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BGM Long Ago Far Away/Chat Baker
우선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베리굿 문학상을 받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베리굿 문학상 수상위원회 여러분과 독자 여러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 년 전 한국의 위대한 작가인 한강씨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한강 작가는 수상 발표가 나오고 일주일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 공식 석상에서 수상소감을 밝혔지요. 저는 그 당시 그녀의 소상 소감을 듣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작가로서의 지나온 세월을 요약하고 현재의 상황을 전달하며 미래의 계획에 대하여 동시에 밝히는 매우 정보력이 풍부한 내용이면서 동시에 매우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감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베리굿 문학상에 저의 소설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 년 전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감을 다시 한번 들었습니다. 물론 이 자리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을 회고하는 자리는 아닙니다만 오늘날 많은 한국의 작가들이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게 된 이유가 그녀의 노벨상 수상으로 인하여 한국의 많은 작품들이 해외로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물론 저의 작품도 그 작품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한강 작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Ms. Han, I deeply appreciate your remarkable contributions to Korean literature and the writers within it. Your efforts have truly made a significant impact.
우선 저의 매우 짧은 작가 경력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올해 12월이 되면 만으로 54살이 됩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이와 같은 나이입니다. 그녀는 5년 전 수상소감에서 첫 소설을 발표하고 30년이 지났다고 말했습니다. 20대에 첫 소설을 발표하기 전에 한강 작가는 이미 시인으로 등단한 작가이기도 하였으니 그녀가 글을 쓴 전체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입니다. 하지만 글을 쓴 시간의 길이와 작품의 깊이는 항상 비례하지 않습니다. 장수한 작가가 항상 더 위대한 작가로 기억되지 않는 이유이지요. 저의 경우에는 3년 전 발표한 첫 소설이 이렇게 큰 상을 받았으니 앞으로는 저의 금번 수상이 작가의 경력과 작품의 평가가 비례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로 언급될지도 모르겠습니다.
3년 전 한국에서 발표한 저의 소설 <하나 빼기 일>은 출간과 동시에 문단으로부터 과분한 평가를 받으며 여러 나라로 번역되어 읽혔습니다. 이미 많이 알려졌듯이 <하나 빼기 일>은 동양의 가위바위보 놀이를 응용한 한국의 전통적인 놀이입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하나 빼기 일> 놀이를 많이 하였지만 하나에서 일을 뺀다는 말에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나에서 일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야 하는 데 사실은 두 손을 내밀고 그중에 하나를 빼는 것이니까요. 사실을 적시하면 '둘 빼기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관습이며 오락 안에서의 오류의 허용입니다. 누구나 수긍할 만한 일이지요. 하지만 이런 관습적인 오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발언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제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였습니다.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거나 금지당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제가 자랄 때 한국에서는 이미 발언의 자유가 허용된 사회였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군사독재의 시대가 끝나고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시스템이 이미 갖추어진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회의 분위기와 문화가 완전히 자유로운 발언과 비판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외국인은 당시 한국 사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마치 사우디 같아요. 드러나지 않은 규칙들이 너무 많아요' 그렇습니다. 한국은 어디에 적혀있지도 굳이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지도 않는 '드러나지 않은 규칙들'이 여전히 많은 나라입니다. 그 규칙들은 드러나지 않지만 어기면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때로는 아주 큰 불이익을 받기도 하지요. 길 위에 심어진 지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럼 규칙을 강요하고 불이익을 강요하는 세력은 누구일까요? 바로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독특하고 강력한 '우리'라는 문화입니다. 한때 '우리가 남이가?'란 말로 대변되었던 이 집단의식은 지역, 학교, 회사, 마을 등등 모든 구분이 가능한 집단에서 작동합니다. 한국의 이런 '우리' 문화는 강력한 단결성과 동시에 배타성을 지닙니다. 그러니 때로는 '우리'라는 조직 안에서 서로의 부조리를 눈감아 주기도 하고 '우리'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이익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착취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되기도 합니다. 조직에서 이런 '우리'의 부조리를 지적하거나 밝혀낸 공익제보자들은 대체로 조직에서 쫓겨나거나 '우리'의 조직원들에게 배제되어 왕따를 당하는 불이익을 겪었지요. 저는 이런 '우리'라는 의식의 부정적인 측면이 단지 한국에서 만의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격화되고 있는 빈부의 격차, 지역 간의 갈등, 국가 간의 전쟁도 그 이면에는 모두 '우리'의 강한 배타성이 존재합니다.
저는 지금이야 말로 인류의 모든 문제의 발단인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구의 열대화도 지역과 종교 간의 갈등도 이미 인류 종을 멸망시킬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범위를 확대하여야 합니다. 기존의 '우리'의 울타리를 부수고 새로운, 더 큰 '우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부정이 아닌 자기 확장의 작업입니다. 지역과 국가, 민족과 종교의 간극을 무너뜨리고 모든 지구인이 새로운 '우리'가 되어야 할 시간입니다. 나아가 인류는 지구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 모든 생태계를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인류가 지구 생태계의 지배자가 아닌 하나의 구성원임을 인식하고 거대한 지구의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합니다.
다시 한번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신 베리굿 문학상 수상위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또한 이 글이 얼토당토 하지 않은 허구임을 알고도 끝까지 읽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합니다. Thank you very much.
*혹시 지구 어느 곳에 베리굿 문학상이 있다면 이 글 속의 베리굿 상과 연관이 없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