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송을 불허한다
나는 그가 스물 여덟살일 때 처음 만났다.
그는 빠른 년생이어서 어울려 노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한살 차이가 났다.
그는 내게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하다> 란 책 이야기를 해줬다.
아홉수에 죽기로 결심한 여자가 세계여행을 다니고 다시 살아가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보통의 밀도로 나눴던 대화가 왜인지 오랫동안 기억나는 때가 있다.
그는 이별한 후 책 속 주인공처럼 홀로 유럽여행을 떠났고, 돌아와서 잠깐 헤매는 듯했지만
결국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언제나 그가 나보다 훨씬 더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거란 생각을 했는데
정말 그 생각이 맞았다. 언제나 이런 류의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듯.
그날따라 비가 왔고, 아침부터 이상하게 그 사람의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4년전인가 모델일을 하다 뮤직비디오를 함께 촬영한 적이 있는 언니의 SNS 속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부시게 예쁘고 또 천사같이 순해서 마음속으로 몰래 흠모하며 동경하기 위해 팔로우를 하며 종종 눈팅을 했었는데
거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그 언니가 올린 사진 속에서 편안해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이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안도했다.
줘버린 선물에도 마음이 변해버리면 유통기한이 끝나버리는지
그가 준 화분은 모두 시들었고, 인형들은 조카가 침을 묻히거나 망가뜨려 누더기가 됐다.
꽃다발들은 이미 시든지 오래여서 황급히 자취를 감췄고
귀걸이는 한짝씩 없어지거나 목걸이는 끊어졌다.
앞으로 또다시 아파트 현관문 보안키를 누르고 엘레베이터에 들어갈 때까지
바깥에서 지켜보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내게 세웠던 '남자가 여자를 진짜 좋아하면 하는 행동들' 의 메뉴얼들은 모두 지워보려 한다.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완성형이 될 수 없었던 기억은 있는 법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린 다음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만남에 온 집중을 다 하는 것.
지금 곁에 함께 있어주는 존재의 소중함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다.
벌레를 잘 잡아주는 이 사람과의 만남이 재밌고 즐거운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