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맥주 간략사

일본 맥주들의 간략한 발전사

by 박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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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인 나의 장인은 대단한 주당이시어 술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시나 절대로 입에 대지 않으시는 술이 하나 있으니 ‘맥주인 척’을 하며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는 맥주 맛 탄산 음료, ‘발포주(発泡酒)‘이다.


일본의 주세법은 ‘맥주를 맥아 함유 50%이상이며 알콜도수 20도 미만의 발효주’라 정의하고 있는 데 발포주는 이 맥주의 법위를 살짝 빗겨가며 세금을 줄임으로써 판매 가격을 월등히 낮춘 술이다. 발포주는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출시되었다. 현재 발포주의 판매량이 맥주 판매량의 절반에 근접하고, 전체 주류 판매 중에도 16%를 차지한다.


각 맥주 제조사는 다양한 발포주 제품을 출시 중이다. 발포주가 저렴하고 맛있는 맥주의 대용품으로 인기 몰이를 하며 최근에는 기존의 맥주 혹은 발포주와는 다른 원료와 제조법으로 제조한 소위 ‘제 3의 맥주’도 출시 되었다. 콩류 등 맥아 이외의 곡물을 사용하거나 기존의 발포주에 보리로 만든 다른 술이나 소주를 넣은 제품이다. ‘제3의 맥주’가 개발된 이유도 기존의 발포주보다 세금이 싸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세금이 가진 또 하나의 역할은 신제품 개발이 아닐까.


ii.


일본 맥주는 1853년 일본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와모토 코우민이 그의 집에서 맥주를 만든 것이 최초라고 전해진다. 1870년 노르웨이계 미국인이 요코하마에 ‘스프링벨리 브루어리(Spring Valley Brewery)’를 열었고 그것이 지금의 기린맥주로 이어졌다. 1876년에는 일본인이 문을 연 최초의 맥주 양조장인 삿포로맥주양조소가 설립되었고 1889년에는 아사히맥주의 전신격인 오사카맥주 주식회사가, 1893년에는 ‘에비스’를 만든 일본맥주가 설립되었다.


1906년, 삿포로 맥주, 오사카 맥주(아사히), 일본 맥주(에비스)를 통합하여 대일본맥주가 생겨났다. 대일본맥주는 이어 동경맥주와 일본맥주광천을 흡수했는 데 일본맥주광천이란 회사는 지금도 아사히 음료에서 출시되고 있는 일본의 대표 음료 ‘미츠야 사이다’를 만들던 회사이다.


한 때 (1935년) 全일본의 맥주 판매량의 65%를 점유하던 동일본맥주는 2차대전 후 미군정의 ‘과도경제력집중배제법’에 의해 해채되어 아사히맥주와 일본맥주(현 삿포로맥주)로 나뉘었다. 이 두 회사들과 함께 기존의 기린맥주, 1953년 미군정하의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오리온맥주, 위스키를 제조하다1963년 맥주 사업을 시작한 산토리맥주가 일본의5대 맥주 브랜드로 불리운다.

(참고 : 일본 내 맥주 점유율, 아사히 39.1%, 기린 31.8%, 산토리 16.0%, 삿포로 12.0%

, 오리온 0.9%, 2018/1월 기준, 일본경제신문)


한국의 맥주는 1933년 대일본맥주가 세운 조선맥주와 기린맥주가 세운 소화기린맥주로 부터 시작되었다. 광복 후 조선맥주는 하이트맥주로, 소화기린맥주는 오비맥주로 민간에 불하되었다. 이후 1992년 진로가 진로쿠어스맥주로 맥주 사업에 뛰어들며 3사 체계가 이어지다 진로쿠어스(카스맥주)가 오비맥주에 인수되었고 2014년 롯데가 클라우드로 맥주 시장에 뛰어 들며 한국에서는 지금도 딸랑 세 개의 대형 맥주 회사와 몇 개의 보일락 말락한 신생 브루어리들이 맥주를 만들어 가고 있다.


iii.


