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오늘은 안녕한가요?
스무 살 이후 'How to Live'가 내 삶의 큰 질문이었다.
17살, '교사'라는 나름의 진로를 확정한 이후 그 과정이 치열했든 아니었든 이 길이 나의 길이라 생각했었다. 평탄한 길은 아니었지만 직진, 유턴, 또는 우회의 길들을 통해 교사가 되었다.
내 진로와 꿈에 대해 '확신'한다 생각했었고 '꿈을 이루게 되면 어느 정도 삶의 방향성이 잡히겠지' 라 생각했었다. 물론 원했던 직업을 갖는다고 ‘내 삶의 행복으로 이어질 거야'라는 1=1 공식적 대입은 하지 않았지만 1십대와 이십대 지녔던 ‘더 잘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부담감이 여전히 지속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교사란 직업을 통해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성취감과 뿌듯함의 감정도 느끼지만 "아직 날 찾지 못한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 나는 여전히 불안할까?
한정된 24시간, 한 번뿐인 유한한 삶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불안감을 주고 이 모든 것들을 하고 있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 좌절과 실망을 반복한다.
자기 계발서는 ‘현재의 우리'가 완벽하지 못한 존재라고 말한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아’가 아니라,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을 가해야 한다면 지침들을 늘어놓는다.
이런 목소리에 지친 것은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노력 지향적 메시지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요즘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어' 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그렇다고 위 책들의 내용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막연한 ‘행복'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행복’ 이란 단어가 멀게 느껴지지만 일상에서 따뜻한 햇살, 시원한 바람, 좋아하는 커피 한잔에도 순간의 '행복'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내 삶에 대한 질문'이 나를 따라다니며 우울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슴이 늘 답답했고 가끔씩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이 많았다. 그러면 마음과 달리 타인에게도 친절하게 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했고 이런 모습은 다시 스트레스를 주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하였다.
강연 등을 통해 동기부여가 될 때도 있었지만 많은 동기부여 강연과 책들이 '나 자신의 스토리'가 아닌 이상, 그 순간뿐일 때가 많았다.
이 글을 쓰면서 '지금도 충분히 괜찮아.'라는 그 생각을 스스로에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여덟 살,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우리는 매일 ‘지금도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는 말보다는 ‘부족해' ‘충분하지 않아’ 더 좋은 점수와 등수가 필요해'라는 현재의 부족함을 채찍질하고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았다.
‘10등 안에 들어야지, 5등 안에 들어야지, 넘버원이 돼야지’
이런 과정은 대학에 들어간다고 막을 내리지 않는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더 좋은 스펙과 점수. 등급과 점수로 매겨지는 삶은 반복된다.
직장에서 역시 비교와 평가는 계속된다. 나의 성과는 곧 내가 된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점수’로 판가름 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서 스스로에게 '현재로 충분해'라는 생각이 비집고 끼어들 자리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삶의 만족도 또한 낮다.
다음의 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2017년 OECD가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삶의 만족도는 소폭 개선됐지만, 여전히 OECD 평균 이하에 머물고 있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는 고용 불안정, 직업 스트레스, 건강에 대한 불안 등이라고 한다. OECD 회원국 중에서도 한국은 그간 자살률에서 1,2위를 해왔다. 2010년 이후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고 그 이유로는 정신적 문제(36.2%), 경제생활 문제 (23.4)%, 신체질병 (21.3%)이다.
낮은 삶의 만족도와 높은 자살률. 이는 우리의 삶의 부재한 자기 긍정과 여유에서 비롯된다. 삶에 부재한 여유는 타인과의 연결과 공감 역시 가로막는다.
다음은 Ted talk의 유명한 강연 중 하나인 ‘Brene Brown의 [‘The power of vulnerability]’ 중 일부이다.
The things I can tell you about it: It's universal; we all have it. The only people who don't experience shame have no capacity for human empathy or connection. No one wants to talk about it, and the less you talk about it, the more you have it. What underpinned this shame, this "I'm not good enough, " -- which, we all know that feeling: "I'm not blank enough. I'm not thin enough, rich enough, beautiful enough, smart enough, promoted enough." The thing that underpinned this was excruciating vulnerability. This idea of, in order for connection to happen, we have to allow ourselves to be seen, really seen.
