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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Feb 07. 2024

썸남과 전남편이 마주치면 이상하다

고맙다는 말은 뻔뻔하게 합니다

연말에 내가 아이들을 친정에 데려가기로 하면서 아이들이 아빠와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는 걸로 면접 일정이 바뀌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지는 않았고, 이브 전날은 카페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으니 갑자기 생긴 빈 시간은 버릴 것 버리면서 집 정리에 쓰기로 했다. 보람찬 연휴가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단체 채팅창에 식사 메뉴가 정해졌는지 글을 남겼는데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오빠한테서 따로 연락이 왔다. 각자 먹을 분위기라며 (전혀 안 그랬고 당일 다른 분과 밥 먹고 차도 마시러 갔지만) 내 이브날 일정을 묻더니 밥을 먹자고 했다. "특별하지 않게" 그냥 밥 먹고 카페 가자고.


고시생 전용 학습실을 이용하던 친구가 만나자고 학교 앞으로 왔던 어느 오래된 이브날이 생각났다. 분명 잠깐 바람 쐴 겸 나오는 거라더니 실은 설렜다는, 십여 년이 흐른 후에도 늘 설레었다는 말을 했던 친구. 어떡할까 하다가 어차피 저녁에는 일정이 있으니 잠깐 나가서 얘기 좀 나눠 보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내가 본 게 틀렸을 수 있으니까.


검색왕처럼 맛집을 찾아낸 오빠를 이브날 만났고, 밥을 잘 먹었다. 전보다는 편해졌고, 같이 아는 사람들의 안부가 대화 내용이었다. 밥을 다 먹고 이동하는데 크리스마스에 집에 혼자 있는 건 불행한 일이라는 프레임 때문인지 카페마다 사람이 많았고, 어쩌다 보니 세 번째 카페에 정착했다.


오빠는 나이가 마흔을 넘기고, 괜찮았던 사람도 보내고 나니 이제는 결혼을 꼭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애기는 갖고 싶어 했다.) 사는 게 별 재미가 없어져서 사람들과 연락을 잘 안 했었다는 말로 그간 연락이 뜸했던 이유도 설명했다. 궁금하진 않았지만.


얘기를 나누다 날이 어두워진다 싶었을 때 오빠가 물었다.


“도비야, 몇 시까지 가야 되지? 집으로 내려 줄까?”

”아, 저 식당에서 내려 주실 수 있을까요?“

“식당?”

“애들이랑 애들 아빠랑 다 같이 저녁 먹기로 했어요.”


눈이 조금 동그래지던 오빠는 이어진 내 말에 큽 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지랄 맞죠? ㅎㅎ 둘째가 그러더라고요, 엄마랑 누나랑 아빠랑 다 같이 밥 먹는 게 보고 싶다고, 못 본 지 오래됐다고. 걔는 지금도 아빠집 갔다 올 때마다 엉엉 울거든요. 그래서 그래, 밥 같이 먹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아빠랑 따로 살게 한 것도 너무 미안한데 내가 이거는 해야지, 하고 그러자고 했어요. 아까 사는 게 재밌냐고 물으셨나? 이럴 때 보면 퍽 재밌기도 하네요.“


당황해서 맨 처음 애기 엄마 아닌 척을 한 후에 왔던 현타를 통해 배운 점이 있다면 애 딸린 이혼녀의 삶에 존재하는 여러 사건들을 나 스스로도 남들 앞에서도 부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실수야 어쩌면 또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앞으로도 의도적으로는 이 부분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물론 광고할 생각도 없지만.)


시동 걸러 오빠가 먼저 내려간 사이 나는 디저트를 몇 개 포장해서 전에 오빠가 잘 먹었다던 비타민과 같이 넣고 차에 탔다. 해 떨어지기 시작한 하늘과 잔잔한 발라드 사이사이로 경쾌한 전주가 몇 번 건너뛰어 혼자 웃었던 시간이 끝났고, 오빠는 혹시나 전남편 만날 것을 신경 쓰며 길 건너편에 나를 내려줬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잘못을 하는 마음이 드는 건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고마워요, 아무 생각 없이 청소하려고 했는데 덕분에 잘 보냈네.”

“아냐 뭘,”


고맙다는 말을 안 받길래 내가 급발진을 하며 흘겨봤다.


“아니, 내가 잘 보냈다는데 왜 그걸 오빠가 부정하지?”


알았으니까 빨리 내리라는 말에 등 떠밀려 차에서 나왔고, 잠시 후 나는 이미 울먹울먹 모드가 된 아들과 멀쩡해 보이는 딸과 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애들 아빠를 만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이상한 하루였다.




얘기를 다 들은 친구가 말했다.


“그래도 그분이 니 상황에 따라오는 그런 일들을 감수하려는 모습이 있네?”


그런 것도 같았다. 근데 그런 모습만 보이는 게 아니라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다른 모습도 자꾸 보여서, 나는 예의는 차릴 수 있었지만 다른 좋은 마음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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