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코엑스 앞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파도 때문이다. SM 타운 코엑스 아티움 건물에서 파도가 세차게 몰아친다. CNN은 5월20일 ‘거대한 3D 파도가 서울 강남 거리를 휩쓸었다’고 보도했다. 예술 작품이다. 작품 이름은 ‘Public Media Art # 1_ WAVE’.
작품을 기획한 곳은 디지털 미디어 아트 전문 제작 업체 디스트릭트(d’strict)다. 삼성전자의 LED 사이니지(전자 간판) 위에 작품을 구현해냈다. 착시현상으로 입체감을 느끼게 해주는 아나모픽(Anamorphic) 방식이다. 아나모픽 아트란 각자 다른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배열해 하나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디스트릭트 이성호(41) 대표를 만나 강남 한복판에 파도를 만들어낸 과정을 들었다.
◇삭막한 도심 속 상상력
“'Public Media Art # 1_ WAVE'는 디스트릭트의 공공예술 프로젝트 중 첫번째 작품이다. 코엑스 앞을 지날 때면 늘 ‘답답하다’는 감정이 들었다. 코엑스뿐만이 아니다. 교통체증 심한 서울 도심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 시원해지는 자연물이 필요했다.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파도가 떠올랐다. 물결이 부서지고, 또다시 세차게 파도치는 장면이 이 도심에 필요하다 생각했다.”
처음 파도가 등장한 시기는 지난 4월이다. 작품 공개 당시 반응은 이렇게까지 뜨겁진 않았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공식 유튜브 채널에 WAVE 영상을 올리자 조회수가 급등했다.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 곳곳에서 ‘한국 디자인 회사가 만든 파도’라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해외에서 전화·이메일 문의가 쏟아졌다. 뉴욕 타임스퀘어를 비롯한 전세계 주요 전광판 광고 담당자, 유수의 해외 뮤지엄, 이스탄불 시 등이 연락해 함께 작업하자 제안했다.
◇최고 기준 고집하는 예술가 집단
파도는 전광판이나 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다. 하지만 디스트릭트의 WAVE가 전세계인들의 눈길을 끈 것은 실감 나는 연출력이다.
디스트릭트 유튜브 채널의 WAVE 영상에는 “서양 현대 예술가들은 벽에 바나나를 테이프에 붙인다. 한국 예술가들은 8K UHD LED Screen에 파도를 넣는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이탈리아 출신 예술가 마우리칭 카텔란(Maurizio Cattelan)이 벽에 붙인 바나나 작품으로 2019년 12월 1억4000만원을 벌어들인 것을 두고 비꼰 것이다. 세계가 감탄하는 최고의 기술력을 선보인 디스트릭트는 정작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예술가 집단’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적 홍보활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
“디스트릭트는 자존심 센 크리에이터 집단이다. 우린 스스로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작업물을 만든다. 모든 구성원이 이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창업자 고(故) 최은석 전 대표님의 정신을 잇고 있다. 아티스트의 자존감을 항상 강조하셨던 분이셨다. 당장 수익을 내기 위해 수준 낮은 작업물을 만들지 말라고 늘 당부하셨다.
디스트릭트 크리에이터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아티스트들이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회사가 돈을 많이 준다거나, 유명하다거나, 복지가 좋아서가 아니다. 가장 높은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는 작업을 한다는 철학을 공유하고 있어서다. 세상이 디스트릭트의 작업물을 얼마로 평가하든 관심 없다. 우리가 자부심을 느꼈다면 충분하다. 힘들고 열악해 보이지만 이런 조직은 결국 빛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웹 디자인 외주업체에서 실감 콘텐츠 개척
디스트릭트는 1세대 웹디자이너 고 최은석 대표와 김준한 이사가 2004년 공동 설립했다. 카카오 조수용 대표, 배달의민족 한명수 상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유명 디자이너들이다. 디스트릭트는 웹사이트 외주 제작 업무를 맡아오다 2009년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웹기반을 벗어나 ‘실감콘텐츠(가상의 디지털 콘텐츠를 실제처럼 조작할 수 있게 만드는 콘텐츠)’ 산업으로 뛰어들었다.
