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협의이혼 서류를 냈다
이혼 신청할라는데요.
작성한 서류를 손에 들고 창구로 막 가려는데 좀 전에 우리한테 이혼할 때 쓰는 서류 물어보던 할머니(할머니!)가 우리보다 한 발 일찍 접수창구에 가 물으셨다. 우리가 있는 공간은 협의이혼 접수를 하는 곳이고, 따라서 부부가 같이 와야 하는 곳인데 일흔 가까이 먹은 우리 엄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던 할머니는 아무리 봐도 혼자였다. 직원도 같은 생각이었다.
“혼자 오셨어요? 협의이혼은 남편분이랑 같이 오셔야 신청할 수 있어요.”
“남편도 꼭 와야 할란가요?”
“네, 같이 오셔야 돼요.”
“남편은 이혼 안 해 줄라는데. 안 할라고 할 텐데.”
“그러면 소송을 하셔야 해요. 그건 여기서는 접수 안 해요.”
그러잖아도 변호사님이랑 오랜만에 통화 한 번 해야겠다 생각하던 차였는데, 전에 전화 상담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소개받은 변호사님이랑 상담하면서 친구한테 식구들한테 얘기할 때처럼 횡설수설 의식의 흐름 따라 떠들지 않으려고 미리 불릿 포인트로 정리해 둔 문제 상황과 문의 내용을 읽어 드렸던 때였다. 변호사님이 갑자기 물으셨다.
선생님, 혹시 지금 어디 사세요?
“아? 저요? 저 꽃밭이요.”
“아, 거리가 좀 있네요. 말씀하신 거 들으니까 제가 선생님을 뵙고 해 드리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요. 언제 시간 되시면 전화 한 번 하고 방문해 주세요, 제가 식사나 커피 대접하고 싶어요. 오프 더 레코드로 해 드리고 싶은 말이 많아요.”
갑자기??? 식사요? 커피요?
“아, 선생님, 혹시 이거 통화 지금 녹음되나요?”
“하하, 그렇진 않구요, 전화로도 되지만, 얼굴을 직접 보고 할 수 있는 얘기들이 또 있잖아요. 그래서요. 제가 상담료 안 받을 테니까 시간 되실 때 언제든 와 주세요.”
“아이코, 제가 이런 얘기를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진심이었다. 통화 시작한 지 5분 만에 밥 사 주고 싶다고, 꼭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 주고 싶다는 말을 친구도 아닌 생면부지 변호사님께 들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말씀 정말 감사해요. 저는 항상 애들이 제일 마음에 걸려요. 애들도 점점 크는데 학창 시절 내내 앞으로 아마도 평생 한부모가정에서 커야 하니까요. 애도 하나도 아니고 성별도 다른 애들 둘이 아직 어려서요.”
그러자 변호사님이 말씀하셨다. (그 할머니 모습을 보자 그때 그 변호사님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제가 이혼하시는 분들 많이 보면서 한 생각이 있어요. 어머님들이 특히 많이들 그러세요. 폭력이나 다른 이유로 이혼하고 싶은데 자녀 때문에 오래 참다가 연세 많이 드신 후에 오시는 분들을 많이 봐요. 황혼이혼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분들이 대부분 아이 수능 치고 나면 이혼해야지, 아이 결혼시키고 나서 이혼해야지, 그렇게 미루다가 오세요. 그런데 제가 이혼을 부추기거나 소송을 부추기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 자녀들이 생각보다 섬세하고 잘 느껴요. 엄마와 아빠가 같이 있을 때 행복하지 않은 가정 안에서 아이들이 그걸 다 알거든요. 자녀들 때문이라면 굳이 힘든데 일부러 참으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엄마 아빠가 다 있지만 행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는 것보다 행복한 엄마, 행복한 한부모랑 같이 지내는 게 아이들에게도 꼭 나쁘지는 않다는 거예요.”
“그럴까요 선생님?
“아이들이 다 알아요. 엄마와 아빠 사이에 웃음이 없고 긴장이 있는 걸 아이들이 다 알죠. 결국 선택은 개인의 몫이지만 제가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어머님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부분 그런 경우 어머님들이 혼자 오셔서 소송을 원하시고, 아버님들은 가만히 있다가 소장을 받으시면 그제야 아이쿠 하면서 놀라시는 경우가 많아요.”
할머니가 딱 그런 어르신 같았다. 참고 참으며 살다 다 늙어서 이제라도 이혼해야겠다고 나오신 것 같은 초조하고 아주 딱해 보이던 할머니. 나는 저렇게 살지 말자고 재차 다짐했다. 아무리 괜찮으려고 해도 괜찮을 수 없는 시간을 지나가는 중이지만, 뚜벅뚜벅 잘 걸어 지나갈 테니까. 나는 그렇게 할 거니까.
연신 어떡하나, 어떡하나를 되뇌던 그 할머니가 문을 나서셨고 남편과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와 신분증을 창구 안으로 내밀었다. 양육비나 면접 교섭 디테일은 기한 전에 와서 바꿀 수 있대서 적당히 써넣었고, 동영상 시청 소감문을 직접 와서 제출한 날짜를 기점으로 숙려기간 3개월 카운트를 시작한다기에 법원 앞 카페에 가서 각자 영상을 시청하고 카페에서 펜을 빌려 소감문을 작성했다.
