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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몸, 몸, 몸.

위파사나 명상 센터 체험기 6

by 박종호

고통


명상을 하며 오랜 시간 한 자세로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절여 온다.물론 도중에 자세를 바꾸거나 다리를 편다고 하여 아무도 무어라 할 사람은 없지만 위파나사 명상은 자기 몸에 일어나는 감각들을 그것이 어떤 감각이든 분별 없이 받아들이고 차별 없이 바라보며 이들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므로 다리가 절여오면 다리가 절이는 느낌에 ‘싫다’라고 반응하지 말고 이 감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때문에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하며 되도록이면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한 시간씩 있는 그룹명상 시간은 집중적으로 명상하는 시간이다. 더더욱 눈을 뜨거나 움직여서는 안 된다. 나 같은 초심자에게 한 시간을 지속적으로 감각에 집중하는 것 자체가 아주 힘든 일이지만 이보다 힘든 일은 한 시간 동안 움직임 없이 앉아 있는 것이다.


명상을 하는 동안의 시간에 대한 느낌은 대단히 새로웠다. 사십 분이나 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고 눈을 떴는 데 딸랑 오분 혹은 십분이 지난 경우가 많았다. 어느 시점부터 다리가 절여오기 시작하면 다리를 펴고 싶은 마음과 움직임 없이 명상을 지속하려는 마음이 싸우며 그 고통에 저항 하느라 온몸이 긴장된다. 그때부터의 시간은 더욱 더 느리게 흐른다.


나는 시간의 흐름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흐르는 것을 체험하며 한 생의 꿈을 꾸고 깨어 보니 잠깐 동안 낮잠을 잔 것이었다는 승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잠시의 시간 동안 한 생의 꿈을 꾸는 것이 ‘인식의 시간’이라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명상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몸이 느끼는 ‘몸의 시간’이다.


나는 아홉째 날이 되어서야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게 한시간 동안 다리를 풀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는 데 그 동안 몸이 적응한 이유도 있었지만 명상을 통해 다리의 절여옴에 이끌리지 않고 다른 감각들로 인식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놀아운 경험이었지만 이후에도 명상을 할 때 마다 그 정도의 몰입 혹은 삼매의 경험을 항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육체의 감각을 타자화하여 관조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이어진 수행의 목표이며 방법이다. 인도 등지에서 기괴하고 자학적인 방법으로 수행하는 일부 수행자들은 그 극단적인 예이다. 그들은 육체의 가장 강력한 감각인 고통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는다. 가장 강력한 감각을 초월함하여 이외의 모든 감각을 타자화하고 육체와 감각이 주는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내가 이해한 위파사나 명상 또한 감각을 타자화하고 관조하는 수행법이다. ‘나’라는 틀를 내려 놓아 고를 만들어 내는 착, 착을 만들어 내는 상을 만들지 않음으로 고의 발원을 근본적으로 막는다는 원리이다. 그러나 애초에 상을 만드는 것은 감각이고 그 발생은 몸에서 기원하니 결국 우리의 몸은 수행의 대상이자 동시에 수행의 장애인 셈이다.


모처럼의 고요가 다리 절임으로 흩어지면 접혔던 다리를 펴며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다행히 요즘 명상을 가르치는 사람들 중에는 편한 자세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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