제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우리 모두가 이것은(관계 단절의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수치심) 우리 모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수치심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감과 연결에 대한 능력이 없죠. 어느 누구도 수치심에 대해 얘기하기를 원하지 않아요. 더 적게 얘기할수록 더 많이 갖고 있음을 의미해요. 수치심에는 ‘난 충분하지 않아'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어요.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느낌이죠.
난 충분히 완벽하지 않아. 날씬하지도 않아. 충분히 부유하지도,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고 승진할만한 가치도 없어. 수치심에는 고통스러운 취약성, 상처 받기 쉬움이 전제되어 있어요.
진짜 연결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진실로 타인에게 보일 수 있어야 해요.
<중략>
And so here's what I found. What they had in common was a sense of courage. And I want to separate courage and bravery for you for a minute. Courage, the original definition of courage, when it first came into the English language -- it's from the Latin word "cor, " meaning "heart" -- and the original definition was to tell the story of who you are with your whole heart. And so these folks had, very simply, the courage to be imperfect. They had the compassion to be kind to themselves first and then to others, because, as it turns out, we can't practice compassion with other people if we can't treat ourselves kindly. And the last was they had connection, and -- this was the hard part -- as a result of authenticity, they were willing to let go of who they thought they should be in order to be who they were, which you have to absolutely do that for connection.
제가 발견한 것은 이 사람들(사랑받고 소속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용기(courage)'가 있다는 거예요. 라틴어에서 온 이 단어의, ‘cor’는 심장(heart)을 의미하는데요. 어원의 의미는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이 누구인지 얘기할 수 있다'을 뜻해요. 즉, 이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어요.
다음으로 자신에게 먼저 그러고 나서 타인에게 친절할 수 있는 연민(compassion)을 갖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친절해질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이 연민을 연습할 수가 없는 거죠. 마지막으로 진실됨의 결과로 오는 ‘연결성'을 갖고 있었어요. 이 점이 어려운 부분인데요. 그들은 진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그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아를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요. 연결이 일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죠.
위 강연의 메시지는 이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실로 보였을 때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또 스스로에게 한다. 수치심, 상처 받기 쉬움은 보여서는 안 되는 취약점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자신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진짜 자신이 되기에 주저함이 없을 때 우리는 타인과도 연결될 수가 있다.
끊임없이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SNS를 하며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혹은 순간이 전체인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편집해서 올린다.
나는 SNS를 하지 않는다. 특히나 남의 시선에 민감한 한국사회에서 SNS는 어쩔 수 없이 비교의 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된다는 긍정적 요소가 있다고는 하나 남과의 비교뿐 아니라 현재 자신의 생활이 충분히 멋지지도, 건강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시나브로 들게 한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건강한 레시피를 찾기 위해 여러 포스팅들을 통해 다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지만 현재 자신의 생활이 충분히 건강하지 않고 더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한다.
'편집되고 포장된 나 자신을 만드는 공간’, 내가 올린 포스팅은 타인의 시선 속 ‘좋아요'에 의해 평가되는 그 작동원리 또한 나를 지치게 만든다.
주말, 비는 시간이 생기면 빼곡히 채워 넣어야 마음의 안정이 되는 캘린더. 주말엔 집을 나서야 마음이 편하고 생산적인 하루를 보냈다는 뿌듯함이 든다. 침대에 뒹굴대는 한두 시간은 죄책감을 가져다준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말로 생산적일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지금의 나 역시 일요일 오전,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잇듯.
하지만 '게을러져서는 안 돼'라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나 자신에게 충분히 관대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쉼'이 무엇이고 ‘어떻게 쉬어야 하는 건지'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언제 우리 자신에게 좀 더 여유롭게 관대해질 수 있을까? ‘지금도 충분히 괜찮아'라는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와 만족감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이글에 이어 여러 글들을 쓰면서 나 자신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글을 쓰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