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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일탈(逸脫), 낮술(晝酒)

싱그런 5월, 점심식사와 곁들인 와인과 맥주

by freejazz


문득 달력을 보니 5월이었습니다.

그런데 5월의 첫날엔 비가 많이 와서

5월이 왔음에도 다소 무거운 마음이었는데요.

하지만 5월의 둘째 날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맑아져

그제야 비로소 싱그런 봄날을 맞았습니다.



한편, 5월 2일은 평일(금요일)이었지만,

아껴둔 개인 연/월차를 사용해서

징검다리 연휴로 쉬는 직원들이 상당히 많았는데요.

5월 3일부터 6일까지 장장(長長) 4일간의

어린이날 황금연휴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5월 2일 금요일에 휴가를 내면

5월 1일부터 무려 6일간!

아주 긴 휴가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일본의 골든 위크처럼 말이지요.

참고로,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다섯 명의 직원이

2열로 등을 지고 있는 구조의 자리 배치인데,

그래서 이른바 샌드위치 데이였던 5월 2일엔

제 자리 근처에 있는, 저를 포함한 열 명의 직원 중

오직 저 혼자만 출근을 했더랬습니다.



일 년 12개월 가운데,

정확히 삼분의 일이 지난 시점이었던 5월의 둘째 날,

연초부터 너무 숨 가쁘게 달려만 왔던 터라

이제 와서 2025년을 돌아보니,

저는 그저 머리가 멍할 뿐이었습니다.

뭔 일을 이렇게 많이 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랬는지…

간혹 모든 직원들이 퇴근하고 저만 홀로 남겨진

회사 사무실에는, 적막감과 함께

왠지 모를 소외감까지도 느껴지곤 했네요.



하지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늘 똑같은 아침이 반복되었습니다.

게다가 전날 몇 시에 퇴근했는지와 전혀 무관하게

어쨌든 아침엔 정시 출근을 해야 했고요.

한편, 회사 사무실은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적당한 실내 온도와 조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더덕더덕 붙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출근 직후의 아침엔,

나만 왜 이렇게 일이 많은지, 하는 불만이 밀려들어

그들과 맞닿은 게 늘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아침 공기는 매일 무겁게 저를 짓눌렀습니다.

그래서 출근 후엔 인상을 좀 쓰면서

(나 어제 야근했으니 말 시키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서

말없이 인터넷 그룹웨어에 접속하면

그날 하루동안 풀어야 할 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걸 빨리 마치고 정시에 퇴근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헤드셋을 끼고 영상회의 하는 사람들과

누군가와 전화통화 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들 틈에서

쉴 새 없이 머리를 돌려 문서를 작성했고,

또 전화벨이 울리면 입을 열어 전화기에 대고

참 악착같이 떠들어댔습니다.

그렇게, 제 목과 어깨 그리고 허리 관절은

하루 열두 시간 이상을 같은 자리에 앉아 있게끔

어떻게든 잘 버텨주고 있었는데요.

아침 7시 55분부터 저녁 20시까지,

혹은 21시, 22시까지...

그리고 어떤 날은 하루를 넘겨

다음날 0시를 지나서까지...

어떻게든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직장 생활이 이렇게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는지...

주(週) 52시간은 이미 가뿐히 초과해서 근무하는 게

제 일상이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젠, 저의 기안(起案) 만으로도

부품단가의 결정 기준이 만들어지고

제 손 끝에서 철강 코일 몇십 톤 혹은 몇백 톤이

아무렇지도 않게 운반되고

또 제 승인을 거쳐 값싼 중국産, 동남아産 수입품이

바다를 건너 인천항, 평택항, 그리고 부산신항에

도착하여 하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계절이 바뀌어 봄이 온 것은

급하게 뛰쳐나가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제가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에 핀 꽃들을 통해서나

잠시 느낄 뿐이었고,

그런 매일 아침, 혼잡도가 극에 달하는

지하철 2호선의 지옥 구간(사당에서 강남 방면)에서

넋이 나간 채로 버티다가 선릉역에서 겨우 하차하면,

사무실까지 걸어가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일이 잦았지요.



