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한국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지금의 나이와 기준으로 한국에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급의 질문에는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나이고 싶어


우선순위의 변화는 이러했다.

10대 - 상위권 대학, 멋진 몸매, 예쁜 얼굴

20대 - 높은 연봉과 이름만 대면 아는 직장, 남들보다 빠른 성취, 행복한 연애

30대 - 싫어하는 일 하지 않기, 건강, 즐겁게 살기, 하고 싶은 일에 마음껏 도전하기


이것은 나이의 성숙도와 이민이 만든 합작이다. 달려가는 삶은 폴짝폴짝 뛰는 삶이 되었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끊임없이 되뇌이던 나는 이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외국에서 살면 다들 여유가 많아 보여서 좋다고, 여유 있는 삶을 위해 이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부지런함을 빼면 소위 시체인 한국인들은 상당수가 어딜 가도 개미처럼 근면 성실하게 뼈를 갈아 넣을 만큼 일만 하다가 노인이 된다. 모든 변화와 도전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느긋하고 넉넉한 생활이 되기도, 고국이 그리워 욕하며 또다시 비교하다 매일 후회하기도 한다.


삶과 나의 사고 회로가 참 천천히 흐른다. 아침이 되면 새들이 시끄럽고 울어대고, 밤이면 포썸이 싸우는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만큼 온통 고요하다. 비는 내게 수분감과 멜랑꼴리를 선사하니 좀 맞아도 괜찮다. 예상치 못하게 시간을 좀 날려도 괜찮다. 그래 봤자 내 인생 시계에 몇 초일뿐이다. 은행에 헛걸음질을 해도 나온 김에 제 철을 맞은 과일이나 사는 셈 친다. 서비스도 인터넷도 참 느긋하다. 음식 배달에 1시간이 걸려도 뭐 어떠랴, 2시간은 안됐으니까. 바람이 대차게 불거나 비가 많이 와서 인터넷이 안되면 책이나 읽으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책을 편다. 죽고 사는 일이 아니면 그다지 화까지 낼 만한 급하고 중요한 일은 별로 없다. 인터넷 배송은 오기만 하면 되지 언제 오는 게 중요하지 않고, 3일 전에 시킨 와인이 벌써 온 것을 보고 준비되지 않은 감동을 받는다.

하늘 색깔, 커피 향, 드라이브, 애틋함을 느끼게 하는 가족과의 거리감, 흩뿌린 물감 같은 풀꽃. 복불복이었던 음식의 성공. 사소한 것에 더 자주 기민하게 집중하게 된다. 화내기 스킬 만랩을 찍었던 나는 아직도 일을 할 때면 욱하지만, 몇 초만에 냉각시킬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보내 줄 사진을 찍고, 중고샵에서 영혼의 짝이 될 부츠를 얻고, 당나귀 똥을 파는 농장 옆에서 체리를 왕창 사고, 집 앞에 새로 둥지를 튼 새들을 좀 쳐다보다가, 벌써 날이 더운지 아파트 수영장에 나와 뛰어노는 애들을 구경한다. 매주 가는 공원에는 사실 수십 마리의 강아지들을 보고 싶어 가는 것임에도 비타민D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입 밖으로 내본다. 그렇게 그저 그런 날들이 이어진다. 빠른 속도와 무한경쟁이 가득했던 내 머리 안에는 어느 순간 온전히 나답게 사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나답게 사는 것에 룰은 없다. 내가 선호했던 선택집중적 관계 맺기는 나를 오히려 따뜻하고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아무도 내가 얼마나 잘, 어떻게 사는지 재단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행동과 질문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나의 여전했던 의문과 질문은 대화의 물꼬를 트는 최고의 방법으로 통했다. 너는 너, 나는 나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고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부적응한 인간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내가 삶을 대하는 방식, 나의 성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사한데,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유사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일단 나는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틈, 개인적인 여유를 많이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염세적인 나에게 밝은 부분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딜 가든 발길이 닿는 곳은 자연이 푸르른 공원이라던지, 휴가를 한 달 동안 갈 수 있다던지, 도움을 요청하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책임전가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던지, 지천에 와이너리가 널려있다던지, 내 월급으로 커다란 창이 딸린 수영장뷰 집을 무리 없이 렌트할 수 있다던지, 매너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분위기라던지, 엉뚱한 생각도 의견으로 받아준다던지, 버스에서 늦게 내려도 아무도 뭐라고 소리치지 않는다던지, 나이로 재단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던지, 1년에 두 번은 해외여행을 갈 수 있다던지, 이런 별 것 아닌 것 같은 별 것들이 누려 마땅한 것들이 되었을 때 나라는 인격체와 사회의 괴리감이 언제 부조화를 이뤘었던 것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긍정적인 나의 모습이 사회에 보다 잘 어울려 보고자 썼던 가식의 가면이었다면, 지금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기꺼이 누려도 되는 많은 것들에 사회의 기능이 개인에게 주는 영향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중이다.


