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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Dec 14. 2022

고향에 도착하셨나요?

그분의 사랑안에 머물러.

주제 말씀: [요일 4:16, 새번역]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key message: 사랑이 우리를 일어서게 합니다. 


바구니에 담긴 잎사귀 

저는 경기도 광주에 살았습니다. 그 동네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대학 진학을 위해 성남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21km. 

딱 여기 영탑리에서 공군부대 앞으로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서산터미널까지 가는 거리가 21km입니다 

6시에 일어나, 20분을 걸어서,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학교까지 7시 30분에 도착해야 했고, 밤 9시에 야자가 끝나면 다시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고등학교 그 시절.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학교 뒷 산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20~30개 정도 계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업이 4시쯤 끝나면 청소 시간인데요. 청소를 마치고, 그 계단을 올라갑니다. 

거기에 자판기가 하나 있었어요. 

90년대 자판기

밀크커피, 설탕 커피 그리고 다른 자판기에는 거의 없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야채수프였습니다. 

100원을 넣고 야채수프를 눌러 그것을 마시면서 아래 놓여있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봤습니다. 

야채스프와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그 풍경,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같은 교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수업과 야자를 하던 일상에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안식처였습니다. 

80년대 분당

밤 9시가 되면 학교를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한 버스정류장으로 갔습니다. 보통 10분 ~ 20분을 기다려야 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완행열차. 

모든 버스정류장을 거치는 버스였기 때문에 손잡이를 잡은 채 몸을 이리저리 버티면 몸은 점점 더 지쳐만 갑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똑같이 집으로 돌아오던 날들 속에서도 선물 같은 날들이 있었습니다. 


10월, 가을이 다 지나가는 끝자락 어느 날. 

제 방에 LP 턴 테이블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였습니다. 

지친 몸으로 내 방으로 돌아오니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LP 턴 테이블 위에 바구니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 바구니에는 낙엽이 수북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손으로 그 낙엽을 만져보며 "이걸 왜 여기에 뒀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시면서 낙엽을 만지고 있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아들 공부하느라 가을이 가는 줄도 모를 것 같아서 갖다 놨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가 갖다 주신 낙엽 때문에 성적이 엄청 오른다거나, 무슨 문제가 해결됐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사실 그날의 일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거의 기억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어른이 되고 그 장면이 그렇게 생각이 나요. 문득 문득 떠오르면 참 행복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교사로서 일하면서 어린 시절 엄마가 나에게 준 작은 사랑이 나의 삶의 건강하고 단단한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나의 존재감이 무너지고,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나의 작은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그저 흔한 낙엽이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 엄마의 사랑이 있었고,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내 삶의 흔들리지 않는 존재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엄마 이외에도 어릴 적 다니던 교회 전도사님, 지금도 만나고 사랑하는 장로님, 나를 아껴주는 선생님들 그리고 지금은 아내와 아이들이 나의 삶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토대가 되어 줍니다. 


사랑이 삶의 토대가 됩니다

독립 영화 '박화영'은 가출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박화영이라는 주인공은 가출팸에서 '엄마'로 불리고 있습니다. 박화영은 엄마에게 버림받은 뒤 낡은 주택에서 삽니다. 이 집은 의절한 엄마가 남겨 준 자취방입니다. 이곳은 가출팸의 아지트가 되고 온갖 불법이 일어나는 곳이 됩니다. 

사랑이 결핍된 박화영은 가출팸 아이들의 거짓 사랑에 노예가 됩니다. 

가출팸 아이들은 박화영을 '엄마'라고 부르면서 그녀를 의지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엄마 라면 끓여 주세요.", "엄마 돈이 필요해요", "엄마 도와주세요"라고 하면서 그녀에게 사랑을 요구하며 그녀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애정결핍을 이용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울 뿐입니다. 일종의 가스라이팅 입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으며 사랑이 결핍된 박화영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자신의 존재감을 유지합니다. 

위장된 사랑 위에 거짓 존재감을 세워 삶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거짓 사랑은 그녀를 파멸 이끕니다. 살인을 저지른 가출 친구의 죄를 홀로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스스로는 '엄마'니까 내가 해야 해라고 생각했지만, 감옥에 다녀온 그녀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영화 박화영은 결핍된 청소년의 흔들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후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랑을 구걸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이런 결핍에 빠진 것은 단지 영화 속의 박화영만은 아닙니다. 


헨리 나우엔은 '공동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기도해야 한다. 당신을 "내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인정과 칭찬과 성공을 구걸하며 돌아다닐 것이고, 그러면 자유를 잃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이는 존재입니다. 

탕자의 구걸 

누가복음에는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눅15:13-16, 새번역]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14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거부하고 집을 떠난 탕자는 얼마 되지 않아 거지가 되고 맙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모든 것이 풍족하여 결핍이 없었지만, 집을 떠난 지금은 완전한 결핍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정신적으로 결핍했으며, 육체적으로도 결핍되어 허기진 배를 돼지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참 신기한 것이 영혼의 허기를 먹는 것으로 채우려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버림받은 탕자의 모습은 단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어떤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을 일컬어 '기투'된 존재라고 했습니다. 

샘 징크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런 까닭없이 내던져진 존재다'

기투된 존재란, 이 세상에 아무 이유와 목적도 없이 던져진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도 삶의 목적도 없는 그런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홀로 남겨진 존재라 했습니다. 어떠한 절대적인 존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망망한 바다 위에 표류하는 존재를 인간이라 했습니다. 

