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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D Oct 24. 2021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똥 묻은 개가 가득 찬 세상

화라도 내지 않으면, 바스러질 것 같아서 그랬어

-베베꼬인 증오심을 빙자한 정당한 분노


나는 어제와 똑같이 출근을 한다. 오늘도 나의 자유를 구매하기 위해, 나의 자유를 팔아야만 한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눈덩이는 찌리릿하고, 목덜미는 무겁다. 가뜩이나 건조한 사막 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주행하느라 뼛속까지 메말라있는데, 오늘따라 근무에 필요한 물품을 사다가 다짜고짜 중국어를 남발하는 사람을 마주친다. 중국어를 못한다고 여러 번 말했으나, 그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들을 생각이 없으므로 계속해서 나를 붙잡고 중국어처럼 들리는 언어를 중얼거린다. 짜증 나지만, 적당히 무시하고 계산을 하러 이동을 한다. 계산 줄에 가만히 서 있던 순간, 옆을 지나던 사람이 카트로 나를 치고 유유히 지나간다. 나는 그 행인의 어깨를 툭툭 쳐서 불러 세운다.


단미 "Why don't you say sorry to me?"

행인 "eh..?.... so.. sorry"


모두가 비슷한 급의 예의와 상식 수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옮긴 것은 실은 웨이트리스라는 직업을 갖고 나서였다. 화가 나약함의 표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온갖 나약함의 결정체인 것을 어쩌겠는가. 나 자신의 심약함과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마음은 고개를 돌린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당한 반강제적 사과를 받고 난 후, 나의 급작스런 분노는 금세 원상복귀가 되었다. 어차피 날 선 나의 근무일과와 피곤한 내 인생은 그 사람들과는 별 인과관계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다시 나의 골 때리는 일상 속에 몸을 던진다. 내가 속한 사회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가 왜 이토록 조화롭지 않은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것이 유발하는 짜증과 화를 곱씹으면서.


나에게 나는, 나 자신의 주체라기보다 다양한 감정의 노예로 매일을 컨트롤해 나간다는 편이 더 맞다. 그래서 표현해도 되는 감정이 있고, 표현하면 안 되는 감정이 존재한다. 공복인 상태로 8시간 동안 노동을 시켰을 때, 나는 진정으로 상사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때로는 밥 한 끼가 이러한 감정을 쥐고 흔드는 방향키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진정으로 치킨 닭다리가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예고도 없이 수시로 찾아오는 화, 짜증, 불쾌감, 진이 빠지는 것들이 자율신경계, 면역체계, 스트레스 호르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극적으로 달라질 일은 없다. 감정 소모로 인한 건강상황에 신경 쓸 여력은 다음 생에 기약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종류의 감정들은 철저히 문을 걸어 잠근채, 스트레스 수치가 내 신체를 공격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의사 선생님의 경고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내가 왜 사는지, 지금 대체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같은 한숨과 혼잣말들은 지금 당장의 실제적인 고통을 줄여주지 못한다. 30초간의 실제적인 고통을 완화해주는 것은 로또를 사는 것이며, 30분간의 고통을 완화해주는 것은 술일 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장기적으로 나의 스트레스 수치를 높이는 행위들이 잠시나마 심적인 스트레스를 완화해줄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우린 실사판 심시티를 건설할 수 없고, 태어날 부모와 나라를 고를 수 없고, 신을 만날 수도 없고, 전쟁, 배신, 실업, 완벽하지 않은 치안, 험담, 탐욕, 길들이기 힘든 식욕과 거의 모든 일생을 함께 한다. 그래서 힘들지 않은 인간은 없다. 삶이란 것은 끊임없는 고통, 절망, 분노, 질병, 질투, 자기 멸시, 비탄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의 연결일 뿐이다. 그것들은 나의 기깔찬 노력을 가볍게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빠른 속도로 자가증식을 하고, 결국 무력해져 가는 나는 사회, 정부, 국가, 환경 탓을 한다. 나 자신에 대한 주관적 분노와 사회에 대한 객관적 분노의 구분조차 의미가 있나 싶다. 그 안에서 타인을 향한 풀지 못한 증오들까지 스멀스멀 생겨난다.


손님 "What made you leave Korea?"

단미 "I can't explain what exactly it is but, honestly, I am forced to accept korean rules and I am not the one who fit in."