그렇게 쌓여가는 피로에...

간혹 저는 시도조차 하지 못할

일탈(逸脫)을 꿈꿨는데요,

그날은 갑작스레 생각을 했던 게 바로

다름 아닌, "낮술"(晝酒)이었습니다.

5월 2일, 대부분의 직원들이 휴무했던 그날.

어쩐 일인지 그날엔 윗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출근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일이 많아 휴가를 내지 못하고

출근했던 후배 직원들과 같이

사무실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기로

점심 약속을 미리 잡았고요.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후배 직원들에게,

오후에 "숫자"로 분석해야 하는 업무가 있는지 여부를

사전에 물었습니다.

이후 그런 성격의 업무가 없다는 것을 미리 확인한 뒤

'업무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라는

전제조건을 깔고 결국 눈치 보지 않고 과감하게

"낮술" 카드를 꺼내 들었네요.



그날 저는, 5월의 시작을

직장인에게는 소소한 일상(日常) 속에서의

크나큰 일탈(逸脫)인,

"낮술"과 함께 맞았습니다.

그래서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던 한낮의 테헤란로에서,

이태리식(式) 화덕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샐러드와 함께

와인 한 잔과 작은 맥주 한 병을 비웠네요.

그래도 와인과 맥주 딱 한잔씩에서 깔끔하게

잘도 끊어냈고요.

그렇게 단 한 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의 이태리産 화이트 와인과

네덜란드의 자랑인 초록색 병에 담긴 하이네켄 맥주를

한잔씩 하는 게

사실 범죄 행위는 아니었는데도,

엄청난 스릴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일탈을 맛본 것 같습니다.



직원들과 비록 적은 양이었지만

그래도 약간 알딸딸할 정도의 “낮술”을 곁들인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센터필드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바라본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예뻐 보였고요.

또한 같이 있던 후배 직원들은 모두

어쩌면 저와 "공범(共犯)"이었기에,

무엇보다 친밀감과 유대감, 그리고 동질감이

한낮의 푸른 하늘을 찌를 정도로

극에 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동안 느꼈던 마음속 스트레스가

"낮술"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극적(劇的)인 매개체로 인해

어느 정도는 사그라든 것 같았습니다.



혹시라도 앞으로 이런 날이 또 올 수 있을까요?

후배 중 한 명은 그날이,

개기일식(皆旣日蝕) 날이었다고

비유해서 표현을 하더군요.

정말 특이하게도 그날엔 저보다 높은 직책의 임직원이

단 한분도 계시지 않았으니…

개기일식 같은 날이라고도 명명(命名)할 수 있겠죠!

개기일식은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현상으로,

태양-달-지구가 일직선으로 정렬될 때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는 절대 흔한 현상이 아니죠.

물론, 지구 전체로 보면 약 1~2년에 한 번꼴로

여러 지역에서 관측이 가능하지만,

같은 지역에서 개기일식을 다시 관측하려면

약 375년이 걸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지난 5월 2일과 같은 그런 날이 아니면

"낮술"은 이젠 사실상 힘들다고 봐야지요.

하지만, 나중에라도 또 이런 기회가 온다면,

그리고 특히, 그날 저와 공범(共犯)이었던

그 후배들과 함께라면,

5월의 싱그러웠던 그날

그 레스토랑에서의 여유로웠던 분위기와

나와서 같이 걷던 길에서의 따뜻한 햇살과 풍경을

서로의 마음속에 같이 공유하고 있기에,

"낮술"은 이후에도 힘든 하루를 잘 버틸 수 있는

또 한 번의 활력소(活力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단 한마디 언급도 없이 갑자기

한낮의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맥주 중

뭐가 낫겠냐고 물으며 술을 주문하자던,

보잘것없는 선배의 엉뚱한 제안에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낮술을 흔쾌히 받아줘서

저의 힘든 직장생활에 작은 위로가 되어준,

두 후배님들께

(물론, 이 글을 보시진 않겠지만...)

이 글을 빌어 큰 고마움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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