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 놀이
시를 읽으며 감상에 젖으며 생각한다. 그래, 살아있는 하루를 감사하고 또 사랑해야지. 그러다 한켠에 드는 생각. 왜 누군가는 폭력과 죽음이 도사리는 곳에 살며 이런 감상에 빠질 시간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일요일 오후, 늦게 일어나 세탁기로 빨래를 하고 청소기로 방을 치우고 옷장에 걸린 여러 옷들 중에서 입고 싶은 옷을 꺼내 입고는 가방에는 아이패드와 아이폰 책 두 권과 텀블러를 챙긴 후 십 분 거리의 스타벅스에서 베이글과 밀크티를 마시며 시를 읽고 있는 반면 이 지구의 누군가는 충분히 잠을 자지도 먹지도 못한 채 노동을 하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세탁기와 청소기는커녕 마실 물도 음식도 입을 옷도 충분하지 않거나 없을 수도 있다. 학교는커녕 총을 들고 있을 수도 폭력으로 죽어가고 있을 수도 있다.
왜 이 세상은 불공평할 것인가? 그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이 지점이 내가 신을 믿지 않는 이유다. 누군가는 신에게 기도한다. “우리 가족 무탈하게, 내년에는 돈을 많이 벌게, 혹은 더 좋은 사람이 돼 달라고” 누군가는 “오늘 하루,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과연 신이 있다면 이 모든 것에 응답을 할 것인가? 신이 있다면 왜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고통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운명에 처하게 하는 것일까? 모든 것에는 신의 뜻이 있다고 신을 믿는 사람들은 얘기하지만 이런 불공평을 보고 있으면 무엇이 신의 뜻인가 싶다.
2차 세계대전 영화 퓨리(Fury)의 후반부에 대원 중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바이블(닉네임)은 ‘신의 소명’이라고 이 전쟁을 자신의 관점에서 얘기한다. 옆에 있던 다른 부대원은 “하나님은 뭐하신대? 주사위 놀이?”라고 받아친다. 내 생각도 그렇다. 무엇이 전지전능하단 말인가.
일요일 오후, 시 한 편 읽다 살짝은 우울하고 냉소적인 생각이 번진다. 그래서 나는 그저 한 해 한 해 후원을 늘려가고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들의 삶이 좀 덜 불공평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