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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Jan 09. 2024

하늘에서 이혼남이 내려왔다

그것도 애 딸린 이혼남이

결혼한 적 없는 미혼 오빠와는 어쩐지 더 친해지기가 미안해서 이제 내 이상형은 이혼남이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러다 근처 바베큐장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회전교차로에서 삑사리가 나는 바람에 살짝 늦게 도착했는데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내 동갑이 왔다며 소개를 받았다. 그냥 손 인사만 해도 좋았을 걸 나도 모르게 고개까지 옆으로 꺾으면서 인사했다.


"안녕, 친구야?"


두어 번 가면서 모임이 제법 편해졌는지, 초면인 걸 깜빡하고 평소 성격대로 인사하며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란 참이었다. 그도 예상 밖의 환대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바로 그냥 말을 놓는다고?"

"어머 죄송해요, 제가 동갑이 처음이라 실례를ㅎㅎ"


단체로 유쾌했던 덕분인지 밥 먹는 동안 눈이 몇 번 마주쳤는데 그는 포커페이스엔 소질이 없는 듯했다. 언젠가 오랜 친구가 말없이 웃으며 나를 한참 보길래 눈썹을 조금 올리는 걸로 왜냐는 질문을 대신한 적 있었는데, 내가 표정이 많다며 보는 재미가 있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쓰레기 버리려다 마주쳤을 때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매너 좋게 행동하길래 아잇코 번짓수가 틀렸네요 총각, 이라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더랬다.


과일 먹고 근황을 나누다 나는 주중에 아이들과 어디 다녀온 걸 말했다. 내 상황은 비밀이 아니었으나 대략 뉴페이스였던 내게 누군가 이혼에 대해 물었다. 좋은 변호사님 만난 얘기를 하고 친구한테 들은 다른 이혼 얘기도 하던 중 동갑내기가 갑자기 재산분할 얘기를 했다, 위자료랑 재산분할이 별개인 걸 콕 짚으면서. 아무도 눈치 못 챘는데 옆에 있던 분이 그 친구에게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냐고 지나가듯 물었다.  


저도 다녀왔거든요.

아아, 내가 음소거로 유레카를 외치는 동안 어색하게 웃음 짓던 그 얼굴이란. 질문이 쏟아졌고 그때마다 동갑내기의 신상이 하나둘 드러났다. 그는 소송 기간을 포함 이제 이혼 N년 차 선배였는데 나만큼이나 어려서 결혼했고 어려서 아이를 낳았으며 비양육자라고 했다. 귀책은 전처에게 있으며 양육비를 자동이체 중인 점도 언급했다. 유책배우자에게 양육을 맡긴 지점에서 어째서지? 하고 합리적 의심이 들었지만 더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무 말이나 다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순간 나는 누군가 자신이 애 딸린 이혼남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만으로 찌찌뽕 공감대가 생기는 게 신기했다. “안녕, 친구야?”하고 고개 꺾어가며 인사를 했을 때보다 그가 이혼남인 걸 알았을 때 훨씬 더 반가웠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친구는 이밍아웃을 할 계획이 없었는데 엉겁결에 이밍아웃을 한 거라고 했다.


‘대다수의 남자는 단순하다’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사실을 나는 그 무렵 다시 상기했다. 고기를 먹고 이동한 카페에서 그는 내 옆에 와 앉았고, 때때로 귓속말을 시전하거나 몸을 내 쪽으로 가져왔다. (배란일이라 그런가, 내가 또 예민한가 잠시 생각했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오해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미혼인 오빠는 어쩌다 맞은편에 앉아 이 꼴을 다 보고 있었다. 미혼남께서 데이트하자고 했을 땐 부담스러웠는데 아이 있는 선배 이혼남의 등장이라니, 떨어져 사는 자녀와 지금은 어떤 관계로 지내는지가 궁금해서라도 내가 먼저 연락처도 물어보고 커피도 마시자고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일평생 남자에게 밥 먹자 소리 한 번 먼저 해 본 적 없는 나 자신은 다음 모임에서 예정에 없던 카풀을 하며 그 동갑내기를 차에 태우게 된다.





에필로그


"야, 너 MBTI 뭐야?"


카페에서 옆에 앉은 동갑내기가 묻길래 나는 ‘E뭐F뭐’라고 대답했고, 머쓱하면 웃길 것 같아 상대방 MBTI가 뭔지는 안 물어보려다가 도의적 차원에서 똑같이 질문했다. 걔가 말했다.


"나 I뭐T뭐."

"와ㅡ 우리 남편이랑 똑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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