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가 있다면

by 스몰빅토크

한 반당 40명의 사람들이 매년 4번씩 열리는 모델 아카데미의 문을 두들긴다.

반은 4개정도다.


평균적으로 25세 이하의 사람들이지만 간혹 희망일지-한판도박 심리에서일지

스물아홉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이있다.


레드립을 칠하고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인 스텝은

얼마전 수술한 코에 붕대를 감고 지겨운 얼굴로

워킹복과 워킹구두를 가져와야한다고 기계적으로 말할 뿐이었다.

다른 사항은 없었다.


학원에서는 출석을 빼놓지 않고 성실히 다녀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개근상을 타는 모델만큼 매력없는 건 세상에 또 어딨을까?


아카데미를 등록한 160명 중 6명의 학생들이 오디션을 통과했다.

그리고 일은 어느날 불현듯 갑자기 문자로 날아든다.


신사동 781-14번지.

오후 3시, OOO숍, 피팅가능?


인생에 계획성이란 단어가 없는 사람만이 낙천적이고도 긍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아 그리고 교통비도 조금은 두둑해야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최대 모델 소속사라는 곳의 오디션을 통과한

내게 처음 맡겨진 일은 곧 있을 패션쇼의 가봉모델이었다.


패션쇼는 디자이너가 헤어와 메이크업, 옷 순서까지 모두 기획-감독한다.

나는 쇼 하기 전, 디자이너가 구상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메인 옷을 입어보는

‘가봉’단계에 투입됐다.


그곳에서 처음 지춘희 선생님을 뵀다.

짧은 단발에, 두꺼운 테를 두른 안경과 고양이처럼 올라간 입꼬리.

청담동에 위치한 한 건물이 모두 그녀의 작업실이다.


스무살의 나는 매일 워킹을 못해 등짝을 맞으며 혼이 났고,

척추측만이 심해 늘 자세 지적을 받았으며,

178cm에 49kg이라는 몸무게는 등이 굽고 허약해 보이기 일쑤였다.

그런 자신감 없던 나는 지춘희 선생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떨렸다.


그동안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을 수없이 많이 다녀봤지만

그녀의 작업실은 아직도 그림을 그릴수 있을만큼 정말 특별하다.


한쪽 벽은 통유리로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부드러운 카펫트가 깔린 거실과 볼때마다 달라지는 가죽시트의 소파,

좋은 향이 뿜어져 나오는 디퓨저, 고요하게 옷걸이에 걸려

세상의 빛을 발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다음 시즌의 옷들.


지춘희 선생님은

“예쁜데? 이번에 안서니?” 하고 싱긋 웃어보이셨다.

워킹을 했지만 “좀 더 힘차게 하면 좋겠다”고 다음 기회로 넘어갔지만.

내가 SBS 슈퍼모델에 나가게 된 이유도 지춘희 선생님때문이었다.


매일매일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자신감도 없이 눈치만 보던 내게

손을 잡아주시면서 “자신감 가지라”고 응원해주셨던 선생님의 목소리는

‘나중에 그런 어른이 되어야지’하고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분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정말 감사했다고 냉혹한 패션계에서 정말 따뜻한 위안이었다고 감사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은 4년 후 SBS 슈퍼모델 선발대회를 치른 뒤에 이뤄질 수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글쓰기와 미용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