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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Nov 26. 2024

저도 오늘은 처음입니다

더 큰 사랑을 가지게 하소서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내셨나요?

네, 저도 잘 지냈습니다.


가을이라 해야 할지 겨울이라 해야 할지 잘 모를 계절입니다. 바람이 불면 노란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눈처럼 흩어집니다. 작년 이맘때에도 이 거리가 이런 풍경이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은 나에게 게으름을 선물하였습니다. 연일 고된 일과를 보낸 나에 대한 작은 선물입니다. 월요일이지만 침대 안에서 한참을 꼼지락 거리다 이불 밖을 나섰습니다. 체육관도 가지 않고 산에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주섬 주섬 옷을 입고 천천히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회사 건물 옆에는 매일 출근길에 커피를 사들고 출근하는 커피집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이 집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업무를 시작합니다. 나는 이 집 단골입니다. 아침에 가게를 여는 사람이 아르바이트생인지 사장님인지 혹은 어떤 아르바이트생인지에 따라 커피맛이 어떻게 달라지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집 커피는 하루의 업무를 시작하는 아주 중요한 루틴이지요.


매일 아침 일곱 시면 문을 열던 커피집이 오늘은 일곱 시가 한참 지나도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한 주의 시작을 뜨끈한 커피와 함께 하려 했던 나는 몹시 당황스럽습니다. 길을 건너 한참을 걸어 문을 연 다른 커피집에서 커피를 사 와야 하는지, 일단 사무실에 올라갔다 한참 후에 다시 내려와 이 집의 커피를 마셔야 하는지 매우 곤란한 질문에 빠졌습니다. 문을 여는 시간도 약속인데, 하며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가게의 문을 여는 것은 아침에 이 가게에 들러 커피를 사 마시는 손님들과의 약속입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요?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나는 아얘 다른 가계로 나의 루틴을 옮겨야 맞지 않을까요? 커피가 땡기는 만큼 화가 나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 매일 가기로 한 체육관에 안 가지 않았어? 아, 그건 다 사정이 있지. 실은 말이야...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니 오늘 이 커피집의 아르바이트생도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커피를 마시고 싶은 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화에는 항상 대상이 있습니다. 나의 불만이,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납니다. 그런데 그 아르바이트생이 내 친구이거나 혹은 가족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나는 화를 내기보다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을 먼저 할 것입니다. 그러니 화는 내 불만이 남의 사정 앞에 서는 일입니다. 나의 이기심과 옹졸함에 창피해져 올라오던 화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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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남을 해치지 않는 착한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남을 도우려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또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 실제로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 좋은 사람들이지만 이 세 부류의 착한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는 안전한 사람들이고, 두 번째 사람은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고, 세 번째 사람은 실제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능성과 행동은 무와 유처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행동이어도 그저 가능성으로 남은 무보다는 훨씬 큰 숫자입니다.


내가 마음에서 우러나 사람을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돌아봅니다. 지금 내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아마도 그 속에 나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든가 아니면 나는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바람이 깔려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인 즉, 내가 누군가를 도울 만큼의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착한 사람이라면 '되어야 한다'든가 그렇게 '보이고 싶다'는 바람이 끼어들 틈이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올 테니까요.


천국의 당근과 지옥의 채찍을 떠나, 다른 어느 욕심도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상대의 아픔을 헤아리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의지가 있어야 상대의 입장에 설 수 있고 그 사람이 처한 아픔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한다면, 그 이를 돕기 위한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올 것입니다. 공감은 나와 그를 하나로 묶고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빠짐없이 도우려 팔을 걷고 나서는 사람들을 봅니다. 참 오지랍이다 싶으면서도 어느새 그들의 너른 사랑이 부러워집니다. 나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큰 사랑을 가져보자고 되뇌입니다. 겨울이 또 한걸음 성큼 다가오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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