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가 무서운 이유과 그 치유법
제가 숫자를 세면 당신은 천천히 현실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넷, 셋, 둘, 하나... 짝! 그녀는 그의 얼굴 앞에서 박수를 한 번 세게 쳤다. 죽비 소리 같은 J의 박수 소리에 P는 온몸이 작은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며 눈을 살며시 떴다. 그가 최면에 걸려 있던 시간은 20여 분에 불과했지만 그 사이 얼마나 소리를 질러 대고 안간힘을 썼는지 그의 목은 쉬었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휴우-. 뒤로 한 것 젖혀진 소파에 누운 P가 긴 한숨을 쉬었다. J는 막 깨어난 P를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P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지는 않지만 매우 드문 케이스입니다. 심각한가요? P의 질문에 J는 들고 있던 노트로 잠시 눈을 떨구더니 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P가 J에게 연락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2주 전 주말 그 일 때문이다.
꺅! 오빠 비둘기가! 여자 친구는 P의 팔에 매달리며 그의 등뒤로 숨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둘기 한 마리가 그들이 가던 보도 한가운데에 내려앉았다. 비둘기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듯 뒷짐을 지고 고개를 위아래로 꾸벅거리고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에잉, 무셔워, 오빠, 어떻게 해. 여자친구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에 P도 무슨 말이라도 할 법한데 P는 아무 말이 없이 잔뜩 인상을 쓰고 비둘기를 노려보고 있다. P와 여자친구의 단 두어박자욱 앞에 착륙하였던 비둘기는 그 자리에 별반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는지 여유롭게 한 바퀴를 휘돌고는 푸덕거리며 러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안국동의 골목의 시간은 비둘기의 발이 지면에 닿으며 멈추었다가 퇴장하는 순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비둘기는 날아갔는 데 P는 여전히 아까와 같은 자세로 서있다. 오빠? 괜찮아? 여자친구는 P의 팔을 흔들고 P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여자 친구에게 말했다. 어이어어 어어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다. 오빠, 뭐라고? 어이 어어어... 오빠! 똑바로 말해, 무섭잖아. 순간 P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갑자기 큰소리로 어어! 하고 단음조의 소리를 내더니 여자친구의 팔을 뿌리치고 걷던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정말 말이 안 나왔어요. 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데, 분명 말을 하고 있는 데 귀에 들리는 것은 '어어어' 하는 소리였다구요. P는 J에게 그날의 일을 되도록 소상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일이 발단이 되어 헤어진 여자 친구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다. 그는 다만 잊혀질 때 즈음 되면 다시 증상이 나타나고 나타날 때마다 증상이 심해지는 이 공포를 이번에는 반드시 이겨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제가 숫자를 넷까지 세면 당신은 깊은 전생의 시간으로 돌아갑니다. 넷, 셋, 둘, 하나... 무엇이 보이나요?
저는 동굴 속에 있어요. 아주 어두운 동굴이에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요? 저는 여기에 알들을 부수러 왔어요. 알들을요? 네, 제 앞에 아주 큰 알들이 있어요. 공룡의 알들이예요. 공룡의 알들을 왜 부수려고 하지요? 우리를 잡아먹으니까, 우리는 공룡이 알에서 깨어나기 전에 죽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네들이 자라나서 우리를 공격해요. 우리의 아이들을 지켜야지요. 또 무엇이 보이나요? 동굴 밖은 온통 붉은색이에요. 동굴 입구에 비추는 붉은 하늘에 까만 달이 하나 떠 있어요. 그런데.. 달이 너무 빨리 움직여요. 아, 이건 하늘도 달도 아니에요! 공룡이 동굴의 입구에 붉은 눈을 데고 나를 노려 보고 있는 거예요. 아 이제 다 끝났어요 여긴 막다른 동굴이거든요. 이렇게 된 바예는 공룡의 알을 하나라도 더 부수고... 앗, 공룡이... 살려주세요!! 아악!!
오이를 못 먹는 사람들처럼,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그 수가 상당하다. 몇 해 전에는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인터넷상에서 만들어졌고 이 모임의 회원수가 30만 명을 넘어서자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며 꽤나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비둘기 공포증'이란 말을 만들고 이 모임을 통해 이 말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이 사이트를 만든 J였다. 그녀는 어려서 비둘기가 무서웠다. 성인이 되어서 어렵게 얻은 직장은 비둘기가 출근길에 자주 출몰하는 이유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자포자기했던 그녀는 자신의 비둘기를 향한 공포의 기원을 알아내려 심리학과 문화학, 무속과 첨단 뇌과학을 스스로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의 공포를 이겨냈을 때, 그녀는 이미 매우 노련한 상담사가 되어 다른 이들의 비둘기 공포증을 치유할 수 있었다.