사르트르는 무신론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그의 말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무신론자인 그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절대적 결핍, 무목적, 무의미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에게 인간은 고향을 잃어버린 채 이리저리 헤메이는 존재입니다. 


거짓 결핍 

사도 요한이 살던 시대는 크게 두 가지 거짓 가르침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입니다. 이들은 주장하는 바가 달랐지만 공통점은 구원이 값없이 주어진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유대주의는 더 나은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고, 영지주의는 더 나은 지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정직한 반응이에요. 인간 스스로 자신을 봐도 말이 안되는 존재거든요. 

부정직하고, 겉과 속이 다르고, 미움이 있고 그래서 고통스럽죠. 

무지하고, 인식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뭘 안다고 할 때 최고의 앎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더 나은 행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고,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도 아주 한계적일 뿐입니다. 

성경에는 눈 먼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요9:1-5, 새번역]

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4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당연히 앞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이고요. 예수님은 감각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지만, 그 본 뜻은 너희들도 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는 '인간의 인식적 한계' 상황을 말해주고 계십니다. 즉, 인간은 빛되신 예수를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존재, 인간의 처지,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관 안에서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도 없는 행위를 해야만 한다고 하고, 알 수 없는 지식을 추구하라는 것이 초대교회 당시의 이단인데, 이들은 보기는 본 것입니다. 더 나은 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보기는 봤고, 더 나은 지식이 있기는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요구했기에 이들은 결국 '결핍을 생산'해 내고 만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다 똑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인 됨을 아셨기에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사55:1, 새번역]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고 말씀하셨지만, 무지한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그럴만한 자격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인 은혜로,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돌아오는 자들에게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아니 이미 잔치는 벌어져 상은 차려져 있고, 배고픈 상태로 오는 자들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는 오늘의 문화는 초대 교회 시절 이단의 주장처럼 여전히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더 나은 행동, 더 나은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인데요. 그 드라마에는 재벌 회장인 '진양철' 회장과 그의 자녀들이 누가 아버지를 이어 기업을 물려받을지를 놓고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저렇게 돈이 많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녀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일과 돈의 대상으로 아버지도 그런 관계로 자녀를 만난다는 것이 마치 고향을 잃어버린 느낌? 삶에서 안식처가 될 곳을 잃어버린 느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향을 상실한 인간처럼 말이죠. 


우리의 고향 되신 예수 그리스도 

얼마 전 고2 학생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 중에 자신이 어릴 적 살았던 양평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적은 글이 있는데요. 무더운 여름 웬만해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 가족은 평소에 창문을 열어 두었답니다. 그렇게 창문을 열어두면 시원한 바람이 방안의 더운 공기를 몰아내어 시원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요. 

이렇게 열어 놓은 창문 틈 사이로 개구리 소리가 들렸답니다. 

작가는 개구리 소리에 대해 글을 썼지만, 저는 개구리 소리, 양평의 집, 작은 창문, 부모님, 가족, 함께 지냄, 안아주기를 연상했습니다. 분명히 그곳은 고향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 내 마음이 힘들 때 돌아갈 쉼터, 다시 힘을 얻는 곳. 


저에게 고향은 야채스프, 어머니의 낙엽 담은 바구니이고, 탕자에게 고향은 아버지의 집이었고, 고2 학생에게 고향은 양평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 안에는 '사랑함'이 있고, 그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고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학기를 마무리한 여러분과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못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나의 시선 위에 서 있습니까?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채 절망한 감정 위에 서 있습니까? 

친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해 그들과 자신을 미워하는 증오 위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고향과 얼마나 멀리 와 있습니까? 얼마나 멀리 고향을 떠나 누더기가 되었습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 관계 단절로 인한 고통, 보잘것없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 나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한 미움.. 이것은 모두 우리가 고향을 떠나 있기에 일어나는 일들은 아닐까요? 


헨리 나우엔을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딱 30분만이라도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 도하지 않고 복음의 간단한 말씀 한마디를 마주할 수 있다 면 얼마나 좋을까. 예를 들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는 구절을 세 번 반복해 서 말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의 뒷부분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내게 는 부족한 것도 많고 원하는 것 또한 많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이 늘 불안하고 초조한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진리 자 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계속 되뇌며 그 진리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면, 점점 그 말씀이 내면에 있는 성소의 벽에 새겨진다. 거기서 생겨나는 여유 덕분에 우리는 직장 동료와 일, 가족과 친 구, 하루 중에 만날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며칠 전 아주 힘든 날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무겁고 힘이 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서 참 힘든 날이었어요. 

그날 밤에 DCC에서 토론회가 있어서 거기에 가려고 생활관을 나와서 렘넌트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올라 렘넌트 홀로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여기가 아닌가 보네"라고 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장소를 다시 확인하려는데, 특기적성 선생님께서 피아노로 찬양을 치시는 거예요. 딱 2초를 듣고,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또 5초를 들었습니다. 

딱 7초! 주님의 주신 은혜였습니다. 마음에 힘이 생기고,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상황이 변한 것은 없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했습니다. 

이것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절망과 분노, 미움과 좌절의 세계안에 있는 우리를 주님께서 소망과 사랑, 의미와 창조의 세계로 옮겨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향에 서 계신가요? 주님의 사랑 앞에 서 계신가요? 

2022년 1년 동안 나는 어디서 서 있었습니까? 

그리고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고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요일 4:16, 새번역]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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