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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Jan 31. 2024

파스타와 커피는 데이트일까

아니라고 하면 아니겠지

아이들이 아빠집에 간 주말, 씻고 나왔더니 오래되고 소중한 친구한테서 자전거 타다 근처로 왔다는 연락이 와 있었다. 짧게 통화를 마친 뒤 재빨리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고향에 가서 만날 뻔도 했지만 귀찮음을 달고 사는 현대인들이 서로를 존중할 때 으레 그러듯 아무도 먼저 연락하지 않아 만남이 불발된 무리 중 하나였다.  


"미안, 바로 나온다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걸렸네. 많이 기다렸지?“


통화 끝내고 30분이면 될 줄 알았으나 머리 말리고 차가 밀려 도착까지 한 시간이 걸린 바람에—갑작스러웠던 연락을 생각하면 선방한 게 아닌가 싶지만—미안하다고 했더니 친구가 괜찮다고 했다.


"아, 같이 온 형은 좀 전에 먼저 갔어.”

"어~ 너 보러 나온 건데 형이야 없어도 그만이지. 아, 혹시 내가 그분을 봤어야 하는 건가?"

"나야 뭐 항상 여러 가지를 생각 중이지, 머릿속이 늘 바빠."


유재석처럼 사람 챙기기를 잘하고 좋아하는 친구가 허공에다 스케치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하길래 그제야 다른 뜻이 있었던 건가 싶었다.


"그런 거였어? 괜찮아, 다음에 또 자전거 타고 나올 일 있으면 연락 줘. 나는 급할 것이 없어."


부담 없이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이혼인 하나 어디 없나 물었던 때에 비하면 나는 잘 지낸다고, 전보다는 상태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약 끊은 지 몇 달 되었다는 소식을 반가워하는 친구가 나는 참 고마웠다. 커피 마시는 사교 활동은 아직 현재 진행 중이며 슬슬 재미가 떨어진다는 말도 했다. 친구가 왜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빈 둥지 증후군이 힘들어서 간 거였는데, 다니다 보니까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애. 시간도 아깝고. 누가 그러더라, 여기 오면 꼭 연예인 얘기를 많이 한다고. 공통된 관심사가 없으니까 만만한 게 연예인 얘기잖아. 스타터로는 괜찮았는데 길게는 못 하겠어. 교회나 학교,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랑은 그래도 비슷한 배경이 있는데 여기는 완전 랜덤 피플이거든."


친구는 "랜덤 피플"이라는 말이 참 적절한 표현이라며 웃었다. XY염색체가 거의 유일한 접점인 남자들이 모여 현타가 쎄게 온다던 군대 간 기분을 나는 커피 마시는 활동을 하며 오랜만에 조금 간접 체험했다.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언급했다가 공기가 조금 이상해진 이후 책 읽은 얘기나 강의 들은 얘기는 안 하게 되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20년간 친분을 유지한 친구들은 풀밭을 걷다가도 <사피엔스>의 한 대목을 얘기하고, 내가 <노르웨이의 숲> 누구를 닮았다고 놀린다. 오랜만에 만나 최근 읽은 베스트셀러 얘기를 한다. 카페에서 애들 데리고 만나도 <아마존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를 들고 와 각자 책을 본다. 마주 앉은 친구도 직장과 병행해 대학원 입학을 준비 중.


전혀 몰랐던 건 아니지만 나는 이혼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 커피를 마시러 다니다가 내 친구들이 그런 유형인 줄을 새삼 깨달았다. 내 깊고 좁았던 우물에서 나와 더 많은 걸 경험하는 일은 시간 낭비가 아닐 테고. 그런 얘기를 하는 내게 친구는 아까 남자 둘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잘 먹고 왔다며 지도를 내밀어 보여 줬다.


"어? 여기 맛집이야. 나 저번에 오빠랑 여기 갔었어."

"누구? 지난번에 말한 그분?"

"응. 이브날 밥 먹으러 갔었어."

"이브날?"

"응, 특별하지 않게. 오빠가 특별하지 않게 그냥 밥 먹고 카페 가자고 해서. 집에서 청소하려다가.“


특별하지 않다고 해도 특별한 거 아니냐, 친구가 의문을 제기했고 그러면서도 얘기를 더 듣기 바라는 친구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특별하다면 조금 특별한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고.


자전거 땜에 땀에 절여졌다길래 내가 향수 뿌려서 괜찮다고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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