과거부터 우리나라는 성차별, 남아선호사상, 대가족, 가부장제, 일제강점기 잔재 같은 것들을 통해 철저히 가족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계층 이기주의, 성별 이기주의를 양산했다. 그 안에 스며들길 꺼리는 개인은 차별당해 마땅했다. 소신껏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개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오직 불평등 리그뿐이면 그마저도 신이 내린 운명이었다. 신의 구제를 받지 못한 대부분의 중생들은 자산 가격 양극화, 학벌 이기주의, 가계 부채까지도 삼켜내야 했다. 나는 저기 흙바닥에서 포효하며 살아보려고 몸을 꿈틀대는 애벌레인데, 뉴스에서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게 되었다고 칭송했다. 이 나라에는 세계적 수준의 능력을 가진 멋지고 엄청난 사람들도 넘쳐났는데, 실제로는 그들의 존재 여부를 확실시할 수 없는 디지털 가수 같았다.

하나의 삶,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 누구나 하는 취미, 추구해야 마땅한 직업, 받아들일 만한 조건의 배우자, 좋은 아파트 브랜드, 사교육을 통한 자식 성공, 노후 보장되는 미래계획으로 연결되는 그들만의 리그. 그들은 누구일까. 울컥울컥 올라오는 나의 분노를 주기적으로 억누르며 내가 관전해야만 했던 탐욕, 출세욕, 명예욕, 과시욕에 적당한 리액션을 했고,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들려주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렇게 오늘만 살았고, 내일은 없었다.

나의 노력과 눈물이 얼마나 부족했던 것이었는지 측정할 길은 없었지만, 나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표방하는 어느 한 개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사회에 분노를 품었다. 개인이 개인이 될 수 없는 사회는 분명히 옳지 않은 방향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이를 바득바득 가는 것뿐이었다.


까미 "양보 좀 안 했다고 골프채 휘두르는 것들은 대체 뭐야, 그리고 양보 좀 하면 가시가 돋나? 왜들 그래"

단미 "똥 묻은 개들이 겨 묻은 개들을 물어뜯는 세상이지"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때론 부럽다. 자신의 분노에 충실해서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전혀 앞뒤 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 나도 안다. 나의 파괴적인 행동이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것을 말이다. 화난 척하는 것이 가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 화를 내는 것은 대체로 문제를 더욱 어렵게 꼬아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모르겠고 나도 그냥 야구방망이며 골프채며 닥치는 대로 휘둘러서 다 깨부숴버리고 싶을 때가 적지 않다. 법규고 윤리고 도덕이고 일단 이런 이성적인 문제들을 제쳐두고 생각해본다. 최소한 그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나 자신의 감정이 타인의 입김이나 행동에 손상될 틈이 없이 충실하게 행동하는 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다시 상상해본다. 타인들이 내게 보내는 두려운 눈빛, 혐오와 같은 감정들은 오히려 저 인간들이 날 무시했다는 기분이 들 때보다 수치스럽지 않을 것 같다. 이건 내가 가진 억눌림과 두려움과 열등감에 대한 반증인 것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에 대한 정당한 분노인 것일까.


경쟁이 지배적인 구조로 안착하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분노라는 감정도 철저히 강약약강의 원칙을 따르고 있어서, 우리는 화를 내는 것조차 동물적 감각으로 성별, 인상, 능력, 직업을 봐가면서 표현한다. 같은 동족끼리 잡아먹는 것도 잔인한데 소심해서 그조차도 하지 못하면, 그 분출해 마땅한 분노들은 엉뚱한 곳으로 향하거나 나 자신에게 쌓이기도 한다. 개인이 건강하지 못한 사회. 제대로 화조차 내지 못해서, 또한 충분한 사회 시스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해서 자꾸만 자꾸만 안으로 숨는다. 파괴적 성향은 천천히 조금씩 계속해서 키워가는 채로 말이다.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개구라 같은 희망 부여나 법제도를 믿는 것보다 사기꾼의 망언을 믿는 편이 베팅률이 높아 보인다. 개인에게 최소한의 방편으로서 기능해야만 하는 집단이나 사회가 헛소리에만 열을 올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는 동안 구성원들 간의 분열은 심각해진다. 있는 자들에게 제약된 표현의 자유란 없고, 없는 자들에게 허용된 표현의 자유는 터무니없이 적다. 불평등이 부여하는 가치에 머리를 조아리길 바라는 우두머리들이 죽치고 있는 곳에 구성원 간 소통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우리 사회에는 나처럼 소심한 분노자들이 많아서, 그들은 그냥 죽는다. 미국에 총기사건으로 죽는 사람보다 한국에 자살로 죽는 사람이 월등히 많으면서, 우리는 그들이 총기사고로 죽는 것을 보고 쯧쯧거린다.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는 미디어와 짝짝꿍 손을 잡고 갈등과 혐오와 우월감으로 밥 벌어먹고, sns를 통해 채울 수 없는 허영심과 시기심을 주유소 기름 채우듯 친절히 주유해준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서로 물고 뜯고 죽이고 그 어떤 아귀다툼을 해도 그것 또한 밥벌이로 용인되는 사회. 돈이 없으면 분노가 해결이 안 되는 이 사회가 돈 없는 나를 소심하게 만든 것인지, 아님 괴팍해지게 만든 것인지 나조차도 헷갈린다.