장인의 친구분 무라카미씨로 말할 것 같으면 맥주는 기린의 ‘이치방시보리(一番しぼうり)만 드시고 담배는 필터가 없는 호프(HOPE)만 태우시는 매우 고집스런 분이시다. 그 댁 현관에는 기린 맥주가 짝으로 쌓여 있고 거실에는 보루 채 쟁여 놓은 ‘호프’담배가 눈에 들어 온다. 그 집에서 혼자만 피고 마시는 것을 생각하면 지나친 비축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이치방시보리(맥주)와 호프(담배) 만큼은 거를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인다. 맥주 회사들이 열심히 신제품도 출시하고 계절별로 한정판 맥주도 나오니 이것 저것 마셔보고 싶을 법도 한 데, 무라카미상은 오로지 ‘이치방시보리’로만 정주행한다.


맥주의 맛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소수가 좋아하는 맥주는 있어도 다수가 기피하는 맥주는 없다. 정말 맛 없는 맥주란 애초 시장에 나오기 전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맥주의 스펙트럼 안에서 자기만의 맥주를 찾으며 살아간다. 더 많이 돌아다니고 더 다양한 맥주를 마셔 볼 수록 맥주의 스펙트럼은 넓어진다. 마치 여행이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과 같다. 세상의 누군가가,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맥주가 ‘나의 맥주’가 될 리는 없다. 이 세상에 여전히 다양한 맥주들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맥주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유이다.


맥주 한 잔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느낌을 준다. 맥주 잔을 들 때의 손목에 느껴지는 무게감, 막 따른 거품이 입술 끝에 닿을 때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 벌컥 밀려 들어 혀를 타고 넘어가는 느낌, 목젖을 닫고 잠시 머금고 있을 때의 알싸함, 목구멍을 내려가는 차가움, 목구멍 끝에 남은 쌉싸름함과 역진해 오는 칼칼함, 마지막으로 총구의 연기처럼 코로 넘어오는 호프의 향기, 그리고 빈 잔을 내려 놓을 때 나는 경쾌한 울림 등등. 하지만 누구도 딱 꼽아서 어떤 느낌으로 맥주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술맛이란 오히려 술 이외의 것들로 좌우 되는 것이 아닐까.


친구들과 마시는 맥주는 항상 좋다. 맥주가 맛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맥주 때문에 자리의 즐거움이 줄어들 리는 없다. 즐거운 자리의 맥주는 즐거운 맛으로 기억이 된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싶을 때면 어둑한 조명에 김광석 노래가 흐르는 호프집이 떠오른다. 반대로 그런 곳이라면 어디든 시원한 맥주가 한 잔 마시고 싶어진다. 그곳은 멋진 친구와 맥주 한 잔을 올려 놓고 수다를 떠는 공간이다.


혼자 마시는 맥주는 심심하다. 마주 앉아 잔을 부딪혀줄 사람도 없으니 속도도 안 붙고, 찔끔 찔끔 홀짝이니 목넘김도 시원치 않다. 맥주 한 캔을 비우고 뭔가 부족한 듯하여 냉장고에서 두번 째 캔을 꺼냈다가 다 못마시고 결국 김이 다 빠져 버린 적이 여러 번이다. 그래도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아무래도 영화나 책보다는 음악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유튜브에서 <유희열의 스케치북> 이나 <배철수의 음악캠프> 같은 것을 틀어 놓고 마시다 보면 흥도 오르고 술이 아주 잘 들어간다.



iv.


어쩌다 시작한 100일 금주가 오늘로 73일 째이다. 너무 심심하여 100일이고 뭐고 술이나 마셔야지 하는 데 막상 술 마실 일도 같이 마실 사람도 없다. 코로나 탓에 서울로 가는 비행기편도 뱃길도 막히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100일을 꽉 채우게 생겼다. 서울에 가면 어둑한 조명 밑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사랑하는 이들과 즐거운 맥주를 나누겠다. 첫 잔은 양보없이 ‘원샷!’을 하리라.



- 추기: 요즘 기분을 낸다고 밤마다 논알콜 맥주를 한 캔 씩 마시고 있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배만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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