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한국 사회의 갈라진 두 진영은 화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많은 부분 맹목적인 믿음이나 이를 근거로 한 순종, 혹은 지배가 사라진 사회에 살고 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이전이라면 권력자들에 의해 독점되고 조정되었을 정보들이 다양한 정보를 통해 대중에게 유통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와 네트워크가 발전 덕에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정보의 성역 없는 유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반면 이전에 몇 개의 매스미디어가 가지고 있던 정보의 독점과 권위, 공신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사람들은 이전처럼 신문사, 방송국이 하는 말을 순진하게 믿어주지 않는다. 이들을 대신하여 다양한 매체에서 정보가 쏟아져 나오니 정보의 진위는 애초에 확인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아니라 하여도 믿고 기라 하여도 믿으니 거짓 정보,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매체의 이용자 수는 각 매체의 수익과 직결된다.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매체들은 더 많은 수신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개별 사용자들에 개별화된 알고리즘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알고리즘은 그 사람이 즐겨 보는 내용들을 분석하여 그가 좋아할 만한 정보를 우선적으로 제시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것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이유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예전에는 권력자가 민중을 눈을 가렸지만 이제는 알고리즘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사람마다 보고 듣는 정보가 다르니 사실의 인식이 다르다. 사실의 인식이 다르니 전제가 다르고 전제가 다르니 의견들이 합의에 이를 길이 없다.
사람들이 매체를 통하여 확증편향에 빠지고 확증편향이 강화되는 단계는 이러하다.
1)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정보를 클릭하고 그 정보에 오래 머문다.
2) 알고리즘은 이러한 매체 이용의 습관을 분석하여 사용자의 성향을 파악한다.
3) 알고리즘은 이들이 사용 빈도와 시간을 늘리기 위해 이들이 믿고 싶어 하는 정보와 듣고 싶어 하는 의견을 모아 보여준다.
4) 자신이 동의하는 의견과 이를 근거하는 정보가 반복적으로 보며 신념이 강화된다.
5) 동일한 정보와 의견을 공유하는 거대한 집단이 생겨난다.
6) 집단 내에서 생성되는 정보들은 그 안에서 재유통되며 구성원들의 신념을 더욱 강화시킨다.
7) 구성원들에게는 진위와 무관하게 듣고 싶은 내용, 신념에 동조하는 정보와 의견이 우선 보인다. 그럴싸하게 꾸며진 내용일수록 더욱 인기가 많다.
8)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견 다수이며 옳은 의견이고 이에 반하는 의견은 소수의 잘못된 의견이라 믿게 된다.
9) 알고리즘으로 엮인 집단 사이의 의견과 신념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 멀어진다.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나는 광화문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산다. 광화문에는 주말마다 서로 다른 진영의 시위들로 아주 난리 법석이다. 듣는 사람은 없고 다들 소리만 꽥꽥 지르니 시끄러워 죽겠다. 언젠가 저 사람들이 서로 마주하고 조용히 앉아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서로가 믿는 사실과 전제가 너무나 달라 들을수록 속에서 치받아 오르는 부아를 꾹 누르고, 서로의 정보를 하나하나 맞추어 보며 서로가 공유하는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가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확증 편향에 빠져 있는 집단은 상대방 집단이 벗어나지 못하는 편견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몽매하다며 안타까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개몽하려는 선한 의도로 상대의 편견을 깨려는 시도를 하다가는 싸움만 일어나고 상대에 대한 적의만 더 달굴 뿐이다. 의견과 신념의 차이가 너무 멀어져 버렸다.
중국의 문호 루쉰은 오래된 관습과 인식에 젖어 현실을 타개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중국인들을 사방이 막힌 쇠로된 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라 표현했다. 이들은 갇혀 있지만 나가려 하지 않으니 자신이 갇힌 줄 모르고, 잠들어 있으니 숨이 막혀 죽어가는 줄도 모른다. 모두가 동조하는 '우리'의 신념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두렵고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편견을 깨고 현실을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는 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머잖아 모두 숨이 막혀 죽겠지. 그러나 잠든 상태에서 죽으니까 죽음이 비애는 느끼지 않을 걸세. 그런데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비교적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서, 그 소수의 불행한 이들에게 구제될 길 없는 임종의 고통을 겪게 한다면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루쉰, 납함『呐喊』(고함) 중에서
오래전 루쉰이 말했 듯, 신념으로 뭉친 집단이 자신의 생각에 객관성을 가지려면 벽 밖(외부)에서가 아닌 그 집단 안에서 누군가 십자가를 지고 집단의 달콤한 신념에 의문을 제시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믿고 있는 '우리'의 신념들에 의문을 가지고, 나와 집단의 의견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부여잡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듣는 귀가 열릴 때, 그나마 서로가 대화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주말에 조용한 광화문 광장을 좀 걸어보고 싶다. 세종대왕 뵌 지도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