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D Oct 24. 2021

안녕, 나의 어린 날

호들갑도 이젠 돈 주고 사고 싶은 시시한 어른이 된 나에게

-동심을 찾아서


신기한 일이다. 서점을 들어가 전 세계 베스트셀러를 장식하고 있는 책들을 쭈욱 훑어보면 "어떠해지는 법"을 부단히도 알려주려고 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부자가 되는 법, 나를 내려놓는 법, 새로운 시작을 하는 법, 홀로서는 법, 인생 즐기는 법, 스스로 위로하는 법. 그런 법들만 장착해서 될 것만 같으면 계속해서 같은 종류의 것들이 쏟아져 나올 이유도 없다. 이런 책들의 목적은 더 나은 내일이라는 희망바라기 인간들을 위해 바로 행복해지는 법을 찾는 것.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아기돼지 삼형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그리스 로마 신화 혹은 해리포터까지 그 어떤 책도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책은 없었다. 그것들은 나의 맞춤법 교정과 상상력의 확장과 게임을 대신해 어른들이 인정할 건강한 취미생활일 뿐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어른이 된 나는 지금 자성처럼 그러한 베스트셀러 코너부터 손을 뻗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왜 어른들은 이렇게 손에 뭔가 쥐는 법에 '집착'하는 걸까? 행복이라는 무형물은 어른들이 모두가 최종적으로 쫓아야 하는 절대적 목표인 걸까? 어른들은 정녕 행복해지는 법과 재밌어지는 법을 글자로 가르쳐주어야만 하는 걸까?


요 근래 내 최대 관심사는 '나는 왜 옛날만큼 사소한 것에 동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사소한 것이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어릴 적에는 다음 날 소풍 갈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쳤고, 삘이 꽂히는 음악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동동거렸으며, 생일 선물로 받은 운동화를 쳐다만 봐도 들떠서 일주일 내내 즐거웠으며, 아파트 단지 내에 나만 알고 있는 아지트에 무언가를 모아다 두는 것이 즐거웠다. 사소한 것에 크게 기뻐했지만, 아주 쉽게 토라졌던 그때의 감정을 지금은 소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플라스틱 공들이 가득 채워진 곳에서 몇 시간이고 노는 아이들을 보면 지금은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플라스틱 공들이 저절로 변신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하루 종일 저곳에서 나오기가 그토록 싫었는지 참 모를 일이다. 플라스틱 공 밭을 졸업한 지 고작 20년밖에 되지 않은 세월 동안,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지금의 나,

아무리 비싼 옷을 사도, 아무리 비싼 밥을 먹어도, 갖고 싶던 휴대폰을 새로 사도, 다음 날 피크닉은커녕 한국을 간다고 해도 설렌다는 기분은 참혹스럽게도 반나절을 지속하지 못했다. 무슨 옷을 입은들 비리비리한 가죽 껍데기에 비단을 두른다고 개가 호랑이가 될 리 없고, 새로운 땅으로 데려다주는 비행기는 연착이라는 소식만 없었으면 싶었다. 분명 나도 저 색색깔 공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징징대던 시절이 있었고, 산타할아버지에게 짱딱지세트를 받겠다고 매일 밤 간절히 기도했던 시절이 있었으며, 모래나 뒤집어쓰려고 집에 가지 않겠다고 시위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다. 여름이면 물놀이하느라 겨울이면 눈밭에서 구르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느라 며칠이 지나갔다. 물론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나는 왜 동심을 잃게 되었을까, 왜 동심을 지키지 못했을까. 그게 동심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아니면 단지 인간의 보편적인 발달 상황에 대한 의구심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의 인생 최대 행복감을 선사해준 물건들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5살 - 플라스틱 통키 인형

