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까만 모습으로 지낸 지도 몇 만년이 지났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의 의견이 <중앙회>에 도착하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기대되는 일이지만, <중앙회>의 결정이 조금 더 늦어지면 인간들이 이 별을 완전히 고장 내어 우리도 이 별에 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중앙회>의 규칙대로 지구에 가장 먼저 도착한 그들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 중 하나(인간)를 선택하였다. 그들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이 별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보다 조금 늦게, 그래 보아야 몇 천년 늦게 이 별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종족을 우리의 숙주로 선택했다.
그들과 우리가 선택한 숙주들의 생태는 매우 이질적이다. 눈으로 보이는 확연하고 무수한 차이점 보다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이 숙주의 개체 하나하나에 개별적인 사고 능력을 부여한 반면 우리는 숙주 개체에 생존을 위한 위기 상황에서 최소한의 대처가 가능한 매우 제한된 사고 능력만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개체가 충분한 사고 능력을 충분히 부여받은 인간종 개체에는 '나' 혹은 자아라는 폐쇄적이고 인식이 생겨났고 각자가 자율적이고 개별적인 생존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들과는 다른 숙주 운영 방식을 택했다. 우리는 하나로 통일된 위대한 정신(하나의 나)이 모든 개체의 운명을 결정한다. 개체의 생존을 넘어선 종족의 번영과 영속이란 공통의 목표를 추구한다. 우리 숙주들이 숭고한 희생이 가능한 이유이다.
그들이 효율성을 위하여 부여한 개체의 '나'라는 인식이 개체를 종족보다 앞세우는 소위 이기심을 만들어 냈다. 개체들의 이렇게 강한 이기심은 오랜 우주 활동 중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이들의 이기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되었다. 결국에는 종족의 생존에, 다른 종족들도 함께 살아가는 이 별의 존속에도 위협이 되는 행동마저 하게 되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인간종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이 별이 회복 불가한 상황으로 치닿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따라서 정당한 이유로 <중앙회>에 이들을 지구별로부터 퇴출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중앙회>도 이 별이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우주 대표 회의를 통하여 곧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우리의 요청, 실은 이 별의 다른 모든 종족을 대신한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인간종과 그들을 숙주로 살아온 이들은 다른 별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들이 애초에 인간 개체에 자아를 부여하고 이기심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자업자득이다.
그들이 떠나면 우리는 이 별에서 다른 숙주들과 함께 영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태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종족은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이 별에 도착한 바퀴벌레족이다. 그들은 인간들이 바퀴벌레를 멸종시키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