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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Jul 14. 2019

150g의 악기 하나로 세계무대 누빈다···"하모니카


아시아 태평양 하모니카 대회 3관왕 
세계대회 트레몰로 부문 1위
박종성 하모니시스트


“작고 가볍고 단순한 이 악기로 세계 무대를 누빌 수 있다니 감사하죠.”


박종성, 그는 국내 몇 없는 전문 하모니카 연주가다. 하모니카 하나로 클래식·재즈·국악까지 연주한다. 그의 연주 중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버스커버스커 노래 ‘꽃송이가’. 하모니카 연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장범준이 “좋아좋아 하모니카 솔로”를 외칠 때 절정을 이룬다.

photo by_김지아


◇"24시간 내내 음악 생각만···내 인생 자체가 하모니카"


"저는 늘 하모니카 생각을 해요. 한순간도 음악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마주하는 일상, 겪은 일들, 이야기···. 모두 어떻게 음악으로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모니카 연주를 들은 것도 항암투병을 하던 엄마의 병간호를 하던 중이었어요. 병실에서 잠깐 나와 병원 안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산책로 스피커에서 마침 하모니카 연주가 나왔죠. 그 자리에 앉아 한참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까. 이런 선율을 만들고 싶다. 언젠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후에 알고 보니 그 곡은 세계 최고 하모니카 아티스트 지그문트 그로븐(Sigmund Groven)의 연주였더라고요.”


그는 ‘하모니카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하모니카는 고상하고 값비싼 클래식 악기와는 거리가 멀다. 예전부터 거리의 맹인 악사가 구걸하며 주로 연주해왔던 악기다. 문구점에서 3000~1만5000원 사이에 살 수 있다. 서민 악기다. 그러나 150g 정도의 하모니카로 만드는 선율은 세상을 꽉 채울 정도로 풍부하다.


천재적 재능? 없었다. 예술가의 삶을 지원해줄 만큼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하모니카를 불 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 덕분에 세계적인 하모니카 대회를 석권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17년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조수미 성악가와 함께 협연을 펼쳤다.

◇초3 때 문화센터에서 접한 악기···대회 참가 위해 사비 들인 스승


“초등학교 3학년 때 외할머니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하모니카를 주셨어요. 어떻게 연주하는지 몰라 책상 서랍에 보관해뒀죠. 초등학교 6학년, 어머니가 서울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 전단지를 보다 하모니카를 배워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취미로 시작했어요. 평생 하모니카를 연주할 줄은 상상도 못했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스승 최광규(현 한국 하모니카아카데미 회장)를 만났다. 전문 하모니카 연주자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선생님이다. 박종성 연주가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생 때 인천에서 광양으로 이사를 갔다. 최광규 선생님은 전남 광양까지 따라와 레슨을 할 정도였다.


2002년 아시아·태평양 하모니카 대회가 열렸다. 가고 싶었다. 일본에서 개최해 100만원가량의 참가비와 여비가 필요했다. 스승은 사비를 들여 박종성 연주자(당시 고1)가 대회에 도전할 수 있게 도왔다. 그는 청소년 트레몰로(비브라토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하모니카) 부문 금상으로 보답했다. 스승을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누며 결심했다. 꼭 세계 최고의 하모니카 연주자의 꿈을 이루겠다 다짐했다.


“하모니카 전문 연주자를 꿈꿨지만 국내엔 진학할 수 있는 학과가 없었습니다.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학과에는 관현악기 연주자를 따로 뽑는 전형이 있어요. 주로 플루트·색소폰 연주자가 지원합니다. 하모니카 연주자로 지원했죠. 하모니카로 대학에 입학한 건 제가 국내 최초였어요. 대학에 가니 하모니카를 낯설게 보는 시선이 많았어요. 대부분 하모니카는 베이스나 기타처럼 흔한 악기지만 연주에 꼭 필요하진 않다 생각해요. 저를 불러주는 연주팀도 많지 않았죠. 직접 팀을 꾸리거나 공연을 기획해야 했습니다. 하모니카로 연주할 수 있는 클래식 곡도 적어 작곡을 해야 했습니다.”