8살 - 앞바퀴에 불이 들어오는 킥보드

10살 - 플레이스테이션

14살 - mp3

20살 - 아이폰

24살 - 차


이것들은 24살을 기점으로 끊겨버렸는데, 마치 나의 동심은 여기에서 절단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책을 다 읽지 않았는데, 누군가 내 책을 다음장으로 넘겨버렸다. 삶을 이어나가기가 꽤나 무거워져 버리는 한계점에 도달한 것을 감지한 것은, 아무도 언제쯤 다음장으로 넘길 것이라고 예고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인간은 일정 시간이 지나 신체적 정신적 발육 상황이 일정 기간에 다다르면 후대를 양육해야 하고, 아마 그러한 목적을 위해 나에게서 동심을 빼앗지 않았나 싶었다. 인간이 동심을 유지한 채, 자손과 뒷날에 관심이 없다면 종족 보존이 어렵고 경쟁력이 약해진 인류는 생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간혹 동심을 유지한 채 생존한 어른들은 역시 후손을 양성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동심 어린 인류는 계속해서 후손을 배출하지 않는 유전자를 대물림하다 결국 그들의 유전자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들의 부산물이라 합당한 나이와 시기에 동심을 잃은 것은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5살, 나를 몇 년 동안이나 기쁘게 해 줬던 플라스틱 통키 인형의 값은, 20살, 나를 몇 달밖에 기쁘게 해주지 못했던 아이폰에 비해 현저히 저렴한 값이었다. 나는 내가 세월의 배에 승선한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그때의 기쁜 감정을 불러오기 위한 쓸데없는 소비에 자주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천 원짜리 인형에 헤헤거리며 웃다가도 인형의 발에 있는 빨간 실이 마음에 안 든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곤 하는 감정의 널뛰기 속에서 헤어 나올 줄을 모른다. 그에 반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어느 것에도 지나치게 큰 즐거움을 느끼지도 지나치게 큰 상실감을 느끼지도 않는 소프트웨어를 조금씩 안정적으로 업그레이드해 나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밤을 꼴딱 새워서 하던 컴퓨터 게임들은 당연히 어른이 되면 더 재미있을 줄 알았다. 어른들은 아이템도 마음껏 살 수 있고, 누가 컴퓨터를 끄라고 하지도 않고, 컴퓨터 코드가 뽑히지도 않을 테니 진짜 천국일 것 같다고 생각했더랬다. 지금 와서 다시 그때의 감정을 느껴보려 같은 게임을 깔아보아도 재미가 없다. 눈은 시큰거리고, 어깨는 뻐근하고, 버튼은 복잡하고 효과는 화려하고, 니가 초딩이냐는 참견은 무시하고서라도 갑자기 내야 하는 공과금이 생각났으며, 저녁엔 뭘 먹지, 다음 주에 부부모임은 하나, 내일 날씨는 비가 온댔나, 메일 답장 보내야지 하고 있는 집중력이 초딩이 아닌 내가 있다. 온통 이 행위 자체가 시간 낭비와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데다가 차라리 잠을 더 자는 게 남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뿐이다. 너무 씁쓸하고 안타깝고 다시금 조금은 멜랑꼴리한 감정이 날 휩싸고 돈다. 늘 그렇듯 나의 이런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까미에게 나누어 보았다.


단미 "나는 요즘 뭐도 큰 재미가 없어, 우울한 건 아닌데... 그냥 인생이 좀 시시하다는 걸 알아버린 것 같아"

까미 "취미 생활을 찾아봐"

단미 "알아, 자기가 낚시며 볼링이며 캠핑이며 이것저것 기웃거리면서 찾아보는 거...

근데 그거 알아? 자기가 찾는 것은 어쩌면 지금 당장의 재미나 취미 생활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그 감정일지도 몰라... 왜 그거 알지? 어른들이 파라솔을 치고서 막 과일이며 뭔갈 분주하게 준비하고, 난 미친 듯이 설레고, 알록달록 돌로 가득 찬 물속에서 뭔가를 찾다가 사촌들이랑 첨벙 대면서 놀다가. 갑자기 집에 가자고 할까 봐 조마조마한 그 기분 말이야"

까미 "으음... 맞아 진짜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해. 그 느낌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 사실 요즘 좀 그리워. 어렸을 때가 생각나"

단미 "우리는 어릴 때 두근대던 그 기분을 지금 찾고 싶어서 방황하는 30대 같아. 근데 기억나지? 막상 재밌을 줄 알고 에버랜드에 갔더니 예전의 그 느낌이 아니었잖아, 그래서 실망했잖아. 이제 그런 거야"


매년 연간회원권을 끊어서 제 집처럼 드나들던 에버랜드는 20대가 되자마자 신기하게도 나를 동심의 세계에서 내쫓았다. 주차하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어딜 가든 사람들로 북적였고, 터무니없이 비싼 음식값이 맞이했고, 우리에 갇혀 우리의 시선을 받는 동물들이 불쌍했고, 머리띠에 반짝이를 갖다 붙이고 근거 없는 돈을 받았으며, 현실이 공포인데 돈 주고 스릴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가 아이러니했으며, 퍼레이드를 하는 사람들의 시급 따위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내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놀이공원에서 그리도 신명 나게 놀아댔는지, 나라는 인간이 과거와 같은 사람이 맞긴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에버랜드라는 공간은 내게 그저 내숭을 조금 떨 수 있는 데이트 공간으로 변모했을 뿐이었다.

