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신바시에서 만난 사람들
세상에 제일 어려운 사람이 말이 없는 사람이다. 과묵이다. 도대체 지금 어떤 기분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그의 꽉 다문 입에서 방언이라도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며 눈치만 본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면 나도 알 바 아니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끈끈한 풀 죽에 빠져있는 느낌이다. 내가 더더욱 수다쟁이가 되어가는 이유이다.
수년 전 동경에 출장을 갔다. 혼자 출장을 가면 밤처럼 심심한 시간이 없다. 혼술도 잠깐이고 하루 이틀이다. 혼술이 일반적인 일본에서는 이자카야에 혼자 앉아 핸드폰을 보며 사케를 홀짝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나는 그런 취미가 없다. 그러니 저녁 시간이 되면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터벅터벅 걸으며 사람들 사는 모습을 구경한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걷다 호텔로 돌아오면 아무런 미련 없이 잠이 들 수 있다.
신바시역과 유라쿠조역 사이에 있는 모던한 호텔에 방을 잡았다. 맞은편은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전통의 극단 다카라즈카 극장이 있고 길 건너에는 이름도 유명한 동경임페리얼, 제국 호텔이 서 있다. 하지만 정말로 볼 만한 곳은 신바시역을 중심으로 하는 번화가이다. 길게 이어진 좁은 골목에 빽빽하게 술집들이 들어서 있고 전철이 지나는 고가 다리 아래에는 아치모양의 공간 안에 문이 없이 들어선 선술집들이 줄지어 서있다. (신-바시는 새로운-다리라는 뜻이다. 멀지 않은 곳에 니혼-바시, 일본 다리라는 지역이 있다.)
애초에 이곳에서 혼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주위가 번잡하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에 혼자서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주인장에게 닭꼬치, 야키토리와 덥힌 사케, 아츠깡을 하나 주문했다. 혼술의 위험은 아무 말 없이 홀짝홀짝 들이키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금세 만취하는 것이다.
퇴근하고 몰려드는 직장인들로 가게가 가득 차자 나는 별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미안하여 자꾸 술을 들이켰다. 술 값으로 구경하는 자리 값을 치르려는 생각이었다. 이 시간만을 기다리며 퇴근시간까지 버텨온 직장인들이 달려오듯 자리에 앉아 "토리아에즈 비루"(とりあえず ビール, "일단 맥주")를 주문했다. 쭉 한 잔 들이켜고 진짜 하루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밀려드는 사람들로 이자카야의 자리가 채워지고 급기야 내 앞자리에 한 남자가 합석을 했다. 서른 즈음되어 보이는 남자는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한눈에 보아도 무척이나 멋을 부린 차림이었다. 특히 일본 남자들은 가방과 구두에 포인트를 둔다. 댄디!
우리는 한동안 각자의 술을 마셨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과 마주하고 술을 마시는 것이 불편했다. 생판 모르는 남과 지근의 거리로 마주 앉아 있으면 일단 시선 처리가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툭하니 말을 걸어 통성명을 하고 내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후쿠오카에 살고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는 데 동경에 출장을 왔다. 아주 어릴 적부터 동경에 자주 왔는 데 동경은 변하는 것이 없다 등등. 그의 이름에는 '호시'가 있었다. 최근 호시 신이치의 소설집을 샀는 데 일본어 실력이 못 받쳐주어 못 읽고 있다 등등의 의미 없고 무해한 말을 주절거렸다.
그는 나의 일기를 쓰는 듯한 아무 말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치거나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그가 했던 말의 대부분은 내가 콕 찍어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자기는 동북 지방에서 왔다, 한 대학교에서 일하는 데 교수는 아니고 직원이다. 옷 입는 것에 취미가 있다. 뭐 이런 대답을 들었지만 나머지 시간은 나 혼자 쏟아 놓는 말들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과묵하고 낯선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주절거리며 술 마시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는 좀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 호시씨, 원래 그렇게 말이 없나요? 그는 다시 씨익 웃더니 자기는 동북지방 사람이라 워낙에 말이 없다고 했다. 나루호도!(그도 그럴할씨!) 추운 지방 사람들은 말이 없다. 러시아 사람들도 잘 안 웃고 무뚝뚝하다. 나는 순간 과묵하고 순진한 동북 사나이를 좀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에게 농담을 날렸다. 아, 그렇지요! 동북 지방에서는 너무 추워서 무슨 말을 내뱉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버려 상대방에게 들리지 않는다면서요? 진짜 말이 얼어붙을 만큼 썰렁한 농담이다. 나의 말 다섯 마디에 그의 한 마디씩을 끄집어내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는 말 많은 외국인이 신기했는지, 아님 떠날 타이밍을 못 찾고 눌러앉아 있었는지,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마셨고,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다음 날 혹시라도 시간이 되면 이곳에서 보자고 했다. 시간은 정하지도 않았다.
다음날 저녁이 되자 나는 다시 이 가게로 왔다. 어제의 과묵한 청년을 더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시간 정도 혼술을 하며 한편으로는 호시씨를 다시 만나기를 기다렸는 데 그는 오늘은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한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음 그럼 오늘은 그냥 혼술로 마무리해야겠구나, 하는 데 옆자리에 딱 봐도 미국인인 청년 둘이 앉았다. 나는 이번에는 이 두 미국 청년과 모자란 술을 한 잔만 더하고 얼른 호텔로 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통성명을 하고, 나는 한국인인데 일본에 살고 동경에 출장을 와서 어쩌고저쩌고 떠들었다. 두 사람은 한 미국 회사에서 출장을 온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제와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이 두 미국 청년들이 번갈아 가며 그치지 않고 말을 하는 데 피곤한 내가 도대체 도망갈 타이밍을 잡지 못해 결국 이 둘을 데리고 가게를 두 번 옮겨가며 술을 떡이 되게 마셨다. 과묵 혹은 수다. 대체 중도는 어디에 있는가. 과묵한 호시씨가 몹시 보고 싶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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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정쩡한 침묵이 싫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탁 트고 말하는 것이 편하다. 누군가는 침묵이 배려라고 한다. 배려한답시고 혼자 앓거나 불편한데 말을 안 하려면 완벽하게 자기를 감추는 둔갑술의 고수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자들이여 주변을 답답하게 하지 말고 트인 입으로 말을 해라. 과묵을 타파하자! 좀 가볍게 가볍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