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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Sep 13. 2016

낡을수록 낯설어지는 것이 있다

오래된 감정의 증발 혹은 발효

마지막 방학이 끝났다.

셰익스피어와 애거서 크리스티 전권을 읽어보자라는 다짐과

프렌즈를 정주행하자는 계획은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적어도 제주도에 발 한번 디딜 수는 있을 줄 알았는데

서울 근방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유일한 위안이라면

폭염만큼 바빠서 비참해질 새가 없었다.


계획을 세울 때 믿을 수 있는 건

찝찝한 미심쩍음과 의심 뿐이다.

그리고 이 계획이 망한다 할지라도

솟아날 구멍은 있을거란 막연한 낙관 또한,

믿어야 한다.


좋아했던 사람을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 건

그 사람과 헤어지며 울던 한달 내내 간절하게 그린 장면이었지만

가벼운 웃음처럼 얼마나 허무하게 스쳐갔는지,

그 사람의 일과를 떠올리고 상상하는 일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그 날들은

절대 납득할 수 없었을 순간이었다.


그 때 그 깔깔했던 날들이 정말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맞는지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감정들이 어렴풋하게 소환되자

다만 낯설었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가졌고

그래서 날 미워하는 날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버린 이상

살아갈수밖에 없단 숙명에 (이것도 요즘엔 질문을 던지고 있는 명제긴 하다만)

그래도 밥먹고, 언젠가 있을 좋을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불과 일년 전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고, 가장 애틋했던 사람이,

길 위의 스치는 인류로 평범해져버리는 순간

우린 더 이상 스스로의 감정을 믿지 않게된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건 뭘까

다시 미심쩍어지는 이 순간,


방학이 끝났지만 수강신청은 하나도 안했다는 자각과 더불어

어쩌면 일하는 곳에서 바라는대로 휴학을 하게되는 거 아닐까 하는 예측 같은건 믿어도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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