해마다 방문해도 너무너무 재미나서 난 아예 스키장에서 살고 싶었다. 열 살 무렵, 나의 겨울 점퍼의 후크에 걸려있던 스키장 티켓이 아쉬워서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뒤에도 오래도록 떼지 않았다. 나는 자랐고, 스키장의 코스도 이름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세월의 악마에게 동심을 빼앗긴 나는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스키장의 시즌권은 미친 듯이 비쌌고, 사람으로 미친 듯이 북적댔고, 생각보다 코스는 짧고 대기줄은 길었고, 밤새서 타고 싶을 만큼 체력은 없었으며 수족냉증을 감수할 만큼의 재미는 없었고, 장갑이며 모자를 말리는 게 귀찮아졌다. 이렇게 긴 줄을 온종일 기다릴 바에야 돈을 더 내고 패스트트랙을 개설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린 날에는 이 기다리는 시간 순간순간이 따분함과 동시에 비례하는 즐거움과 설렘이었다면, 나이가 들어가는 날에는 자본으로 시간을 사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임을 뜻했다. 동심을 빼앗아가면서 내게 남은 잔재는 인간에게 시간이란 유한한 것이라는 깨달음이었기 때문이다.



-200만 원으로도 살 수 없는 200원짜리 감정


내가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내게서 동심을 앗아간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8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대학교까지 마치게 된다면 23살까지 학교라는 공간에 속하게 된다. 아주 오랜 기간을 공식적으로 학교의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주는 소속감은 실로 사회에 나와보면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학생들은 크고 작은 집단을 형성하며 어른들에 대항해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대항해 온갖 사건과 시기들을 함께 겪고 추억들을 만들어내곤 하는데, 그건 때로는 웃기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지만 학생이라는 타이틀 아래에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학생이라는 것은 내가 몇 학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얻게 되는 나의 증명서이며,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주어진다. 아무 노력을 하지 않고, 특별한 조건도 필요 없지만, 새 학기 3월이 되면 나와 내 친구들은 다 함께 동시에 다음 레벨로 진입한다. 우리는 한동안 엇비슷한 딜레마를 경험하는 같은 서버에 존재하는 유대감 깊은 유저가 된다. 내가 이후에 다시 대학원에 입학해보았는데, 이전에 한 번 잃어버린 동심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약삭빠르고 사회 물이 들어버린 뾰족하고 영리한 대학원생들에게서 동심의 조각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동심의 반대말이 있다면, 학생이라는 타이틀의 졸업과도 맥을 같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동심을 잃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른이 되는지 도무지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짧은 인생의 관찰 속에서 나는 주름진 무늬 안에 아직 아이의 마음으로 둘러싸인 채 아기처럼 구는 수많은 나이 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혹자는 말한다. '나이는 성숙할 수 있었던 기회의 수를 나타낼 뿐, 기회를 잡지 못하면 그저 지나칠 뿐이다'라고. 술은 농도에 맞게 발효가 되어야 하고, 년수에 맞게 숙성되어야 한다. 인간도 자신의 때에 맞게 숙성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동심을 간직한 것처럼 보이는 떫고 밍밍한 겉늙은 꼰대가 된다. 마음속에 마트에서 파는 싸구려 장난감을 품은 채, 어른이 된 줄 착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혼란을 느낀다. 동심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이미 틀렸다. 그럼 나는 언제 어른이 될까.


90년대생이라면 공감할 짤을 지나치지 못하고 여지없이 눌러본다. 학교 앞에서 팔던 금방 죽었던 병아리, 지방마다 부르는 방법이 다르던 데덴찌와 뽑기, 경찰과 도둑, 땅따먹기, 불량식품이 몇 알씩 나오던 오락기기, 무겁게 해야 잘 된다며 속을 더 집어넣었던 공기알, 반에 한 두 명씩 가져오던 제티, 스티커 뽑으려고 먹던 포켓몬 빵, 반장이 되면 돌리던 롯데리아 햄버거, 수업시간에 몰래 먹다가 소리가 나버린 휘파람 사탕.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 모든 시간이 지나가버린 뒤에는 다신 느껴보지 못할 감정이라고. 지금은 마음껏 제티를 사고 쫀드기를 사서 구워 먹고, 땅따먹기를 해도 재미가 없다. 어른들은 내게 맛있는 것을 잔뜩 사주기 위해 일을 나가며 돈을 번다고 말해주었었고, 돈이 많아지기 위해 어른들은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였다. 200원을 벌기 위해 아빠 구두를 열심히 닦고, 슈퍼로 심부름을 갔었다. 200원밖에 없던 그때 느꼈던 감정은 지금은 200만 원이 있어도 느낄 수가 없다. 인생의 시기를 불문하고 돈이 많으면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꼭 그렇지 않은가 보다.