그와 내가 단둘이 카페 한 테이블에 앉은 게 3개월 만이었다. 이혼을 청하는 편지 같은 글을 써 보내고 스타벅스에서 싫어무새가 되었던 그날은 아마 몇 년 만에 우리가 자의로 카페에 단둘이 갔던 날이었고. 그러니 인생이란 참으로 우습다. 커피 한 잔 치의 담소를 내가 그렇게 원했었는데, 몇 년간 화답 없이 흘러간 나의 소원이 이렇게 뒤틀린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소감문에 뭐라고 썼을까.
내 감정과 삶의 무게를 아이들에게 옮기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아빠가 보고 싶은 마음이 아이들에게 죄책감이 되지 않도록 잘 보살피겠습니다. 아빠를 아이들이 늘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고, 아빠를 좋아하고, 아빠 만나는 시간을 아이들이 즐거워할 수 있도록 어린 자녀 앞에서 언행에 더 신경 쓰고 조심하겠습니다.
그날 무척이나 따뜻했던 변호사님 목소리가 법원에서 생각난 건 그분이 진심으로 나를 위로했기 때문이다. 내가 주절주절 떠들면 소개한 사람에게 흉이 될까 싶어서 되도록 요점만 말하고 끊으려고 했는데, 조곤조곤 많은 이야기를 한 건 오히려 변호사님이었다. 통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렇게 말씀 계속하셔도 괜찮으냐고 물은 것도 나였고, 한 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면서 언제든 미리 연락만 주시고 사무실로 와 달라고, 최대한 도와 드리고 상담료도 정말 안 받겠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한 것은 변호사님이셨다. 그러니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걸 알고서 나는 정말 고마웠다. 말만으로도 고마울 때가 참 많은 요즘이지만, 그때는 더 그랬다.
어떤 위로
“선생님, 선생님은 잘못이 없으세요.”
가끔
심장에 고막이 달린 것 같을 때가 있고
목소리에 손이 달린 것 같을 때가 있다
가뜩이나 상냥하던 변호사님 목소리가
나를 따스히 감쌀 때면 더욱 그렇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고 싶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셔도 돼요.
선생님, 선생님은 잘못한 것이 없으세요.”
덜덜 떨며 기다려온 긴 상담을 마친 뒤
눈 화장만 겨우 고쳐 서둘러 나선 출근길
그 길 위에서 나는 한 마리 누렁소가 되어
변호사님의 위로를 곱씹고 또 곱씹으며
덩어리진 조용한 울음을 터트렸다 삼켰다,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한없이 되새김질했다
법원에 서류를 제출한 날, 친구들에게도 이밍아웃을 했다. 그랬더니 변호사'들'을 알아보고 협의이혼 서류까지 작성했다가 결혼을 유지 중인 친구가 내 상담 얘기를 듣더니 물었다.
야, 뻥치지 마, 변호사가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밥이나 커피 하자고 오라고 했다고? 돈도 안 받는다고? 상담시간이 다 돈인데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원래도 목소리가 큰 친구인데 놀라서 큰 소리로 묻길래 나도 덩달아 놀랐다.
"응, 진짜 그렇게 말하시더라. 근데 한두 번이 아니라, 진짜로 시간 차를 두고 계속 그렇게 말하셨어."
"그분 진짜 좋은 분이네. 변호사가 그런 말 했다는 거 처음 들어 봐. 진짜 좋은 분인가 보다. 니가 좋은 사람이라 그런가."
"그분이 좋은 분인 건 맞는 거 같아."
그리고 서류 제출 후 변호사님과 두 번째 통화를 했을 때, 변호사님은 자기한테 다시 연락 주고 소식 알려 줘서 너무 고맙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나는 이혼 변호사를 겪어 본 친구의 말을 옮기며 변호사님께 물었다.
"변호사님, 그때 통화 시작하고 5분 만에 갑자기 저한테 어디 사냐고, 식사나 커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해 주실 말씀이 많다구요. 친구가 그 얘길 듣더니 변호사가 진짜 그랬냐고 엄청 놀라더라구요. 그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봐요. 그때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너무 딱했나요, 제가?"
그러자 변호사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렇죠, 원래는 그렇게 하진 않죠. 근데 제가 소개를 받아서 선생님 상담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더 친근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요. 그날 말씀 듣는데 정말 위로해 드리고 싶었어요. 너무 애쓰셨고, 얘기도 더 들어 드리고 싶더라구요."
"제가 위로를 제대로 받았어요. 변호사님, 그날 상담하고, 이번에 서류 제출하고 와서 쓴 게 있는데 통화 끝나고 보내드릴게요. 그냥 한 번 읽어주세요."
언제든 또 연락 달라는 말을 변호사님의 말을 들으며 전화를 끊은 후 위에 썼던 글을 변호사님께 보냈고, 나는 또 한 번 눈물 글썽이게 하는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