단미 "내가 한 4년 전에 아무 꿈도 희망도 없다고,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고 한 거 기억나?"

까미 "어 기억나. 그냥 산다고 했지"

단미 "여기 살면서 뭐가 가장 다른 것 같냐면.... 아무리 노력해도 발이 푹푹 빠지는 곳이 한국이라면, 게으르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진전이 가능한 곳이 여기인 것 같다는 거야"

까미 "그건 나도 완전 동의해"


살다보니 너무 숨이 차서 조금 덜 노력하고 싶을 때, 그럼에도 지금껏 성실하게 살았으니까 조금 더 쉽게 인정받고 싶을 때,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분위기가 괜찮다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해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필요했던 것은 좋은 직장, 연봉이나 직함, 명예나 그것들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닌 그저 오로지 나로 존재했을 때의 인정이 아니었을까. 너는 그것밖에 못하는 애지만, 그래 이 사회에는 너 같은 애도 꼭 필요해라는 인정. 한국에서 내게 하나뿐이었던 슈퍼마리오의 목숨은 여기서 동전을 넣는 만큼 늘어났다. 그렇게 패자부활전이 아무렇지 않게 누구에게나 용납되었다. 여러 번 추락해도 그럴 수 있다, 도전하는 삶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고진감래를 믿지 않는다. 죽을 만큼 열심히 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 나는 이제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더 높은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우울하지 않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과정이 내 삶이니까. 나에게는 여러 번의 목숨버섯이 있으니까. 내가 삶에 마구 욱여넣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나에게 맞춘다.



-좋은 게 좋은 거니


수도권에 2600만 명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지만, 여긴 호주 대륙 전체의 인구가 2600만 명이다. 이 말인즉슨, 보다 직장과 가까운 곳에서 질 높은 삶이 가능하다는 뜻이고,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가히 치명적인 확률로 줄어든다는 뜻이다. 인건비가 비싼 만큼 사람을 사람대접하게 된다. Respect면 존중인 줄 알았지, 마음속 깊이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존중이란 것은 이론이나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니었고, 시나 문학 소재로 쓰는 감동 소재도 아니었으며, 래퍼들의 노래 소재도 아니었다. 사회 전반적인 상식에서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아주 오래된 문화 기반 전체에서 내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는 처우 혹은 받아들임 같은 것이었다. 타인을 존중하며, 나는 존중받으며 산다. 이렇게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에게 사람은 필수이지만, 또 가끔은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아이러니함을 우린 느낀다. 필요 이상의 간섭과 참견이 나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생활. 내가 내 목소리를 냄과 동시에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삶은, 살아봐야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다. 마치 내가 원할 때 사회로부터의 자가격리를 실천할 수 있는 인생이랄까. 아무도 나를 타박하지 않을 때조차, 내가 내게 했던 수많은 쓴소리들. 내 생각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는 사람들과의 자율성 높은 심리적 존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내게 당연한 것은 거의 하나도 없었는데 그들에게 당연한 것은 무수히도 많았다. 그래서 호주라는 땅, norm에서의 해방은 눈이 안 보이는 내게 안경의 발명과도 같았다. 호구조사, 성차별, 부조리, 비리, 인권침해, 경쟁, 회식, 상명하복, 은근한 폭력, 제왕적 권력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었고, 불행하게도 난 잘 굽히지 못했다. 다만 거기에 반응하는 내 태도만이 따박따박 평가받고 있을 뿐이었다. 많은 이가 내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 말은 비겁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들렸다. 때때로 내가 갑의 위치에 있을 수 있었을 때면, 삶이 편한 것과 별개로 내게는 질문만 늘어갔다. 제삼자 말에 따르면 '바보처럼' 종종 기회를 발로 차 버리기도 했다. 그냥,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이유로. 내 안에 어떤 윤리와 양심과 제멋대로 사고할 줄 아는 자아가 있었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은 열정보다는 두려움이었다. 성공하고 싶은 열정은 산산조각 나버린 지 오래인데, 나의 진심과 내면까지 부정당하는 것은 두려웠다.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다른 나라가 아닌 우주로 가도 너는 여전히 이상하고 별난 애고 평생 절대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으니까.