부모의 절절한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애송이는 지오디의 어머님께를 틀면 초등학생의 내가 소환된다. 브라운 아이즈의 점점을 틀면 이별의 슬픔이, 가슴 아린 느낌이 뭔지도 모르는 중학생인 내가 소환된다. 음악은 가장 빠르게 과거로 도달하는 타임머신이다. 14살의 내가 생생하게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4D로 느껴진다. 우리 동네의 풍경, 주고받던 문자 내용, mp3 브랜드, 교복에서 나는 냄새, 당시의 걱정까지. 10대에 듣는 노래는 나머지 인생 동안 듣는 노래보다 훨씬 강렬해서 평생 뇌리에 남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어느새 새롭게 찾아 듣는 노래보다 나의 10대를 영위했던 노래들을 다시금 찾는다. 현실에서 받은 상처도 과거의 노래를 통해 위로받는다.


30대로 흘러가면 갈수록 또 다른 충격을 맛볼 수 있었다. 태초부터 신이 있다고 믿었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 신은 배신이었는데 그걸 믿는 너도 참 순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사랑해마지 않았던 나의 신은 예고도 없이 구겨져버렸다. 그건 바로 나의 디즈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었다.

나는 일요일 아침 8시에 방영하는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며 자랐고, 신데렐라 인어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피노키오 피터팬 등등 온갖 시리즈를 섭렵하며 디즈니에 푹 빠져 지냈다. 디즈니가 사용하는 화려한 색감, 캐릭터들이 입는 옷, 휘황찬란한 배경, 재미난 스토리와 노래까지 나는 거의 디즈니라는 종교에 홀렸다. 초등학생 때 처음 간 디즈니월드에서 (가짜)미키의 사인을 받았고, 팅커벨 목걸이를 사지 못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그렇게 맹목적인 사랑으로 20년이 지났고, 미키가 그려진 모든 것을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하냐고? 물론 좋아는 한다. 그런데 결이 달라졌다.

아기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던 것의 방향을 한 번에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선택맹. 알록달록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저 자주 노출된 것만으로 좋아한다는 선택을 내린 것이었고, 그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으며 꽤나 합리적인 근거들을 계속해서 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좋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디즈니에 대해, 사실은 설탕으로 만든 뽑기 같은 믿음쯤을 수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나를 디즈니라는 환상과 꿈과 동심의 나라에서 갑자기 건져 올리기로 결심했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도 나는 디즈니 영화를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개봉 영화의 가치관과 세계관, 영감의 모티브, 인종의 다양성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가, 시대를 어떻게 반영해 나가고 있는가, 아이들은 저걸 보면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가, 투자 대비 얼마를 벌었는가, 후속작을 만들 것인가.

그렇다. 나는 이렇게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어른이 되었고 인생이 디즈니월드가 아니라는 알아버렸다. 영화 ‘꿈의 제인’에서 말한다. 인생은 시시하다고. 불행하게 시작해서 쭉 불행하다가 중간중간 아주 조금씩 행복을 뿌려준다고. 남편 까미는 이 말을 참 싫어한다. 하지만 어떻게 할까. 우린 늘 즐겁지는 않고, 사람은 이런 인생의 태엽을 투명하게 들추면 그걸 아주 불편해한다. 인간사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풍요롭고 행복으로 채워져있지 않으므로, 나는 이따금씩 인생뿐만 아니라 나 자신조차 냉정하게 관찰해야 할 의무감 같은 것을 갖는다. 제대로 된 냉정함으로 나의 불투명하고 균등하지 않을 미래에 대한 정확한 대처를 하고 싶음이다. 인생이 시시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충동과 욕망조차 용납하고, 대부분의 말도 안 되는 것에 이해를 표할 수 있으며, 일종의 쾌활함까지 장착할 수 있다.


단미 "자 봐봐, 내가 하루를 지내는 방식을 세세하게 쪼개면 이래.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이 안 좋아. 한 3분 동안 막 짜증을 내. 그리고 출근하다가 귀여운 강아지를 보고 다시 깔깔대. 그리고 다시 2분 동안은 일하다가 대뜸 화를 내고, 그새 까먹고 5분 동안은 뭐가 웃긴지 막 웃어. 다시 2분 정도 잔고 보면서 우울해하다가, 자기 턱 모양이 웃겨서 10분 동안 놀리고 웃어. 자 이것의 반복이 내 하루를 구성해. 맞지?"