“2009년까지 웹디자인 외주용역이 회사의 주 수익원이었다. 디스트릭트는 삼성전자·LG전자·SK텔레콤 등 국내 최정상 기업의 의뢰를 받아 작업한다. 하지만 용역 업무에만 머물러있을 수 없었다. 자체적인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야 했다. 외부 기업 의존도를 줄이고 해외시장으로의 진출하고 싶었다. 웹디자인에서 실감 콘텐츠 산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WAVE도 없었을 것이다.”
◇무료로 감상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WAVE는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다. 상업적 요소를 전부 배제했다. 애초에 광고나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코엑스 전광판에 걸린 WAVE 자체만으로 수익이 안 난다는 말이다. 프로젝트 최대 수혜자는 SM 아티움을 비롯한 전광판이 걸린 건물의 상권 관계자들이었다.
“WAVE는 디스트릭트가 만든 ‘공공미술’ 작품이다. 누구나 와서 무료로 마음껏 볼 수 있다. 앞으로 계속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웨일(WHALE·고래)’, ‘소프트바디(SOFT BODY)’ 등 아직 공개하지 않은 작업물들이 남아있다. 전부 디스트릭트 내부 투자로 자체 제작한 콘텐츠다. 왜 이런 프로젝트를 하냐고? 디스트릭트의 크리에이티브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다. 아티스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담아내고 싶다.
대신 라이선스 사업으로 수익을 벌어들인다. 작품을 전시하는 부동산 업체들과 계약하는 방식이다. 수많은 외국인이 WAVE를 보기 위해 코엑스 SM 아티움 앞으로 모인다. 구경을 마친 뒤 자연스럽게 SM 아티움 건물로 이동할 것이다. 주변 상권에 수익이 증가한다. 이같은 효과에 세계 곳곳에서 러브콜이 오고 있다. 작품 자체에 대한 예술정신은 훼손하지 않으면서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는 시스템이다. 회사에서 전부 제작비용을 투자했다. 이전부터 긴밀하게 협업해온 CJ 파워캐스트측으로부터 WAVE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서울대 경제학·삼일 회계법인 출신 CEO
디스트릭트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리스크가 높은 사업모델이다. WAVE라는 핵심 콘텐츠와 라이선싱이 있다 하더라도 각 지역마다 LED 사이즈, 재질, 규격이 전부 다르다. 완성도 높은 작업이 나오려면 맞춤 제작 과정이 필요하다. 시간과 돈이 든다는 의미다. 또 각 장소마다 주변 분위기도 다르다. 코엑스 WAVE처럼 주변 경관과 잘 어울려 폭발적인 반응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외부 간섭 없는 아티스트의 창작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이성호 대표가 고안해냈다. 이성호 대표의 이력도 평범하진 않다. 2005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2006년 삼일회계법인에서 일하다 2007년 디스트릭트로 이직했다. 2016년부터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다.
“물론 경영자로서 실적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 매출을 올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더 많은 외주 프로젝트를 하고, 짧은 기간 내에 더 많은 작품을 만들도록 몰아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창업자셨던 최은석 대표님께서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크리에이티브 가치를 지켜내고 싶다. 또 회사가 상업적인 선택만 한다면 지금껏 아티스트라는 자긍심 하나로 버텨왔던 핵심 인력들이 떠날 것이다.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 의지는 꺾이고, 성장 동력 역시 수그러들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회사의 생존전략을 생각해봤을 때, 크리에이터의 가치를 지켜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언젠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것이라 믿는다. CEO로서 목표가 있다면 단 하나다. 디스트릭트 팀원들이 경제적으로 더 높게 대우받는 것이다. 우리가 창작활동에만 전념을 다하고, 그 결과를 경제적으로 보상받아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유능한 크리에이터라면 누구나 함께하길 꿈꾸는 회사로 성장하고 싶다.”
글 jobsN 김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