박종성 하모니시스트는 “늘 기회를 스스로 만들었다”고 했다. 국내에선 하모니카를 전공할 수 있는 학과가 없을 정도로 비주류 취급을 받는다. 해외도 마찬가지다. 하모니카 아티스트가 활약할 수 있는 대회도 극히 적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청소년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했던 아시아·태평양 하모니카 세계대회와 4년에 한번 열리는 세계 하모니카 대회 정도가 가장 크다. 그는 이 두 대회를 모두 한국인 최초로 1위를 기록했다. 2008년 아시아·태평양 대회 3개부문(성인독주·이중주·앙상블)에서 1위, 2009년 세계 하모니카 대회에선 직접 작곡한 곡을 연주해 트레몰로 독주 1위를 차지했다.

2019년 6월 예술의전당 앨범발매기념 콘서트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것···매일 5시간 이상 연습"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도 1등을 해야 한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하모니카는 기교를 부릴 수 없는 단순한 악기예요. 호흡하듯 가볍게 불어야 반응하거든요. 1억원도 넘는 최고급 클래식 악기에 비해 제가 연주하는 하모니카는 70만원에서 200만원 사이입니다. 마음에 부담감이 없어야 좋은 소리가 나오죠. 이 사실을 깨달은 건 2008년 아시아·태평양 대회에서였어요.”


“자작곡을 들고 대회에 처음 도전했습니다. 기대감이 컸죠. 하지만 첫 예선에서 불합격했습니다. 악기(트레몰로 하모니카)를 쳐다보기도 싫어져 호텔 침대에 던져두고 나왔어요. 하지만 경연장에 도착해보니 추가 합격자로 명단에 올라와 있는 거예요. 당장 1시간 안에 대회를 치러야 했죠. 다시 숙소에 돌아가기 어려워 곤란해하고 있는데 저를 인솔해주셨던 선생님께서 악기를 챙겨오셨더군요.”


“그때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두 달 지난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도와주셨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대기실에서 눈물이 계속 나왔어요. 제가 하모니카 연주자가 되는 걸 반대하셨거든요. 어머니께서 걱정하던 게 떠올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죠. 연주 전에 너무 많이 운 데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해 수상을 못할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그 대회에서 1위를 했어요. 연주자의 본분은 진심을 전달하는 일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photo by_김지아

기회는 준비한 자만이 잡을 수 있다. 그는 20년째 매일 4~5시간씩 하모니카를 연습한다. 2012년 버스커버스커 ‘꽃송이가’ 음반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이었다. 박종성씨는 학교 선배를 돕기 위해 하모니카 연주를 녹음하러 녹음실에 갔다. 마침 그곳에 버스커버스커의 앨범을 제작하는 밴드마스터가 있었다. 그의 하모니카 연주를 듣더니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 덕분에 음반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OST,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OST에도 이름을 올렸다. 박종성 하모니시스트는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넘나들며 하모니카만의 장르를 개척한다.


◇"좋아하는 일로 충분히 먹고 살아···하모니카 편견 바뀌었으면"


'하모니카로 먹고 산다'는 그에게 수익은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예술가의 직업 특성상 구체적인 수익 규모를 밝히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음악 외에 다른 활동을 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구입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나머지 돈은 저축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수익이 난다고 설명했다. 박 연주자는 “그러나 예술계열 특성상 시기별로 편차가 있는 편이다”라며 “특수한 경우가 많아 모든 하모니카 연주자의 수익이 충분한 편이라고 일반화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더 많은 하모니카 연주자들이 생계 걱정 없이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제 역할인 것 같습니다. 하모니카는 역사가 200년도 지나지 않은 악기예요. 하모니카가 유명해진 계기는 미국 남북전쟁 때 군인들이 지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연주하면서부터라고 해요. 잘 꾸며진 무대 위보단 일상에서 부는 악기였던 셈이죠. 하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악기라는 장점도 있어요. 대부분 바순은 몰라도 하모니카는 아니까요. 게다가 저는 이 하모니카로 6월6일 예술의전당에서 단독 콘서트도 열었죠. 꽉 찬 객석을 보는데 보잘것없는 나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러 와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오케스트라 하모니카 협주곡을 직접 만들어 공연하는 꿈을 꾸고 있어요. 지난 2년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원 오케스트라 지휘과에서 석사과정을 밟았습니다. 작곡·지휘를 더 공부한 것도 하모니카에 대한 연주법과 교육 시스템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였어요. 나이가 들어도 하모니카를 불때 느끼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제 연주로 하모니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바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 jobsN 김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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