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3 자극이 멈추면 느껴지는 맛
아내는 내가 집에서 독주를 홀짝이고 있으면 굳이 와 묻는다. 오빠는 그걸 무슨 맛으로 마셔? 좋은 질문이다. 이게 말이야 아일라 위스키라는 건데... 길게 준비된 나의 지적 허세를 막 펼치려는 찰나, 와이프는 응응하며 지나가 버린다. 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이 위스키는 잘 훈련된 입들만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어른들의 맛이라고!
어느 주말 오후 아내가 물었다. 오빠도 따뜻한 물 한 잔 마실래? 나는 주인님께서 집사에게 오더를 내리는 줄 알고, 어, 커피 내릴까? 하고 물었다. 아니 따뜻한 물 마실라냐고. 집사는 계속 소파에 누워 있어도 되는지 머리가 복잡하여 다시 묻는다. 그냥 물? 응, 그냥 따뜻한 물. 다행히 집사는 계속 퍼져있어도 되는 모양이다. 근데 그걸 무슨 맛으로 마셔? 와이프는 내가 뭘 모른다는 눈빛으로 주방에 들어가 주전자의 물을 머그잔에 따라 홀짝거렸다.
와이프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자주 아무것도 타지 않은 따뜻한 물을 마시길래 나는 왜 그런가 했는 데 요즘은 내가 따뜻한 물이 너무 맛있어. 요즘 옷을 만들면서 항상 따뜻한 물을 마셔. 나도 이제 따뜻한 물이 맛있는 나이가 되었나 봐. 나보다 한참 어린 아내가 따뜻한 물 맛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고 하니 그래 그대도 나이를 많이 잡수었소 하면서도 한편 맹물에서 무슨 맛이 나는 것일까 궁금했다.
오늘은 밖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 탓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여 몸에 남은 한기를 몰아내었다. 주방의 전기 포트에 생수병의 물을 담아 끓이고, 끓인 물을 하늘색 보온병으로 옮겨 담았다. 이 보온병 안의 뜨거운 물을 핀란드에 사는 요정 무민이 그려진 머그컵에 조금씩 따라 식혀가며 따뜻하게 마신다. 나도 요즘에 따뜻한 물맛을 발견하였다. 나는 와이프에게 전화하여 내가 지금 따뜻한 물을 마시며 글을 쓰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입맛은 나이에 따라 변하는 모양이다. 아주 어릴 적에는 매운 음식을 먹는 것이 두려운 일 중 하나다. 자라나며 입은 점점 더 자극적인 음식을 바라고, 술도 더 진한 독주를 선호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반대로 점점 덜 자극적이고 재료 본연의 맛이 잘 드러난 음식들을 찾게 되는 데, 이 시기를 지나 또 다른 시기가 오면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아주 밍밍하고 담담하게 입앗에 퍼지는 맛을 원하게 된다. 나의 장인만 하여도 예전에는 나와 술을 드실 때면 꽤나 독한 일본 고구마(이모) 소주와 위스키를 즐겨 드셨는 데 지금은 사케가 제일 맛있다고 하신다.
나의 경우는 요즘처럼 간헐적으로 술을 끊는 데, 술을 끊고 있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여러 가지 맛들이 느껴진다. 반대로 그동안 즐겨 먹던 맵고 짜고 기름진 음식들이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는 점점 더 자극적인 맛을 찾게 된다. 취기와 주정의 쓴 맛은 술을 마시는 동안 점점 더 혓바닥을 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음식들 속에 새로운 자극을 만들려면 점점 더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일부러 덜 자극적인 음식들을 찾아 먹기 시작하면 점차 기존의 맛들이 자극적으로 느껴지고 점점 더 덜 자극적인 맛을 맛있다고 느끼게 된다. 미각의 섬세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같은 산지의 와인들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들을 구별해 내는 것, 사케를 만드는 쌀의 종류와 정미도에 따라 세세하게 벌어지는 맛의 차이를 느끼는 것, 메밀가루로만 만든 10할 메밀면(소바)과 9할 메밀면의 차이를 느끼는 것, 오늘 출하된 장수막걸리와 냉장고에서 하루 묵은 장수 막걸리의 맛을 구별해 내는 것, 우리 집 앞 커피전문점에서 사장님이 내린 커피맛과 아르바이트생이 내린 커피맛의 현격한 차이를 느끼는 것. 미각의 섬세함이란 이런 것들을 구분해 내는 것이다.
따뜻한 물을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어른의 입맛인가> 노인의 입맛인가? 그냥 성숙한 입맛이라고 해 두자. 그렇다면 입맛은 다른 감각들에 비하여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예민해지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젊은 시절에는 자극적인 음식들로 섬세함을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면 나이가 들어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다 보니 그동안 자극적인 맛에 숨겨져 있던 섬세한 맛들이 느껴지는 것뿐이다. 왠지 미각의 귀환은 나이가 들어 세상을 섬세하게 바라보게 되는 원리와 닮았다. 끄달리던 자극들이 사라지면 그제야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다.
(후기)
따뜻한 물을 일본어로는 '오유'라고 하고 중국어로는 '바이카이수이'라고 부른다. 두 나라에서는 아직도 따뜻하게 차를 마시는 습관이 많이 남아 있어 차가 담긴 주전자에 오유, 바이카이수이를 넣어 찻잎을 우려 내어 마신다. 그러니 오유도 바이카이수이도 들으면 마시는 물이란 느낌이 난다. 그런데 우리말로 따뜻한 물이나 온수라고 하면 아무래도 마시는 물이라는 느낌보다는 몸을 담그는 목욕탕의 물이 떠오른다. 우리는 차나 커피를 따뜻하게 마실 때에도 펄펄 끓는 물을 부어 적당히 식혀 마시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