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파사나 명상 센터 체험기 5
무료함, 그리움, 보고 싶음
이곳에는 먹고 자고 명상하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되지 않는다. 틈틈히 화장실에 가고 샤워를 하고 평소보다 더 자주 이빨을 닦는다. 아침마다 옷가지들을 손으로 빨아 널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아무도 방해가 되지 않는 곳에 서서 스트레칭을 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나무와 꽃, 그리고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레들을 바라본다. 요가나 다른 운동은 금지되어 있으니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는 몸을 늘이거나 공터의 잔디를 천천히 걷는 일 뿐이다.
명상 시간 중간 중간에는 식사 시간과 더불어 휴식 시간이 있다. 밥을 먹고 그릇을 닦아도 꽤나 많은 시간이 남는다. 이 시간 동안에 샤워나 빨래 같은 것들을 를 할 수 있지만 이 또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외부에서라면 쉽게 가질 수 없는 ‘아무 할 일 없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게 된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끊임 없이 새로운 자극들을 받거나 우리 스스로 어떤 자극들 혹은 재미들을 끊임없이 쫓으며 살고 있다. 어떤 자극들을 찾아 내고 이것들을 해석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뇌는 외부의 자극이 멈추면 일종의 ‘허기짐’을 느끼는 데, 무언가를 하고 싶은 데 할 것이 없는 것에 대한 불편함, 우리가 ‘무료함’이라 부르는 느낌이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지면 우리는 무료함을 느낀다.
우리가 무료함을 느끼는 데 외부에서 다른 자극을 찾아내지 못하면 우리 뇌는 허기짐을 채우기 위하여 스스로 먹이,혹은 놀이 거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공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공상은 그 동안 손 쉽게 혹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던 자극들과는 달리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들을 받아 들였던 것이 뷔페에서 여러 음식 사이를 오가며 원하는 음식들을 무한히 먹을 수 있었던 것이라면, 외부의 자극이 차단되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가스랜지 하나가 놓인 주방에 가두어 놓고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과 같다.
우리는 매순간 이런 저런 이야기들 이미지들을 머릿속으로 만들어 내고 이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일종의 가상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공상은 우리가 만든 요리들이다. 텔레비젼이나 유튜브 같이 쉽게 혹은 넘치게 맛있는 요리를 즐기다가 그런 것들을 멈추고 아무도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해 주지 않으면 배가 고픈 우리는 냉장고 안의 재료로 꺼내어 이런저런 요리를 직접 만들어 먹게 된다. 공상이다. 하지만 스스로 요리를 만드는 일은 꽤나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우리는 곧 요리를 하는 것에 싫증과 피로을 느끼게 된다.
배가 고픈데 아무도 음식을 차려주지 않고 스스로도 음식을 만들고 싶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바로 꺼내어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나 하고 냉장고를 뒤진다. 냉장고 깊숙이에 우리가 오래전 먹다 남긴 랩이 씌워진 음식들을 끄집어 내어 전자랜지에 따뜻하게 데워 먹기 시작한다. 이 음식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냉장고 구석에 쳐박아 놓았던 완성된 요리, 기억들이다. 오래전에 랩을 씌워 놓았기에 냉장고 안에서 꺼내자 마자는 딱딱하게 굳어 있지만 랜지에 돌리고 나면 마치 막 만들었을 때처럼 따뜻하고 말랑말랑해 진다. 우리가 가진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이미지에 대한 기억은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점점 더 구체적인 기억과 느낌이 떠오르게 되고 종국에는 마치 그 시간으로 돌아간 듯 생생하게 회상하게 된다.
기억은 감정과 함께 떠오른다. 우리가 기억을 떠올릴 때 객관적인 사건들만 떠올리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느꼈던 감정도 함께 떠올리는 것이다. 모든 사건이나 이미지에 대하여 당시 느꼈던 감정과 지금 느끼는 감정이 같지는 않지만 당시의 느낌이 강했을 수록 생생하게 기억된다.
어떤 기억과 함께 그 당시의 느꼈던 어떤 강한 느낌과 감정을 떠올리면 우리는 점점 더 그 감정에 몰입한다. 기억과 감정을 반복하면 그 느낌과 감정은 마치 우리가 지금 그 느끼는 것처럼 생생히 느껴지고, 점점 더 강화된다. 이는 우리의 뇌가 보다 더 쉽게 허기를 채우는 방법이다. 과거의 감정, 회한이나 그리움 등을 부여 잡고 동일한 이미지와 감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며 점점더 강한 느낌들로 허기를 채운다. 마치 방금 먹은 음식의 맛을 계속하여 떠올리면서 “맛이 있었다.참 맛이 있었다.다시 먹고 싶구나”라고 되새기는 것과 같다.
마음은 그 사라진 과거의 기억들을 부여잡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분해한다. 마음이 만들어낸 상에 대한 집착이다.이 집착은 우리를 어느 시점 혹은 상황으로 옮겨 가고 싶게 만든다. 그 시점이 과거에 있다면 ‘그리움’이고 미래에 있다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센터주변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나는 휴식 시간마다 아지사이가 높게 자란 언덕 아래에 서서 아직 터지지 않은 꽃봉오리들과 이미 활짝 터져 펼쳐진 아지사이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 꽃들 사이로 크고 작은 서너 종의 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들은 꽃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분주히 오가며 혹시 빠뜨린 꽃이 없는지 살피는 것 같기도 하고 간혹 서로 만나 무언가 ‘작업’에 대하여 짧은 대화를 나누는 듯 보였다.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시간에 이런 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오랫동안 나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첫날 휴식 시간부터 후쿠오카에 있는 와이프와 아이들이 몹시 보고 싶었다. 그 동안 출장 으로 열흘 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집을 떠나 있던 적도 많았는데 이번 만큼 가족들이 보고 싶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시간이 지나면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의 그리움은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심해져 갔다. 몇 일째였는 지, 심지어 나는 하루라도 더 일찍 아이들이 보기 위해 프로그램을 그만두어야 하나를 고민한 적도 있다.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눈에 어린다’란 표현은 이런 것이구나고 생각했다.
일주일 째 되는 날 아침 나는 이런 그리움과 보고 싶음이 내가 스스로 만든 상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난데없는 깨우침이었다. 그리움은 사랑이 아니다. 애타게 그리워한다고 그 대상에게 어떤 이익이 되거나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시기를 일초도 당기지 못한다. 그저 나의 마음이 그 감정에 휩싸여 활활 타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러고 나니 놀랍게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음은 침착해지고 끊임 없이 만들어 내던 그리움의 상들은 사라졌다. 한 순간의 일이었다. 나는 이 일로 이해 혹은 깨달음이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명상의 언어를 쓰자면 무지를 깨쳐 집착의 습(習)에서 벗어난 것이다. 마음의 불을 끄고 나니 눈 앞의 사물들이 보다 잘 보였다. 나뭇잎 사이의 거미집들, 몸을 꼿꼿이 세운 체 꼼짝 않고 먹이를 기다리는 사마귀, 막 허물을 벗은 매미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