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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Jun 04. 2023

태릉선수촌은 어쩌다 나를 잃었나

롤러스케이트 2회 차, 뒤로 주행 성공.


슬퍼지고서 나는 조깅을 했다. 자전거를 탔다. 자꾸 누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움직였다. 덕분에 인바디를 재고 나서 트레이너 하셔도 되겠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감자튀김을 너무 좋아하고, 수술한 자리는 아직도 때때로 악 소리가 나올 만큼 아파온다.)


나는 바람을 가르는 그 느낌이,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리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수시로 기차 다니는 소리가 들리던 집에서 나와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타면, 눈물이 나면, 불어오는 바람이 위로가 되었다. 사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눈물이 빠져나온 자리를 채웠다. 갑갑하던 마음에 창문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려서는 그네를 참 좋아하고 다락방 지붕 위에 올라가 쉬는 것도 좋아했다. 무섭긴 했지만 온갖 잡념을 다 날려주는 시원한 바람이 참 좋았다. 가끔 기다란 밧줄에 걸린 전통그네라도 보는 날에는 이러다 그네가 360도로 돌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만큼 힘차게 그네를 타기도 했었다.  




별다른 약속이 없던 어느 주말, 공주네 친구 엄마의 연락을 받고 우연히 롤러스케이트장에 갔다. 내가 공주 친구 엄마랑 수다삼매경에 빠지는 공주와 왕자도 처음 타 보는 롤러스케이트의 재미에 푹 빠진 것 같았다. 세 시간 넘게 롤러스케이트에 매진한 탓에 땀으로 머리를 감은 듯 보였으니까.


친구네 가족이 먼저 떠나기 전까진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직접 타 볼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그냥 가면 조금 아쉬우려나 싶어 집에 가기 전 정말 잠깐만 타 보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롤러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가 잘 타는 것 같았다.


롤러장 사장님이 처음 타는 거 맞냐며 나를 추월하더니 꼭 스케이트 선수처럼 발을 교차하며 코너링하는 게 눈에 들어왔고, 나는 돌기 애매하던 코너가 그렇게 하면 수월해질 것 같아서 따라 해 봤다. 몇 바퀴 돌면서 연습하는데 DJ님이 마이크에다 대고 "와~ 왕자 어머니~ 처음 와서 벌써 크로스를 하시는 건가요?" 그랬다.


어머, 나 잘하나 봐!

사장님 하는 거 보고 따라 했다고 말하니 원래도 운동 신경이 나쁘지 않으신가 보다 하면서 아주 많이 놀라셨다.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돌고 또 돌았다. 땀이 식으니 바람이 더 시원했다. 아이들은 어째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나를 재밌어했다.


타 보기 전에는 몰랐다, 롤러를 타도 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가를 줄은. 그리고 내가 이렇게 롤러에 소질이 있을 줄은. 나는 정말이지 신이 났다.


2주가 흘렀고, 다시 롤러장을 찾았다. 아빠, 엄마, 누나, 남동생, 이렇게 아주 단란해 보이는 네 식구가 와 있었다. 그 집 아빠는 무슨 피겨 선수처럼 뒤로 가는 것도 자유자재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뒤로 가기를 따라 해 봤다. 공주가 스케이트 수업에서 배웠다며 물고기 모양으로 가는 걸 알려 줘서 그렇게 연습했다.


뒤로만 롤러장을 100바퀴는 돈 것 같다.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남의 남편이 와서 이렇게 하면 더 잘할 수 있고 이 단계가 지나가면 요런 거도 할 수 있다고 코치해 줬다. 내가 롤러장 2회 차라 무지렁이다 했더니 남의 남편이 매우 깜짝 놀라길래 아아 태릉선수촌은 어쩌나 나를 잃고 말았을까 개탄했다. 물론 남의 남편은 듣지 못했다.


왕자한테도 타는 법을 알려 준 남의 남편이 고마워서 그 집 엄마한테 게토레이를 선물했다. 자기 남편이 저걸 좋아해서 식구들이 단체로 타게 되었다고 했다. 공주랑 왕자도 롤러스케이트를 잘 타는 것 같으니 나도 그런 가족 문화를 만들어 볼까 싶었다. 비록 우리집 가족 문화에 아빠도 함께하긴 힘들겠지만.  


상당히 외향적이어서 조금 조심스러워지게 했던 남의 남편분이 런스카이라는 브랜드를 알려 주며 개인 롤러를 장만하면 롤러장을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발이 금방 크고 꾸준히 잘 탈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으니 내 롤러부터 하나 장만해 보라는 뽐뿌질에 내 안의 팔랑귀 소비요괴가 꿈틀거렸다.


언젠가 친구가 이혼하고 나서 전동킥보드를 샀다던 게 생각났다. 킥보드랑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릴 것 같은 아이였는데 그 친구도 헬멧 쓰고 전동킥보드를 주구장창 탔다고 했다. 롤러가 하나 사고 싶어진 나의 마음과 닮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애들이 아빠집에 가는 오늘 같은 날 허전한 내 마음을 달래고 싶은.




일련의 일을 겪고 지인들에게 마음을 알리면서, 나의 슬픔이 자판기 동전이 되어 그들의 슬픔을 듣는 일이 수 차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뭐든 적극적으로 취미를 하나 만들거나 발견해 보라고 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너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아무리 직장일이 바쁘고, 아무리 자식 수발들기가 빠듯하여도 나를 슬픔에서 건져낼 작은 즐거움, 사소한 취향 하나 정도는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친정단톡방에 자랑할 용도로 공주한테 찍어달라고 했다. 비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낫다고 주장하고 싶다는. 그래도 마음만큼은 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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