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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Feb 08. 2023

님아, 그 봉투를 열지 마오

14. 아직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


남편이 이혼 요구를 거절했고 내 하늘은 무너졌다. 솟아날 구멍은 없는 듯했다.


계속 살아야 할지 묻고 또 물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자전거 페달 밟으며 편하게 울 수 있을 때면 어느 멍청한 차가 와서 나 좀 치고 가기를 바란 날들이 많았으니까. 무엇 하나 내 손으로 저지르기엔 너무 슬픈 결정들 뿐이었고, 나는 내 사인이 사고사가 되기를 바랐다.


이혼하면, 남편을 안 보고 살면 병든 내 몸과 마음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내 바람을 이뤄주지 않았다. 거절을 거절한다고 말해 보아도 그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시간을 더 달라고, 조금만 더 참고 버텨 달라고 말했다.


이 절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진 줄 알았다. 적어도 이혼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직 준비를 들킨 뒤 직장을 계속 다니면 동료들 보기가 불편하듯, 고백했다 차였는데 마주치면 껄끄럽듯, 이혼을 거절당한 채로 계속 얼굴 보며 사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스타벅스의 싫어무새가 되고 어머님 생신 축하 자리까지 다녀온 유난히 길었던 그날 저녁, 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공주와 왕자를 데리고 친정에 다녀오겠단다. 여름방학이니 조카들도 외가에 가서 며칠 놀면 좋겠다는 언니의 핑계는 사실은 하나뿐인 동아줄이 힘없이 끊어진 동생을 조금이나마 쉬게 해 주려는 배려였다.


마침 아빠가 일이 있어 서울에 오셨다. 처형에게 맡길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역으로 나온 남편에게 아빠가 연락했고, 둘은 꽤나 일방적이었을 면담을 나눴다. 잘 만나서 이제 막 헤어졌다는 아빠의 문자를 받았지만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남편에게도 무척 힘든 하루였을 월요일, 아이들 없이 마주침도 없이 각자의 공간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을 맞은 후 살며시 현관을 나서려는 나에게 남편이 봉투 하나를 건넸다.


<여보에게.>


크라프트지로 된 편지 봉투의 심상치 않은 두께가 바위처럼 심장에 내려앉았다. 가방에 편지를 툭 떨어트리고서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길에 오르는 종종걸음을 따라 괴로운 고민이 이어졌다. 나는 이 편지를 읽어야 할까, 버려야 할까.


출근 후 중요한 일부터 확인한 뒤 긴장하며 꺼내어 펼친 편지는 "아직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이제 막 손에 든 편지를 나도 모르게 책상 위로 던지고 말았다. 남편이 이걸 봤다면 또 예의 없다고 했으려나. 잠시 괜한 생각이 들었다. 숨을 고르고 용기 내어 다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무려 네 장이었다.



개소리. 나를 사랑한다는 개소리.


사랑한다니. 나를 사랑한다니. 아직도 나를 많이 사랑한다니. 첫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내 입을 뚫고 나온 개소리라는 말을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 뒤따랐다. 나를 이렇게나 절절히 사랑한다 고백하는 러브레터 속 문장 문장마다 아니라고,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흔적 없이 메모를 휘갈겼다.


헤어지기 싫다는 그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는 나를 사랑한 적 없었다. 사랑하지 않은 채 연애를 하고, 사랑하지 않은 채 결혼하였으며, 사랑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이해와 희생을 요구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랑이 영원하길 꿈꿨다.


말해주고 싶었다. 그가 사랑이라 착각한 감정은 실은 나와 헤어지면 잃게 될 모든 것을 붙잡고 싶은 욕심이라고. 학바라지를 해낸 사람이라도 되고 싶어 오래 참고 망설였던 나처럼, 그 사람 역시 낯선 절망과 두려움에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이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궤변을 다 읽고 나자 온갖 나쁜 말이 입에서 맴돌았다. 눈과 귀를 스쳤던 여러 나라 욕들이 서로 나오겠다고들 아우성이었다. 하다 하다 배가 고파질 때까지 욕만 하고 싶었다. 고약한 울화를 그렇게라도 털어내고 싶었다. 해결되는 건 없겠지만 해소는 될 테니까.


