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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Apr 18. 2023

앓던 이

치과에 다녀온 와이프는 오전에 막 뽑은 신선한 이라며 지퍼백에 담긴 사랑니를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의 뼈처럼 생긴 사랑니는 아직 핏기가 선명하다. 와, 정말 크지 않아? 이런 게 어떻게 보이지도 않게 숨어있었데? 이빨 뺀 자리가 아파 말도 잘 못한다더니, 뽑힌 이가 징그러워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나를 놀리는 재미가 제 아픔보다 큰 모양이다.


 와이프의 오른쪽 아래턱에 숨어있던 사랑니는 그동안 잇몸 속에 삐뚜루 박혀 걸핏하면 염증을 일으켰다. 치과 의사들은 엑스레이를 찍어 보고는 매번 사랑니가 턱의 신경과 너무 가까이 박혀 있어 건드리지 않는 게 낫겠다 했었는 데 이번에 간 치과에서는 CT를 찍어보고는 엑스레이로 보이던 것과는 달리 사랑니가 신경과 그리 가까이 있지 않고 그 정도 거리이면 안전하게 발치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한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 그녀를 괴롭히던 사랑니는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제라도 않던 이를 뽑았으니 속이 시원하겠다. 잘 뽑았네, 앓던 이.   


않던 이, 그 때문에 내가 아팠던 이. 해질 즈음 산책을 하다 문맥도 없이 오래전 어느 해 나를 오랫동안 아프게 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파서 헤어졌는 데 헤어지니 더 아팠지. 그래도 이빨이 뽑힌 자리의 구멍이 메워지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잊히지 않을 것 같던 아픔도 세월에 다 잊혀지는구나. 역시 잘 뽑았네, 않던 이! 하려는 데, 마음 한 구석에서 차가운 바람이 슉슉 올라온다. 아주 오래전 앓던 이가 머물렀던 자리, 그가 남긴 깊은 구멍에서 솟아나는 바람이다. 그날 밤, 앓던 이를 뽑던 그 겨울밤은 바람이 정말 차가웠어. 그래 그 밤, 정말 추웠지. 너무나 추웠어. 세월이 흘러 잊혀지는 일도 많은 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생생하게 남아 그저 둔해지기만 하는 일들도 있다. 그래도 둔감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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