까미 "맞아, 진짜 변덕스럽네"

단미 "그래서 결론은 이거야. 웃고 떠드는 저 5분 10분을 더 자주 하게 늘리는 거야. 우울하고 화내는 걸 몇 초라도 줄이고 웃는 것의 빈도수를 높이는 거지. 그게 내가 하루를 구성할 수 있는 최선이야. 어른이 된 후의 행복은 이렇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



-나의 산타


매일 행복하려고 혹은 미래의 어느 날 행복해지려고 되지도 않을 노력을 하느니, 그저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슬퍼하고 우울하면 우울해하되 그 중간중간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웃음과 기쁨 감사함과 만족스러움을 조금 더 자주 끼워 넣어보려는 노력 정도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팅커벨은 이제 더 이상 나의 삶에 반짝이 가루를 뿌려주지 않는다. 나의 순간은 매일이 되고, 나의 매일은 지나고 보니 30년을 구성했기에, 어른이 된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해질 수가 없다. 

결혼해서 행복하냐고? 이민해서 행복하냐고?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다. 차라리 2019년 8월 3일 오후 9시에 행복했는지를 물어보거나 어제의 저녁식사가 행복했는지를 물어본다면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인생의 굵직한 행복과 불행의 총합으로 나누어서 무게를 잰 다음 결론을 도출해내곤 하는데, 사실 그 방법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인간은 방금 전에 내가 느낀 감정과 기분, 컨디션에 따라서도 기억을 미화하고 포장하고 왜곡한다.


태어난 직후부터 세상은 온통 무지갯빛으로 참 재미난 일이 가득한 곳이다. 당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는 그런 스펙타클한 곳. 처음 보는 것이 너무나 많고 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은데, 이 세상에 내게 제약은 너무나 많다. 닌텐도 게임 속 마리오처럼 마치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양 호기롭게 어린 시절의 맵들을 누비다 보면, 숨겨진 아이템도 숨겨진 히든맵도 없고 기술의 발전도 느리고 마술도 없고 이 세상의 숨겨진 특별한 비밀 따윈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 사는 곳은 그리고 사람 사는 모양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미지근한 결론에 다다르고, 나라는 인간은 선택받은 인간이 아닌 하잘것없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직면하며 얼렁뚱땅 20대를 지나 30대에 도착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인하고 싶은 보스맵의 글귀를 알고 있다.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이 된 이후에는, 아주 큰 거대한 행복만을 느끼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필시 기쁨은 초조함을 동반한다는 것을. 빛이 크면 그림자도 큰 법이라는 것을. 인생은 만약 재앙이 아니라면 그저 잔잔할 뿐이고, 일렁이는 물결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쉽게 잘 웃고 함께하는 법을 배워야 할 뿐이라는 것을.


사촌동생은 내게 세상을 다 살아버린 할머니 같다고 했고, 나는 시간이 소중하다고 답해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부자를 꿈꾸고,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지만, 부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시간이 부족해서다. 사람은 누구나 지혜롭고 똑똑해질 수 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이 부족해서다. 내가 동심을 잃고 얻은 것은 시간의 소중함이다. 가장 사소한 일이 가장 중요하다. 남편 까미가 하루 종일 옷을 뒤집어 입고 있었던 걸 퇴근하고서야 깨닫고 배꼽 빠져라 웃는 우리의 그 순간을 포착해서 주머니에 담아두고 싶다. 매일 빨래 건조대에 찔려서 바닥에 뒹구는 남편 까미와 그 모습을 놀려대는 나를 보며, 그런 우리 모습이 휘발되지 않게 소중히 담아두고 싶다.

한겨울 어릴 때 하던 눈싸움은 우리 모두를 웃음 짓게 만들었고, 그것은 지금도 우리를 웃음 짓게 만들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잊게 해주지는 않는다. 내가 내야 하는 집세, 자동차 보험비, 건강보험비, 전기세, 세금, 내년에 있을 비자 심사까지 깨끗하게 잊게 해 줄 수 없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어서 붙잡고 늘어지다가는 나의 자아, 나의 미래, 대인관계, 가정생활까지 위태해질 수 있는 것이 어른으로서의 삶이다. 어른들은 돌아오지 않는 동심을 돌리고 싶어서 마약을 하고 쇼핑중독이 되고 알코올 중독이 되면서 이성의 끈을 자꾸만 놓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어른이의 모험심은 현명함과 자기 성찰을 기반으로 했을 때에만 자유롭고 행복하게 펼칠 수 있다. 이제는 놓아줄 예전에 집 나간 나의 동심아, 그때는 손꼽아 기다린 크리스마스였지만 지금은 내가 산타일지도 모르겠다.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1인 맞춤형 산타.


이전 03화 개 같은 결혼문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