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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Jul 28. 2017

영화 아가씨와 박찬욱의 성향

“지난 20세기까지는 남성이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전쟁과 폭력, 테러, 강간이 이어졌죠.

앞으로의 시대는 여성이 리더가 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길 기대하곤 합니다.”


여느때처럼 졸던 전공수업에서

번개처럼 떨어진 교수님의 말씀.


박찬욱도 비슷한 인터뷰를 했다.


영화 <아가씨>가 개봉된 후

왜 여성에 대한 영화를 만드냐는 질문에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동해 남성의 재단된 시각에 맞서고, 

맞춰진 틀에 대항하는 용감한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싶고, 현실에서도 보고 싶다”

고 말했다.     


영화에는 세 종류의 여성이 등장한다. 

    

남성의 요구에 부합해 그대로 행동하고 순응하는 문소리와 김해숙,

겉보기엔 순진한척 복종하는 듯 하지만 얻어지는 이익을 이용해 반전을 설계하는

히데코 아가씨 (김민희),

자신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전쟁을 정면돌파하는 숙희 (김태리).      


여성들은 이 세 종류의 역할 중 누군가를 선택해 살아가야만 한다.


남성의 권력을 이용하는 건 여자에겐 가장 쉬운 방법이다.

남성의 선택을 받은 여자들은, 모든 권력을 지니게 된다.     


우린 무명에 가까웠던 여자 연예인이 인기 최고의 스타와 연애설이 난 후, 

그 가치나 네임벨류가 스타와 비슷하게까지 급등하는 상황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반면 그 반대의 경우는 (유명세 있는 여자가 무명이거나 가난한 남자와 사귀는) 어떤가?

그 여자가 획득한 능력과 미모에 대해 의심이 시작되고, 비난이 가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편견이 바로 수많은 여성들이 (특히 높은 사회적 위치와 많은 권력을 가진)남성들의 

선택을 받으려는 이유다.

<아가씨>는 문소리 같은 순응적 여성상에 종말을 고한다.

그녀는 거듭되는 폭력에 정신이 이상해지고 결국 스스로 목을 멘다.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

강남역 살인사건 뒤, 가열되는 여성혐오에 대한 질문에     

박찬욱 감독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 살면서 느끼는 공포억울함은 그냥 현실이다

막연히 '나는 잘 모르지만 남들이 뭐 그런다더라'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다르게 말할 근거가 뭐가 있나.

 현실이 그렇다고 하면 (남자들이)잘못을 바로잡을 생각을 해야 한다반성도 하고."      



문소리와 김민희의 낭독 장면은 미묘하게 다르다.

히데코는 동적으로 움직인다. 표정변화가 생생하다. 

정전이 된 순간에도 외워버린 책의 내용을 읽으며 그 순간 자체를 즐긴다.

강요된 역할 자체를 즐기는 모습.

     

이건 김민희라는 배우의 사생활과 일치하는 아이러니다.

홍상수 감독의 배우에서, 사랑하는 연인 관계로 넘나드는 

수동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아티스트의 이중면모다.

반면 숙희야말로 박찬욱이 그리는 대안적, 희망적 존재다.

‘바깥 세상을 보고싶다’. 는 만만치 않은 야심을 가진 그녀는

후지와라 백작의 요구에 목숨걸고 맞선다.     


“당신의 장난감같은 X으로는 그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다”며

서슬퍼런 눈빛으로 싸운다.     


(예언을 하나 하자면

박찬욱의 기대처럼, 아가씨에서 숙희의 역할처럼,

김태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가 될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곧 굶어죽을 어린것들을 부잣집 도련님, 아가씨로 만들어준다니 얼마나 보람찬 일인가"


영화 초반, 숙희는 아기를 안고 등장한다.

팔아넘길 아기들에게 젖을 주고 싶어하는 모성애 강한 숙희.


박찬욱 감독은 여성의 희망을 모성애에서 읽었다.

다음 세대를 탄생시키고 그걸 지켜내는 여성말이다. 


아이의 복수를 감행하는 엄마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 

딸아이를 위해 만들었다는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관점이다.     


아가씨를 향한 숙희의 감정또한, 사랑보다는 

순수한 아기를 바라보고 지켜야 할 존재로 여기는 엄마의 마음에 가깝다.     

글씨를 몰라요     

숙희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적 캐릭터다.

미천한 신분으로 교양, 덕목, 매너에 대해 교육받지 않았다.

학습되지 않은 무지야말로 권력에 당당히 대항할 수 있는 에너지이자 파괴력이기 때문이다.

영화 <마더>

영화 내내 번뜩이는 눈빛을 쏘아대던 숙희는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현대사회에서 남성의 권력에 대항하는 여성은 ‘미친여자’로 읽힌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에도 두 여자 주인공 모두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결국 미쳐버린 이모(문소리), 

아가씨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자는 후지와라 백작과 숙희의 계략,

갇혀버리는 숙희,     

어떤 삶을 살건 정신병은 피할 수 없는 코드다.


보편적으로 순응하며 살다 정말로 정신이 이상해져버리거나

저항하고 싸우다가 정신이 이상한 취급을 받거나 말이다.     


이 굴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어두운 바닷길을 흐릿하게 비춰가며 나아가는 배의 모습에서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떤 폭풍우와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임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라고.

또렷하게 던지는 숙희의 눈빛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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