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교수님의 철학자의 길 개장식
1920년 생인 김형석 교수님은 이제 곧 107살이 된다. 그가 97살이 되었을 때 이렇게 빌었다고 한다 "하느님께 앞으로 딱 10년만 더 활동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느님은 세상에 쓰임이 있는 소망을 이루어 주신다. 그 후로도 지금까지 선생은 왕성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선생은 함흥이 고향이다. 남으로 내려왔을 때 처음 내린 역이 신촌역이다. 그는 연세대학교 캠퍼스의 오른쪽과 왼쪽을 오가며 지금까지 신촌 인근에서만 살아왔다. 신촌을 못 떠나는 선생을 친구들은 촌놈이라 불렀다고 하지만 나머지 친구분들은 선생을 촌에 놓아둔 채 모두 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서대문구에 자리한 안산의 기슭으로 이사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안산은 말안장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선생이 이곳에 이사 왔을 때 안산에는 인적이 드물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저 끝까지 길이 나 있지 않았는 데 내가 걸어 다니면서 지금은 길이 되었어요. 이 말이 농인지 참인지 선생님만 안다.
현대의 뇌과학자들은 생각과 산책이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밝혀내었다. 발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진작에 철학자와 산책이 짝지어진 것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자의 길> 덕분이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나도 걸어보았다. 가파른 언덕길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철학자의 길>이 생겼다.
오늘 김형석 선생님이 걷는 안산의 산책길을 <철학자의 길>로 정하는 개장식이 있었다. 선생이 유명한 것은 최고령 철학자라는 명성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 근대의 산 증인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교육자로서 작가로서 철학자로서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해 왔다. 그의 철학은 단순히 사유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가를 쉼 없이 제시하여 왔다. 선생은 실천의 철학자이다.
선생의 글에는 '우리 민족', '우리나라'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고리타분한 표현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 현상과 이슈들은 근대로부터 이어져온 연속된 서사의 한 장면으로 해석된다. 그 연속적인 서사의 주체가 '우리 민족', '우리나라'이다. 긴 시대의 흐름을 그 안에서 겪고 관찰하며 가질 수 있는 통찰이다.
세계적인 철학자인 박순영 선생님은 김형석 교수님의 제자이다. 두 분 모두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로, 대가와 대가의 사제 관계이다. 박순영 선생은 스승의 약력과 스승의 철학이 가진 의미를 '고독과 사랑'이라는 꼭지로 명쾌하게 소개하였다. 이어 김형석 선생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철학자의 길>의 의미를 집약했다.
(이하 필자 요약 및 편력)
내가 살아오며 잘한 것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100세를 넘어 산 것입니다. 여러분도 적어도 100살은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잘한 것 또 하나는 부자가 된 것입니다. 부자는 여러 가지 부자가 있겠지만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돈은 자기가 쓸 만큼만 가지고 베풀지 않으면 그 돈을 관리하느라 일을 못하게 돼요.
돈도 명예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베풀어야 합니다.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부자라면 나는 왜 부자인가요? 내가 가진 것은 철학자와 교육자로서 지닌 사상입니다. 나는 내가 가진 사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풉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고 베푸니 항상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옵니다.
저는 이 안산을 걸으며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기 모이신 서대문구 주민분들에게는 좀 죄송한 말씀이지만 안산은 그동안 제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철학자의 길>을 만들어 주시니 이제 이 안산은 저만의 것이 아닌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철학자의 길>이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삶에 자양이 되고 많은 분들이 나누고 베풀고 섬기며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국에 <철학자의 길>이 생겨 다행이다. 그 길이 아름다운 산책길이어서가 아니고 이 땅을 지키는 철학자가 있고 그 철학이 대를 이어 발전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쓸 만큼만 가지고 모두 나누어야 한다, 다른 이들을 섬기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철학자의 말이 오랜 여운을 남긴다. 나는 무엇으로 섬길 것인가? 무엇을 베풀며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