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은 빵빵하게 들었지만 긴장하고 말았는데
이따금 이해하기 힘든 일을 겪었다. 이를 테면 공원에서 노는데 아내가 한국인이라는 현지 애기 아빠가 내 한국말을 듣고 홀연히 나타나 로컬 맛집과 키즈 용품 샵을 공유하겠다, 아내를 소개하겠다며 번호를 받아가더니 얼마 후 와인이 떡이 되어 전화로 멍멍 소리를 한 것이 외국 간 지 한 달도 안 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남편 따라왔고 애들 친구들이랑 얘기하려고 언어를 배우는 중입니다"라는 소개를 방패처럼 사용했지만 방패 앞에서도 예의를 모르던 사람들을 이혼하면서도 겪었다. 고민 끝에 오랜 친구에게 내가 웃긴 소리를 잘해서 그럴까, 뭘 고쳐야 할까 물었더니 뜻밖에도 친구는 내 자존감 지킴이를 자처했는지 잘못을 나에게서 찾지 말고 내가 자기 객관화를 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는 정중하고 친절하게 이성으로서의 나를 설명했다. 태어나 처음 듣는 얘기가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안전한 환경에서 살다가 일찍 결혼이라는 사회적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 나이만 많은 멍충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엄마 같지 않고 건강해 보인다고도 했다.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려 용쓰느라 아무도 못 보는 숲에 가서 울며 자전거를 타고 호수를 돌았을 뿐인데.
"고마워. 스트레스가 나에게 암을 주었지만 우울과 두려움은 나에게 근육과 체력을 주었네."
"크흡. 그래 그래, 근데 너가 밝아서, 티가 안 나니깐."
재차 강조하는 태도 때문에 친구의 좋은 말이 일리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오글거림을 참아 준 친구 덕분에 언젠간 꼭 타투를 하겠다 결심했고 추후의 일을 자책 없이 수용하게도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원래 다른 차를 타고 가려다가 조금 더 넓다며 사람들이 내 차로 이동하자고 했던 어느 날의 이벤트도 포함된다.
목적지의 주차 공간이 넓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운전할 예정이었던 분이 주차장에서 갑자기 자기는 바이크로 갈 테니 다른 사람들은 내 차로 가면 좋겠다고 했다. 식구들 말고는 아무도 태워 본 적 없는 차에 갑자기 성인 여럿이라니. 모르는 동네로 가는데, 길도 어두운데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스트레스가 머릿속을 연기처럼 채웠다.
왜 내 차냐, 안 된다, 껴서 타면 된다, 불편한 티도 냈지만 사람들의 응원에 떠밀려 이것도 추억이려니 하고 결국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생애 최초 카풀에 동갑내기를 포함한 몇 명을 태워 허둥지둥 출발했고, 길 놓친 줄 알고 비명 한 번 지른 것 외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평소처럼 후방카메라도 안 보고 편하게 주차를 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오각형처럼 생긴 건물 옆에다 애매하게 주차하느라 디렉션이 양쪽에서 쏟아졌고, 나사 두 개쯤 뺀 채 주차를 마무리하고 나와 심호흡하며 정신을 차리려던 참이었다. 마지막까지 안 가고 기다리다 다가와 고생했어, 긴장 풀어, 하며 토닥토닥 나를 격려하던 동갑내기의 손바닥이 별안간 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날이 서는 찰나가 반복되었다. 벌건 대낮은 아니었지만 술 한 방울 먹지 않고도 손이 흘러내리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었다. 동갑내기가 토닥토닥까지만 했더라면 스윗함과 설렘 모두 살뜰하게 챙겨갈 수 있었을 텐데, 짧은 순간 기분이 착잡했다. 드러운 세상, 내가 이부진이 아니고 이효리도 아닌 걸 어쩌겠나. (이것이야말로 참된 자기 객관화.)
동생이 1절만 듣고도 “강아지네!” 욕을 했던, 파트너 달 때를 기다렸다 미투를 날릴까 싶었던 어느 날의 사건에 비하면 그래도 이것은 귀여운 수준. ‘내가 뭘 잘못했지?’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대신, 어쭙잖게 째려봤다간 괜히 내가 이상한 여자로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 내 블랙박스에 다 찍혔을 테니 한 번만 더 그러면 언제든 이 물렁한 손모가지를 처벌하자 생각했다. 나는 이제 참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날 나는 잘 먹고 잘 놀았다. 어찌 되었거나 동갑내기의 그런 면을 알았고, 낯선 사람들을 몇 차례에 걸쳐 만나면서 몇 가지 깨달은 점도 있었다. 연예인 얘기와 음식 얘기가 지배적인 것, 사람들의 관심이 이성 관계에 쏠려 있다는 것, 친하게 웃고 떠들면서도 딱히 라포가 형성될 기미는 없어 보인다는 것.
잘 논 것으로 충분한데 뭔가 더 남기를 바라는 건 무리일까. 거기에서 얻는 즐거움이 우리 집까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조용한 집에 돌아와 잘 준비를 하면서 청소를 하는 게 나았으려나, 돈 공부를 하는 게 나았으려나 싶었다. 차라리 손이 흘러내렸어도 실물로 존재하는 N년 차 이혼남 동갑내기에게 포스트 이혼 라이프에 대해 듣고 벤치마킹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정리하고 잠이 들려는데 갑작스러운 몸살 때문에 밤늦게까지 앓았고, 타미플루 데이와 나이트를 시간 맞춰 복용하며 일주일이 지나가는 동안 오빠는 자주 내 컨디션을 챙겼다. 착한 사람 같았다. 매번 저녁이랑 야식 메뉴 얘기하는 게, 먹는 거랑 인터넷 말고는 다른 취미가 없어 보이는 게 어딘가 좀 의아했지만, 자기 입으로 자기 장점을 말하지 않는 부류일 수 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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