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파사나 명상 센터 체험기 4
첫날 오후, 나는 가지고 간 시트를 배정 받은 '나의' 침대 위에 깔고 그 위에서 누워 곧 있을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기다렸다. 무척 더운 날이었다. 숙소동에 하나 있는 에어컨은 맞은 편 벽 위에 달려 있는 데 켜있는 지 꺼져 있는 지 냉기를 느낄 수 없고 그 대신 마주 보고 놓여진 침대 사이의 통로에 띄엄 띄엄 선풍기가 놓여져 시끄럽게 고래를 돌리고 있었다. 티셔츠 사이로 땀이 줄줄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발 밑에 놓인 선풍기를 바라보았다. 선풍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젓고 있었지만 내 쪽을 바라 보기 직전에 잠시 멈추었다 반대 방향으로 고래를 돌려버렸다. 그러니 나에게는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바람은 오지 않았다. 나는 선풍기의 회전 반경에서 벗어나 바람에 외면당하고 있었다.
이는 공평하지 못한 처사였다. 모두 공평히 나누어야하는 선풍기의 혜택에서 나만 소외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앞 자리 누군가가 바람을 독차지 하기 위해 선풍기 몸통을 움직여 놓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기적인 인간이 선풍기의 방향을 틀어 놓은 것일까? 누가 내 바람을 빼앗아 갔나? 시원하게 바람을 맞고 있는 맞은편 침상의 사람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았다. 아마 저 셋 중의 한 녀석이 선풍기를 움직여 놓은 것이겠지. 그러고 보니 저들의 침대가 놓인 맞은 편 벽 위에는 에어컨도 달려 있다. 바로 위에 에어컨이 있는 데 선풍기 바람까지 독점을 하다니. 나는 선풍기를 돌려 놓은 ‘그 놈’의 이기심에 무척 괘씸하였다. 가뜩이나 더운데 화가 나니 몸은 더 덥게 느껴지고 땀은 더 끈적거렸다. 이 모든 더위가, 흐르는 땀이, 이 불쾌함이 모두 '그 놈' 탓이었다.
더위가 오를 수록 나의 화는 점점 더 커지고 마음의 소리도 따라서 커져갔다. 거리를 지나가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난데 없이 욕을 한바가지 들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나는 불편한 것은 참는 데 괘씸한 것은 못참지. 명상이고 성스러운 침묵이고 뭣이고를 떠나 '그 놈'에게 이 기분을 되갚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나는 분풀이는 못하더라도 이 상황, 불공평하게 나의 바람을 빼앗긴 상황은 어떻게든 바로 잡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여야 정의를 세우고 '그 놈'에게 반성의 기회를 줄까. 서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으니 내가 이런 내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도 아무 말도 없이 무작정 선풍기를 내 쪽으로 돌려 놓는다면? 시비가 붙으면 뭐라고 혼을 내 줄까, 앞으로 열흘의 시간은 어떻게 될까.
그때, 나의 위대한 이성이 중재에 나섰다. 첫 날부터 앞자리 사람과 째리는 사이가 되면 앞으로도 내내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야 될 것이라 생각하니 싸워 보아야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명상하러 들어와 누군가와 시비가 붙는다면 두고 두고 쪽팔린 기억이 될 것이었다. 참자. 가만히 누워 쉬자. '잊어 버리자. 잊어버리자'를 되뇌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래 선풍기 바람이 없으면 더워 쓰러질 만한 날씨도 아니지. 때마침 머리맡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듯도 하였다. “이거면 됬지. 암, 이거면 되고 말고. 잘 참았네."라고 생각하고 있는 데, 어느 순간 내 몸이 벌떡 일어나 선풍기의 방향을 내 쪽으로 획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참으려는 내'가 방심하는 사이에 '화가 난 내'가 젭싸게 몸을 움직인 것이다. 말싸움을 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가는 경우이다.