'니껀 니가 알아서 챙겨야지 누가 챙겨주길 바라니', 그렇지 내 몫은 알아서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겨주길 바라는 것도 환상이다. 그래서 난 내 밥그릇도 공포도 불안도 전부 알아서 챙겼다. 그것마저도 개인의 능력과 지능으로 평가받게 되니 우리는 문제를 따질 시간조차 사치다. 내 밥그릇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때의 불안은 어쩌면 걱정이라기보다는 화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학습된 엄마 친구 아들만큼은 못하더라도 '그 물'에서 놀아야 하고, 과대 과탑 해외봉사 2개 국어는 못하더라도 한 줄 쓸거리라도 만들어야 하고, 재수 없는 동창만큼 부자 남친을 만나진 못하더라도 인스타에 올릴 달달한 연애 정도는 하고 있어야만, 그래야만, 자아정체성이 흘러내리는 모래성처럼 부서지더라도 캡처해둔 사진만으로도 얼마간은 부여잡을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냉소적이 되어야 하는 걸까. 서러움, 절망감, 억울함, 상실감, 피곤함, 자괴감, 살인충동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느끼는 복합적인 인간상을 면밀히 실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는 어느 회사, 어느 집단에서나 볼 수 있는 정신 나간 인간상은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교양, 예절, 매너, 도리, 지적 수준이 범죄자가 감탄할 수준이어도 충분히 교수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회다. 그는 좋은 아파트에 살며, 좋은 차를 끌고, 비싼 취미를 즐기고, 노후 보장되는 직종에서의 만족감으로 나약한 계층에 있는 나와 같은 학생들을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착취한다. 순수히 학업을 하고 싶어 하는 나의 의지를 콩나물 꺾듯 꺾어도, 그를 괴롭히는 뭔가는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는 듯하다. 그들의 뻔뻔함은 범죄가 받는 보호에 비해 무죄인 우리가 받는 보호는 미약한 이토록 무자비한 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흉터가 있는 자리에 다시 상처가 반복되는 삶을 사는 구성원들의 사고는 극단적이다. 우린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욕을 하고, 과격한 제스처와 냉소를 배워나간다. 대신 사회적 지위에 의해 머리를 조아리는 법은 육감적으로 습득한다. 나의 사회적 자아는 박탈감을 애써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넣어둔 채,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가고자 한숨을 쉰다.



-로또로 사고 싶은 유토피아


단미 "모르겠어. 어렸을 때부터 바라던, 영화에 나오는 드레스룸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아"

까미 "나도 그래. 알지? 그 밑에 열면 촤~시계랑 벨트랑 브랜드별로 깔 별로 있고. 나중에 집 사면 꼭 그런 드레스룸 만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미 "옷은 내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예쁘고 아름답게 꾸미지 않겠다는 게 아니고, 내게 다른 중요한 것들이 많아서 이미 너무 많은 옷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어졌어"


호주에서 삶을 새로 꾸린 지 5년 후, 나는 이 수많은 옷과 가방과 악세사리, 집안 살림살이들을 계속 사도록 유도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에 빠졌다. 환경오염은 날이 갈수록 심각하다고 하는데, 과연 이 수백수천 개의 물건들은 무슨 필요를 근거로 우리 집에 있을까.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사회는 사치스러운 생산품들과 과도한 비용이 드는 생활방식을 고집했는데, 그건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들에 둘러싸여서 점점 분노의 모종을 키워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꾸는 꿈처럼 바꿔대는 물건들, 새로 나온 신박한 아이템, 머스트 아이템, 손민수템, 필수템들이 진정 내 생활에 필요한가 하면 한시 빨리 사라져 주는 것이 삶의 밀도를 높여줄 것처럼 보였다. 물질적 환상을 이토록 높이 평가하도록 만든 이 사회 시스템은 과연 정상인 걸까. 물질이 만들어낸 환상은 교묘하게 계층으로, 지역으로, 직업으로 뻗어나갔다. 그에 따라 서로 편을 가르고, 배척하고,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소외를 시키는 이 썩어빠진 문화에 나는 줄기차게 놀아났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의 우선순위를 왜곡하게 만들어, 소비 수준이 위축되지 않도록 그리고 보다 성숙한 개개인의 자아 인식과 존중이 확산되지 않도록 공들였다. 노력이 가상해 박수에서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365일 눈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불필요한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절절히도 노력하며, 검소한 분위기나 검약을 실천하는 개인들을 무시한다. 너무도 이상하다. 우리는 꾹꾹 눌러쓴 일기나 친구와의 대화, 구석구석이 안락한 집, 고소한 냄새가 나는 빵과 같은 소박한 희열에 정성을 쏟으라는 권고는 좀처럼 듣기가 어렵다. 사고 싶은 게 넘쳐나서 결정장애까지 생기는 우리에게 구매의 목적은 뭘까. 배에 결 좋은 마블링을 장착한 채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버킨백같은 배우자를 옆에 끼고 좋은 차를 끌면서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일까.


