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집을 지었습니다. 생각보다 크게 지어서 마음이 영 편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집을 원했고, 가족 중 한 분은 빛이 많이 들어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60평의 크기를 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다양한 요구를 반영해서 설계사가 설계를 하고 착공을 시작했습니다.
시공 책임은 장인 어른이 맡으셨는데 ㅎㅎ
저의 장인은 오랫동안 빌라를 지어서 판매를 해오신 소규모 건설업자이십니다. 한 30년 넘게 해오셨습니다.
그러니 시공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이시지요.
근데 재미있는 사실이 시공책임자가 설계도를 거의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놀랍죠?
하지만 우리나라 빌라 시공 시장을 알면 이해가 됩니다.
우리나라 빌라 시공이라는 것은 딱 정해준 규격같은 것이 있습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내용들입니다.
천장 높이는 얼마이고, 방 넓이는 어느 정도이며, 레이아웃도 거의 딱 정해져 있습니다.
설계를 디테일하게 보지 않고 목수들에게 맡기고, 집이 다 지어진 다음에 오히려 설계를 변경합니다.
설계대로 짓는 것이 아니라, 다 지어진 집에 설계를 맞추는 것입니다.
근데 저와 아내는 소위 멋을 좀 내는 설계사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상당히 독특한 디자인과 엄청나게 디테일한 설계도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익히 해오셨던 대로 장인은 설계를 보지 않고 시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개인이 60평 이상의 집은 짓지 못하게 하나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집이 독특하다는 점과 천고가 높다는 사실을 아셨다는 웃지 못할 사건이 우리 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쨓든 집은 완성이 되었고, 너무나도 눈에 띄고, 생각보다 웅장한 집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저와 아내는 참 부담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당연히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예상 밖의 지출에 마음이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우리 집이 좋은 일로 쓰일 것을 믿고 있습니다.
집을 갖게 되면서 제 마음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불편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어느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집은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냅니다.
벌써 주변에서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라느니, 성공했다느니, 부르주아니 하는 장난 섞인 말들을 건넵니다.
진지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분명한 것은 예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건네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는 상투적으로까지 들리는 '네가 소유한 것들이 바로 너이다'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듯 합니다. 10~20년 전만해도 우리 사회는 많은 소유보다는 사람의 됨됨이를 통해서 사람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마음속으로는 소유를 중시 여긴 것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최근에는 드러내놓고 '소유'를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성공을 논하는 문화가 구축되었습니다.
그래서 불편합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한 것과 상관없이 나는 나의 내면의 문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도달해야 할 나의 영혼과 내면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욕구(Needs)와 욕망(Desires)의 정의를 챗 GPT에게 물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욕구는 생존을 위한 필요이고, 욕망은 그것과는 상관없는 것에 대한 필요를 말합니다.
욕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내부로부터 생성되는 것이지만, 욕망은 사람, 문화, 사회적 요소와 같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욕구는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을 주지만, 욕망은 절망을 가져다 줍니다.
결국 욕구는 몸의 필요이고, 욕망은 마음의 필요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물과 관계 맺음에 있어서 욕구의 관계와 욕망의 관계를 맺습니다.
전자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필수적으로 맺는 관계이고, 후자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해주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소비사회는 '네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내가 보이라, 그러면 나는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라는 신탁이 주어진 사회입니다.
자동차 브랜드, 살고 있는 아파트의 이름, 내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입고 있는 옷, 내가 자주가는 식당이 어디인지 알려주면, 우리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가지고 있는 물건을 통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했다면, 소비사회는 다른 주문을 외우고 있습니다. "네가 이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너는 그런 사람이다"라고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사물을 원했지만, 이제는 사물이 우리를 규정하고 억압합니다. 소비의 사회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규정하고, 자극하며, 그 문법을 따라 살게합니다.
소유로 우리를 규정하는 삶으로부터 반드시 탈피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에는 소유로 인해 자유를 누리지 못한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19:16-22, 새번역]
16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예수께 물었다. "어느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20 그 젊은이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2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삶의 본질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으로 그를 초대했지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 때문에 자유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우리를 소유의 방식으로 억압하려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답을 해줘야 합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를 더 큰 존재라고 말할 때도, 더 작은 존재라고 말할 때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로 설명됩니다.