나는 맞은 편 침상의 사람들이 나 만큼 놀라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회는 잠깐.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이제는 스스로의 행동을 옹호하고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전투에의 각오를 다지는 수 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참으려는 나'와는 달리 '화가 난 나'는 행동으로 정의와 공평을 실현하였다. 조금 비민주적으로, 이성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갑작스런 행동으로 이어진 것은 조금 유감스러운 일이나 이것은 상대의 이기심을 벌하고 왜곡된 상황을 바로 잡는 일이니 참으로 올바른 행동이었다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혹시 누군가 '성스러운 침묵'의 규칙을 깨고서라도 이 일에 관하여 나와 시비를 가르고 싶은 이가 있으면 얼른 나서라 내가 너의 잘난 척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마음은 그렇게 되뇌였고 어느새 복수하였다는 후련한 마음을 즐기고 있었다.
나의 위대한 행동의 결과인 선풍기 바람을 쐬는 것도 잠시, 곧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식당으로 모이라고 알리는 종이 울렸다. 열흘 간 수련생들이 지켜야 할 규칙과 생활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숙소동의 문을 열었다. 이런. 놀랍게도 선풍기는 처음처럼, 아니 전보다 더욱 나를 외면한 각도로 맞은 편쪽으로 돌려 놓여져 있었다.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고 전쟁의 선언이었다. 가라 앉았던 부아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어떤 녀석이 일부러 그러는구나.‘나의 바람’을 빼앗아 자기가 독차지 하려 하는 구나.
나는 무척 흥분하였지만 억지로 참으로 노력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강적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다음의 행동은 정말 큰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이성이 목소리를 높었다. 여기는 명상하는 곳이야, 너 스스로 이 곳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겠다고 마음 먹고 들어왔잖아? 맞는 말이지. '그래 똥 만났다. 참아야지. 무시해야지 어차피 곧 해가 지고 시원한 산 바람이 불 터이니 선풍기가 다 무슨 필요람?' 이렇게 생각하니 '화가 난 나'도 왠지 성질을 누그러 뜨리는 듯했다. 더 이상 마음의 찌꺼기를 만들지 말자. 스스로 그리고 혼자만 손해 보는 일이다. 나의 마음은 더이상 억울한 손해를 보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히 산다 싶으면 꼭 한 번씩 도발하는 인간들이 있다. 내 속의 '까탈스런 내'가 그렇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잊으면 잘 잊어 버리지 못하고, 손해를 보면 곱절로 돌려주려는 그는 이번에도 잠시 참는 척을 하다 결국 다른 식으로 자기 의견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날 저녁 첫번째 명상 시간이 끝난 후 프로그램 메니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에게 선풍기 하나를 더 놓아 달라고 말했다. 프로그램 메니저는 여러 회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자원봉사로 수련생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생활 속에 불편한 일들을 도와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바람이 오지 않는다” 며 선풍기를 하나 더 놓아 달라는 나의 말을 들은 프로그램 메니저는 무척 당혹스런 얼굴을 하였다. 이런 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바람을 맞고 싶다는 말이지요?"라고 다시 물었다. "네 선풍기 바람을 쐬고 싶습니다. 선풍기가 내 쪽을 봐 주지 않거든요." "아, 그것은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기가..."
내가 지금 다시 돌이켜 보아도 그날 '그깟' 선풍기 바람 하나에 내 스스로의 마음이 이토록 크게 오르락 내리락 하였던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사실은 선풍기 바람이나 더위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했다거나 누군가 시비를 걸어 왔다고 생각한 것이 내가 화난 난 진짜 원인이었을 것이다. 별반 신경쓸 것이 없어지면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인다. 그것이 마음의 습관인지라 마음은 어느 곳에 가도 그 불평의 대상을 찾는다. 아마 천국에 가면 여기는 왜 술을 안팔아요 노래방은 왜 없지요라고 불평하겠지. 담마디카 명상 센터에 들어간 첫 날, 발 앞에 놓여있던 오래된 선풍기는 나의 마음의 대상이 되었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바람 조각이 나의 집착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그 동안의 나의 마음의 습관이 어떠했는 지를 일깨워 준 “선풍기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