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미국의 현대 소설에 맛을 들였다고 스스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한야 야나기하라의 <리틀라이프>를 집어 들었다. 1, 2권 두 권으로 나뉘어 있는 데 한 권의 두께가 600페이지에 달한다.
두꺼운 소설은 끝까지 읽기 쉽지 않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모비딕>은 야심 차게 읽기 시작하였지만 딱 절반 정도 지점에서 멈추어 책장에 박제되어 있다. 며칠 전 <모비딕>을 꺼내어 읽던 부분부터 이어서 읽어 보았다. 이전에 읽었던 내용들이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역시 흐름이 완만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구체적인 내용이 기억나지 않고 중간부터 읽어도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두꺼운 책들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내친김에 이 벽돌책의 남은 절반을 읽을까도 생각했지만 중간부터 본 주말 드라마처럼 재미있게 완주하고도 절반의 스토리만 머릿속에 남을까 걱정되어 벽돌을 다시 책장에 조심스레 꽂아 놓았다.
소설을 읽기 힘든 시대가 왔다.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콘텐츠의 시대이다.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 또한 무수한 매체의 시대이기도 하다. 전달이 쉽고 흡수가 편한 매체들이 지적인 내용을 포함하여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사방으로 뿜어낸다. 이 시대에 소설을, 더구나 두꺼운 소설을 읽는 것은 조금 자학적인 취미란 생각도 든다..
책 만능론의 시대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책이 지혜와 지식의 원천으로 숭배되었다. 책의 형태를 자긴 것들 중에서 만화책과 잡지를 포함하여 무협지와 연애소설 등은 유익한 책으로 분류되지 못했다. 책 이외의 매체,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거의 유해할 수준의 오락물로 취급당하기도 했다.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며 유해성을 강조하였지만 온 국민은 저녁이 되면 수목드라마와 주말의 명화를 보러 바보상자 앞으로 모여들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하루 종일 쇼츠와 릴스, 유튜브를 끼고 사는 우리를 보면 무어라 말할까?
이제 활자로 인쇄된 책은 왕좌를 내려왔다. 전자책, 오디오북, 팟캐스트, 유튜브, 넷플릭스, 기타 등등. 매체의 다양성이 존중받는다. 그리고 매체가 무엇이든 그 안의 콘텐츠로 가치를 평가받는다. 이런 시대에 여전히 가장 불편한 매체는 책이다. 무겁고 느리고 눈이 아프다. 그런데 왜 아직도 책인가?
물론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의 독자는 더 이상 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책의 읽는 재미를 맛보기 전에 주의력을 빼앗기고 습관이 생기지 않은 사람들은 강요된 독서의 시기가 지나면 절대로 책을 펼칠 일이 없다는 주장이다.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책 만능론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의 일원으로 여전히 책을 읽는 이유를 독백처럼 항변하고 싶다.
책은 한 자, 한 자를 읽어야 하는 불편한 매체이지만 이런 불편함이 독자에게 주의력을 불러일으킨다. 주의 깊게 읽는 정보는 더 잘 이해되고 더 오래 기억된다. 독서가 주는 느린 흡수는 보다 깊게 생각하고 다방면의 연상과 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연상과 응용 중에 책의 내용과 자기 자신을 연관시키게 되고 이 과정에 서 책 안에 있는 보편적인 혹은 무관한 내용이 주관적인 해석과 실용적인 응용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책은 기호로 이루어진 2차원적인 매체이다. 다 보여주지 않아 상상하게 하고, 작품의 해석의 여지를 독자에게 남겨둔다. 결국 이 불편한 매체를 소비하는 독서란 활동은 바벨을 들 듯 사고력 와 연상력을 강화시킨다. 뇌는 독서(읽기)와 이해라는 과제를 수행하며 자기 효능감을 느낀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나는 똑똑하다는 자기 긍정이 상승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여러 이유를 정리해 보면 여전히 책은 꽤 폼이 나는 취미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