얼른 정신을 추스르고 커피를 밀어넣었다. 편지는 가방 속에 도로 묻었지만 나를 여전히 많이 사랑한다는 그의 말은 종일 초침처럼 분주하게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내가 어쩌자고 이걸 읽어 버렸을까. 야속한 그와 멍청한 나를 끊임없이 원망하며 일하던 중 남편에게서 카톡이 왔다. 며칠 기도원에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사라지고 싶은 건 나였는데, 한국에 오면 꼭 템플스테이를 가려던 나였는데 이번에도 그는 내가 바랐던 것을 너무 쉽게 손에 넣었다.


집에 가면 나 혼자라니,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상에 치여 사는 여느 때 같으면 반가웠을 이벤트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언제나 출근보다 훨씬 더 설레는 퇴근을 기다리곤 하지만 그날은 다가오는 퇴근이 조금도 기다려지지 않았다.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 마음이라는데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도 남편도 없을 빈 집으로 향하며 걸음을 뗄 때마다 눈물도 같이 뚝뚝 떨어졌다. 곱씹지도 못한 미운 편지가 자꾸만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늘 그의 생각, 그의 방식으로만 나를 사랑하고서 나의 말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못했다. 못나서 화만 내고 짜증만 내며 내 탓으로 몰아간 것도 맞단다. 미안하단다. 끝까지 상처받고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를 도우려 한 내 마음을 모르고, 그의 감정을 나에게 떠넘기기만 했다고.

아직 나를 사랑한단다. 나에게 닿지는 않겠지만 진심이란다. 이제부터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에게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고 나를 소중히 여길 거란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단다. 나의 지난 10년이 헛되지 않게 하고 싶단다. 그가 원했던 모든 것이 나 없이는 다 의미 없는 것들이라고 말이다.


그가 뒤늦게 옳은 부분이 편지에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 모든 말이 나에게 조금도 다가가지 않을 것 같다는 짐작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너무 나를 외롭고 지치게 했다.




눈물과 벗하며 보낸 조용한 며칠은 참 더디게 흘러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중인지 알 리 없는 아이들은 친정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고, 어린이집에서 찍어 보내는 것처럼 사진마다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 웃음을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러고 사는 게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들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 집에 온 그는 곡기를 걸렀는지 살이 빠져 있었다. 나는 그가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생각이 바뀌기를 바랐다. 돌아와서 미안하다 사과하며 내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말하기를 기대했다. 그의 마음을 다 알고서도 지금 헤어지고 싶다는 나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도 나의 마음을 인정하겠다고 편지 말미에 밝혔었기 때문이다.


다녀왔다고, 아이들 데려오느라 여보가 고생 많았다는 말을 끝으로 다른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서울역까지 기차 타고 아이들을 데려온 엄마에게 웃어 보인 나의 마음을 그는 짐작할 수 있을까. 남편 마주하기가 답답했다. 쉬고 싶었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먼지가 되고 연기가 되고 싶었다. 잠들 수 없는 밤을 이미 수없이 많이 보냈지만 불면의 괴로움과 삶의 무게는 더 버거워만 갔다.


귀국을 비밀에 부치고 싶어 한 남편 때문에 카톡 사진 한 번 못 바꾼 채 세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반갑지 않은 생일은 어김도 없이 돌아왔다. 피하고 싶었던 축하 연락을 준 몇몇 오랜 친구들에게 조심스레 귀국 소식을 알렸다. 그러다 한 친구에게 사라지고 싶은 근황을 터놓았다. 친구는 그만 시달리고 소송이라는 이름의 일을 저지르라며 변호사 얘기를 꺼냈다.


소송이라니. 발칙하고 또 발칙해져서 K3 차주는 신고할 수 있었지만 차마 남편에게 소장을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어머님과 그런 사건이 있고서도 그분과 매일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은 사람이 아닌가. 이름도 무서운 소송을 시작할 사람이 못 되었다. 제아무리 힘들대도 일으키기 싫은 지난한 싸움.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았고, 슬픈 나로 인해 누군가 더 슬퍼하는 모습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약을 먹기로 했다. 브로마제팜이었다.



<코너 속의 코너, 도비와 함께 노래를>


데이브레이크 오빠가 부릅니다, 오늘 밤은 평화롭게.

평화롭지 않은 밤을 보내던 도비를 위로한 노래. 1393에 전화했던 그 어느 밤에도 도비는 이 노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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