나는 휘황찬란한 드레스룸이 갖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우뚝 설 수 있는 자신감을 갖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한남동 고급 아파트를, 벤츠 카브리올레를, 미슐랭 레스토랑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알맹이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누구 하나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두발 뻗고 사색할 수 있는 나만의 안락한 공간,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나의 자유, 누가 돈을 내도 아깝지 않을 내 소중한 친구와의 허심탄회한 대화야말로 정말 본질적으로 염원한 것일 수도 있다. 20만 km가 넘은 차를 끌면서, 50년도 넘은 집에 살면서, 10불짜리 와인을 나눠 마시면서, 자신이 그려온 그림을 보여주면서,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꿈을 좇으며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친구들을 만드는 소박한 것을 아끼는 한 친구를 만난 날, 고비용 사회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나의 무차별적 분노와 방향을 잃은 고통은 그동안 항상 희생양과 피의 대가가 필요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꽤 오래도록 내게 천연덕스럽게 학습되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어쩌면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 그 같은 자기기만에 눈을 감고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 마루, 베시 헤드


순수하게 나의 좌절감과 무기력함을 인정한다.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한 만큼 분노를 느꼈고, 딱 그만큼의 즐거움을 느낀다. 실직이나 모함, 이혼, 배신, 질병, 빚 같은 이슈들이 언제든 나의 일이 될까 여전히 두렵고, 나는 무력함에 대항하는 기술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인생에 대한 애착이 커지는 만큼, 욕과 다혈질의 빈도도 함께 올라갈까 봐 삶에 대한 가치를 더 이상 크게 부여하지는 못하겠다고 비겁하게 말하고 싶다. 삶에 대한 대응 기제라고 하기에는 화의 폭발은 여전히 양날의 검이다. 인간으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무기이기도 하지만, 별 것 아닌 일에 휘둘러봐야 분노조절장애의 표본이 되어 안줏거리로 씹히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처음 운 울음은 어쩌면 앞으로의 내가 치러야 할 대가들에 대한 서러운 분노의 신고식일지도 모른다. 자의로 태어나지 않았어도, 값을 지불해야만 원통한 고함.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은 기우제에 대한 홍수 범람의 책임도 결국은 나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나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지구 어디를 가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는 죽어서야 내게 일어나는 일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살아서는 '나의 생각'을 해석하고 풀이해서 오답을 다시 반복하지 않게끔 행동하는 것만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다. 건조하고 팍팍한 감정에 때마침 운 좋게 여유가 생기면, 지난날의 아둔했던 내가 얼마나 자주 쓸데없는 곳에 화를 내다가 무언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시간들과 주어진 인연들과 신체의 기력을 내팽개쳤는지를 기억해내게 된다.

나는 드디어 제대로 화를 내고 싶어졌다. 융통성 있는 사회와 타협이 가능한 문화를 만드는 것도 '나'라는 개인이고 공존하는 것도 그러한 개개인이다. 인간사회에는 노란색도 있지만, 빨간색도 검정색도 있다. 사회에는 억울해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도 많다. 나의 일이 아니면 우리의 색깔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고도 못 본 척한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날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내 기분은, 속 시원히 때려 부수는 격분을 표출하더라도 비참할 것 같다. 너무나 원통해서 분노할 힘조차도 없을 미래의 내가 날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 행동의 결과인데, 나는 지난날 나의 비겁했던 분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보려고 노력하는 대가가 나의 사상과 감정의 자유를 파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내게 지금보다 더 높은 권위와 지위 같은 것은 필요도 가치도 없다. 나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남의 자유를 약탈하는 것이 이 사회의 당연한 메커니즘이 되었다면, 그 사회에 적응하지 않을 권리도 나의 권리다.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 - 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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