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국격을 날려버린 계엄과 탄핵 부결
대통령의 탄핵안이 사실상 부결되었다. 그제 밤 계엄령이 내려졌을 때, 이 시대에 이럴 수도 있나 했는 데, 오늘 밤은 계엄령을 내린 대통령의 탄핵 투표가 국회의 정족수 부족으로 불성립하는 것을 보며 다시 이 시대에 이럴 수도 있나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누가 보아도 이것은 너무하지 않나.
성정이 고르지 못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사람의 손에서 칼을 빼앗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글도 함부로 쓰지 못하게 될지 모르지 않나. 권력이 말 문을 막으면 사람들은 더욱더 큰 소리로 떠든다. 글쟁이들은 더욱 날 선 글로 권력을 겨누고 시민의 행동을 촉구한다. 하지만 그것도 좋은 시절일 때의 이야기이다.
구국의 일념으로 국민을 위하는 각하의 말씀을 안 듣고 깐죽거리는 먹물들에게는 예로부터 몽둥이가 약이다. 시범으로 몇 놈만 시원하게 두들겨 주면 나머지 샌님들은 알아서 입 조심, 글 조심을 한다. 어찌 잘못하여 윗분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열심히 자기 검열을 하게 되고 그러다 어느새 형님 입맛에 딱 맞는 글만 쓰는 어용 필객이 등장한다. 채찍을 피하니 당근을 주더라는 거다.
때마침 한강 작가가 스웨덴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처음으로 취재진 앞에서 수상에 관한 소감을 밝히는 자리였다고 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이 대한민국 국격을 상승시켰다고 호들갑을 떨더니 이제 노벨상 이야기는 계엄과 탄핵의 소용돌이에 묻혀버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다시 한강의 소설 속에 나오는 계엄의 시간이 또다시 우리 앞에 펼쳐질까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국격의 상승은 도루묵이 되었다. 말짱 도루묵이다.
한강의 인터뷰가 정치적 이슈에 묻혀버리 듯, 막상 글을 쓰려하니 오늘 하루 있었던 많은 일들이 오늘 있었던 정치적 이슈에 묻혀 버렸다. 나는 이 사태를 보며 정치가 결국 개인의 안위와 무관하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다.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까지 이런 무거운 질문을 던지게 하는 시대의 빌런에 화가 치밀었다.
국회는 결국 탄핵안을 발의하지 못하고 산회를 선언했다. 투표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된 주인공을 '내란죄의 수괴'라고까지 단정하던 언론들이 내일 아침부터는 이 죽지 않은 권력을 감히 무어라 부를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역사를 수십 년 전으로 되돌리려는 빌런의 시도를 미연에 막지도 못했지만 감히 내지른 범죄도 단호하게 처벌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나라꼴을 보며 참담하고 화가 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스스로 대단해하는 것만큼 대단히 높은 수준의 정치의식을 가지지 못했고 이 사태는 그 정도의 수준의 정치인들을 뽑은 나라의 민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뿐이다. 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아직 멀었다.
이 나라의 시민들이 한가득 숙제를 받아 든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