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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Oct 06. 2016

닭이냐, 옥수수냐

김영하 | 옥수수와 나

국문학 ||| 현대소설 읽기 라는 수업에서 






 모든 예술 작품에는 분투하는 대상이 출연한다. 헤밍웨이의 노인을 위한 바다는 없다란 소설에선 상어떼에서 고기를 지키려는 80세 노인이 등장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엔 일상이라는 말랑한 흰자가 싸고 있는 고통의 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란 소설은 주변인물들 사이를 부유하며 관조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을 멈추지 않는 ‘나’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작가로서 지키고자하는 가치나 신념도 없다. 

대화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짐작하는 듯 하지만 그마저도 번번히 빗나가 전 아내가 만나는 사람도 

헛다리 짚고, 자신의 골수팬을 앞에 두고도 의심한다.

 


그에게 던져진 것은 단지 글을 써야만한단 상황 뿐인데, 이마저도 동기가 확실치 않다. 

정도, 관심도 없는 딸아이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다. 전업작가인 그는 일을 하는 순간에도 갈등에 휩싸인다. 글을 쓰자니, 전처의 정부인 듯한 출판사 사장의 잇속을 채워주는 것 같고, 쓰지 않자니 소송에 휩싸이는 등 골치아픈 일들이 생겨날 것 같다.



결국 쓰긴 쓰되 ‘못’쓰는 글을 써버리자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팬이라고 밝힌 출판사 사장이 읽어도 분명치 않고 모호한 글을 쓰잔 아이디어로 말이다. 

여기서 그는 뉴욕의 한 집에서 사장의 와이프를 만나게 된다. 

뮤즈인 그녀가 주는 영감을 받아 섹스하고, 글을 쓰고, 섹스하고 글을 쓰는 그런 판타지적 장면을 

김영하는 그려나간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그가 입 속에 털어놓은 약이 독약인지 수면제인진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 묘사된 그의 캐릭터상 마지막에 교환해버린 선택마저 또 다른 오판을 범했을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딱히 뚜렷한 목적도 없었던 한 남자가, 그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설을 완결시키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여인을 버리고도 살아남고 싶었던 이유는 대체 뭘까?

 


이 소설이 가진 다양한 픽션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 박만수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바가 뚜렷하다. 수지와 철학의 섹스파트너적 관계, 월스트릿에서 번 자본으로 문학의 순수함을 예찬하는 사장, 박작가의 육체만을 탐하는 사장의 아내.. 등 모두들 박만수의 상황이나 감정이야 어쨌건 스스로의 목적을 드러내고, 그에게 부합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확고한 거절도, 그렇다고 흔쾌한 승낙도 없이 모호한 태도로 일관할 뿐이다.



그래서 박만수는 옥수수다. 사장이나 사장의 아내만이 닭이 아니다. 전처도,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도, 그에게 뉴욕에 가지 말라고 했던 철학도 모두 닭이다. 자신의 작품을 오해하는 독자에게조차 어쩔 수 없지 단념하는 박만수에게, 그들은 줄기차게 요구한다.



만약 박만수가 끝까지 글을 쓰지 않았다면 탐스럽고 먹음직한 옥수수가 아니라 카프카의 작품 속 벌레와 같은 존재로 사과에 맞아 죽는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김영하는 박만수란 무력한 인간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먹이사슬과 위계질서가 ‘문명화’된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잡아 먹히거나 잡아먹거나’란 그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드러난다.



샤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다. 

두명의 친구들의 섹스파트너를 부르는 별명에 대해 궁금해하고, 자신의 아이가 전처를 쫓아간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주인공을 통해서, 김영하는 실존주의적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그는 섹스파트너란 관념에 집착하지만, 당위성에 대해선 글쎄란 입장이다. 

집요하게 은연의 진실을 밝힐 뿐인 맥없는 그의 시도도 마찬가지다.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블라디미르 나르코브와 밀란 쿤데라의 교집합점이 드러난다. 

소설의 역할과 당위성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입장을 고수한다는 입장이 그렇다. 

세상에는 아직도 수없이 많은 지루하고, 상투적인 교훈을 늘어놓을뿐더러, 난해하고 길기까지 한 소설이 계속 쓰여진단 사실을 인식한다면,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한국문학계에 분명 신선하고도 유쾌하기까지 한 탈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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