다른 새들은 어떤가요? 그리 좋아하는 편도 싫어하는 편도 아닙니다. 참새는요? 마찬가지입니다. 치킨은 드시나요? 네 아주 좋아합니다. 치킨을 먹을 때 일종의 복수의 쾌감이 드시기도 하나요? 아니요, 전혀요. 팻을 키우고 계시나요? 아니요. 전에는 키워본 적이 있나요? 네, 어릴 적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혹시 개가 무서운 경우도 있었나요? 그럴 리가요. 비둘기를 마주하며 느끼는 두려움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네,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아주 거대한 힘이 내 앞에서 나를 위협하는 느낌? 꼼짝달싹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고양이와 마주한 쥐의 느낌이랄까요? 네 알겠습니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나머지 심층 질문지는 댁에 가셔서 마치시고 인터넷으로 회신하여 주세요. 치료의 단초를 찾는 질문들이니 아주 신중하게 답을 해 주셔야 합니다.
일주일 후 P는 모처에 자리한 상담실에서 J를 다시 만났다. 어떠세요 그동안 비둘기 때문에 다시 힘든 일이 있으셨나요? 네 특별하게는 없었습니다. 네 다행이네요. 저기 의자에 앉으시지요. P는 작은 사각형 테이블 앞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제가 P님의 인터뷰 결과와 보내주신 심층면담의 결과를 보니... 이런 말씀을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전생에 느꼈던 공포가 너무 강해서 그다음 매 생애마다 영향을 주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는 트라우마라고 하지요? 아주 뿌리 깊은 공포가 생과 생을 넘어 따라다니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어요. 잠시의 침묵 동안 P는 J의 말을 이해하려는 듯 J의 눈을 바라보며 눈꺼풀을 껌뻑거렸다. 그럼 치료는 되나요? 음... 해봐야 알겠지만 100% 치료가 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우선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해 보아야지요.
P님, 비둘기가 공룡에게서 진화된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사실 비둘기가 아니고 조류 전체가 공룡의 진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새가 공룡의 진화된 모습이라는 증거는 많이 있어요. 모두 과학자들이 밝혀낸 것이지요. P님의 비둘기에 대한 공포는 아주 오래전 공룡에게서 느꼈던 엄청난 트라우마에서 연유한다고 보여요. 그런데 왜 하필 비둘기이냐고요? 비둘기는 다른 새들과 달리 우리 주변에 많이 살고 있고 아주 가까이서 그 행동과 모습이 구석구석 보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P님의 트라우마를 발생시킨 어떤 특정 공룡이 직접적으로 비둘기의 진화 전 공룡과 일치하는 종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어요. 혹은 P님이 비둘기의 특정한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특히 걸음걸이요, 공룡의 걸음은 비둘기의 걸음과 같았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는 학자들이 많거든요. 비둘기와 공룡이 발의 골격 구조가 같으니까요.
P가 J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가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선 자신이 공룡이 있었던 시절에 살았었고 이후 몇 번을, 최소한 이번에 다시 태어났다는 것, 그 객체들 사이에는 기억과 트라우마 등 일종의 정신적 연관성이 있다는 것, 새는 공룡의 현대적인 모습이라는 것, 그 모습이나 움직임이 트라우마를 자극하여 생사를 넘보던 극도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 P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에게 가정의 진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J를 만나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자신의 병, 비둘기 공포증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다. 이 병이 나을 수 있다면 가정이나 과학 따위야 무슨 상관인가.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J는 미리 준비하였다는 듯, 두꺼운 종이에 프린트된 그림 한 장을 꺼냈다. 이 그림을 사시는 집에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붙여 두시고 기회가 될 때마다 바라보세요. 그냥 보면 안 되시고요.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보셔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정말 애정을 가지려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녀가 건넨 A4용지 크기의 그림은 다름 아닌 피카소가 두꺼운 선으로 그린 비둘기 그림이었다. 비둘기는 입에 꽃을 한 송이 물고 있다. 세상에 이런 평화롭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비둘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네 저도 알아요. 이 치유법을 스스로 실천하면서 너무나 힘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비둘기를 깨끗하고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원수를 사랑하라. 그 방법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P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림을 집어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저 깊이서 원망과 복수의 감정이 슬픔과 분노의 감정과 섞여 북밭혀 올랐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속으로 되뇌었지만 P의 마음은 그 반대쪽에 서 있다. 그는 더 이상 비둘기가 두렵지 않다. 당장에 뛰쳐나가 눈앞에 보이는 비둘기들을 한 마리라도 더 척결하고 생을 너머 이어 온 전생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다만 폭력으로 폭력을 맞서는 것을 막아서는 이 문명의 시대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