단미 "내가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진짜 두려웠거든.... 내가 너무 하고 싶던 공부였으니까"

까미 "그때 내가 엄청 말렸잖아, 그냥 끝까지 버티라고"

단미 "내가 뭐 시작했을 때, 끝을 안 보고 중간에 그만두는 거 본 적 없지?"

까미 "자기는 진짜 끝장을 보지... 처음 봤어, 그런 모습"

단미 "잘했다 싶어. 겨우 학벌과 더 나은 직업을 위해 날 버리면 안 되었어. 그 버러지 같은 교수와 같은 급의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어 진심으로"


여기서도 거기서도 난 대접받을 가치가 마뜩잖은 인간이지만, 언젠가는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평범한 인간이다. 토익점수를 내고 이력서를 그득그득 채우며 24시간이 모자라게 살던 나는 어디에서도 언제든 교체될 대체품임을 모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주 보잘것없는 진심 담은 말 한마디조차 아꼈다. 

그래서 내게 Somebody에서 Nobody가 되는 것은 예상보다 유쾌했다. 어차피 지구에서 우리는 모두 Nobody이고, 우주의 시간 개념 속에서 우리 생은 겨우 몇 초쯤 살다 죽을 뿐이다. 나보다 불행해 보이던 누군가와 비교하고 상대적 우월감과 행복을 얌체같이 챙기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웠다. 호주에서 이방인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나는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다. 누군가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더라도 나는 나를 인정할 수 있었고 스스로 대접할 수 있었다. 아주 하찮은 진심에도 당최 느껴본 적 없는 사람대접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 간의 관계에 궁합이 있듯이 이민에도 궁합이 있다. 온통 미래에 대한 걱정과 온몸을 휘감고 있는 불안감이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찾기가 힘들어졌다. 가파른 불안 곡선은 극적으로 하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나의 역치는 얼만큼 올랐는지 감이 없다. 나의 공허함을 메워주기 위해 존재하던 쇼핑과 sns, 맛집탐방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 친구가 일하는 카페에서의 무료 커피, 시티에서 새로 하는 전시회, 마켓에서 산 싱싱한 재료들로 한 요리와 곁들이는 와인과 웃음기 가득한 대화, 가끔 초대받아 가는 친구들과의 회포, 따뜻한 침대 위에 앉아서 보는 영화 감상이면 충분하다. 남들이 쉬는 멜번컵, 크리스마스, 설날, 이스터는 나도 쉬고 싶다. 2배가 넘는 봉급은 포기하고 경주마에 돈을 걸고, 3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에 있는 축제에 가서 놀고 싶다. 위스키 공장에서 내가 원하는 위스키를 만들어 선물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될까 생각하던 시간들이 어떻게 하면 최대한 재미나게 살 수 있을까로 물들게 되면 이민과의 궁합은 좋아진다. 


단미 "영주권이 없는데 이상하게 불안하지가 않아"

까미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단미 "자기 원래는 엄~청 걱정 많이 하는 스타일이잖아"

까미 "한국에 있을 때 진짜 심했지. 슬럼프도 크게 왔잖아. 미래가 너무 걱정됐어"

단미 "그럼 지금은 걱정이 안 돼?"

까미 "응, 별로 걱정이 없는데?"


한국과 호주는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막연함이다. 그때도 지금도 미래를 알 수가 없는데, 그때는 힘들었고 지금은 힘들지 않다. 그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지금은 받아들여진다. 그때는 유난한 사람 취급을 받았고, 지금은 보통사람이다. 그때는 나를 제한했고, 지금은 내가 자유롭다. 그때는 내가 날 싫어했고, 지금은 내가 날 사랑한다.

오히려 나이가 어렸을 때에는 되려 나이라는 숫자에 얽매여 매일을 전전긍긍, 그 나이가 쏜살같이 날 배신이라도 할까 봐 초조해했다. 나는 아직 무지하고 어리숙한데, 남들은 다 아는 정답을 나만 모르고 사회에서 뒤처질까 봐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과의 레이스가 아니었는데, 사회가 더 빨리 위로 오르라고 1등을 하라고 가르쳤다. 삶이 불행한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소재로 삼고 또 비교하고, 거대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보여주기 식의 삶을 반드시 세습하고 싶어 했기에, 이것은 아주 효과적으로 사회에 자리 잡았다. 나는 친구보다 사촌보다 '누구'보다 잘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사촌이 땅을 사면 진심으로 기쁠 것이고, 나보다 내 친구의 인생이 순탄하기를 기도한다. 내가 내게 말한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은 만큼 더 도전해도 된다고. 앞으로 가기 싫으면 때로는 뒤로 가도 된다고. Get out of your comfort 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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